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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베드로전서

벧전 3장 18-22절(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물세례) - 권율

by Preacher 2023.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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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3장 18-22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물세례

권율 목사 2018. 10. 11

부곡중앙교회 청년부 청년회 [부산시] https://blog.naver.com/ryulkwon0616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오늘 본문 18절은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왜냐하면”(ὅτι)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이라는 말을 넣어서 18절 전반부만 읽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는 사실만 따로 떼어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앞 구절, 17절과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우선 17절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 다음에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제 17-18절을 합쳐서 핵심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됩니다. “선행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죄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삶과 교리를 하나로 묶어 주기 때문입니다. 17절이 우리 신자들이 경험하는 일상이라고 하면, 18절은 기독론과 관련된 중대한 교리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단번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단지 교리적으로만 다루려고 합니다. 그분이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말하는데도, 지금 나의 일상과는 별 상관없는 것처럼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기 때문에(18절), 우리 성도들이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17절). 다시 말해, 여러분이 복음 때문에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정말 단순한 영적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일상을 살면서 이러한 원리를 얼마나 인식하고 있습니까? 선을 행하다가 고난 받게 될 때,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사실을 과연 실제적으로 떠올리고 있습니까? 완전한 의인이신 그분께서 한없이 불의한 자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선을 행하다가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것이 정말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훨씬 큰 복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18절 말씀처럼 “하나님 앞으로 인도”된 존재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목적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시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존전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의 일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19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이 짧은 한 구절은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신학적 관점으로 아주 신중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우선 이 구절을 잘못 읽으면 이렇게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의 상태로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셔서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이것은 로마 천주교가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지옥(또는 음부)으로 내려가셔서 거기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은 성경의 다른 증언들을 볼 때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십자가 위에서 한편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즉시 낙원으로 가셨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과 조화를 이루는 가장 무난한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옥에 있는 영들”은 베드로가 증언하듯이 20절에 나오는 “그들”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입니다. 즉,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던 악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노아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불순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전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이미 ‘지옥’에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19절에서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라는 표현을 정확히 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구약 시대에도 계셨음을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신약에서 보다 명확하게 표현될 뿐이지,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이미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노아 시대에도 당연히 함께 계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19절을 정리해 보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또한 성령을 통해 (지금)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전하셨다. 그들은 노아 시대에 끝까지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지금 그 영들이 지옥(또는 음부)에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 해석은 고대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구약 시대에서도 성령을 통해 이미 역사하고 계셨음을 말해 줍니다. 당시 방주를 짓던 노아는 성령님께 쓰임 받은 전도의 도구였습니다. 노아를 통해 회개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계속 선포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보시다시피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하다가 갑자기 노아 방주 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연결고리가 있는데 그것은 ‘물’입니다. 20절 후반부를 보시면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그냥 “방주로 말미암아” 또는 “방주를 통해서”라는 말로 표현해야 더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노아 때 일어나 홍수, 즉 엄청난 양의 물은 전 세계를 파괴하는 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21절에 나오는데,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보시다시피 노아 시대의 그 물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말씀합니다. 노아 당시에도 그 물은 세상을 심판하는 도구임과 동시에, 세상에서 노아 식구들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구원하는 표”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의미였지만, 노아 및 그의 가족들에게는 구원의 표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베푸는 세례 때의 물도 그러합니다. 이전의 내 죄악을 심판하는 의미임과 동시에 이제는 세상의 그 죄악으로부터 나를 구별하는 구원의 표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었음을 나타내는 거룩한 표식이 바로 물로 베풀어지는 ‘세례’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덧붙이듯이, 세례 자체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가 이미 주어졌음을 인쳐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난해한 본문을 신중하게 살펴봤습니다. 두 가지만 기억하기 원합니다. 먼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고난 받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노아 및 베드로 당시처럼 지금도 성령으로 여러 설교자들을 통해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묵상하며 죄에서 돌이키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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