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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베드로전서

벧전 5장 5-7절(겸손으로 염려를 물리치라) - 이준원

by Preacher 2023.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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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5장 5-7

겸손으로 염려를 물리치라

이준원 목사 2012.7.8.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오래 전 스웨덴에서 한 미군 병사가 버스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옆 좌석에 앉은 남자에게 자기 나라에 대해 자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입니다. 일개 시민이라도 원한다면 약속을 하고 백악관에 가서 대통령을 만나 여러 가지 문제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은 들은 옆자리의 스웨덴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래요? 훌륭하군요.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스웨덴에서는 국왕께서 일반 시민들과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닙니다.” 그리고 조금 후 한 스웨덴 사람이 버스에서 내리자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미군 병사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방금 버스에서 내린 저분, 저 남자 분이 바로 우리나라의 구스타프 6세 아돌프 국왕이십니다.” 낮고 천한 사람이 성공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감동을 주지만, 높은 사람이 스스로 낮은 자리에 내려가 섬겼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겸손한 사람만이 그렇게 낮은 자리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성경은 겸손이야말로 염려를 물리치는 귀한 방법임을 알려줍니다. 겸손하면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겸손의 태도

 

베드로전서를 쓴 사도 베드로는 원래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폭풍이 부는 물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고 “주님이시거든 저도 물위를 걷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여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외의 인간으로는 유일하게 물위를 걷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도우심으로 물 위를 걸으면서도 물에 빠질까봐 두려워합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예수님께 위험한 일이 일어날까봐 걱정합니다. 그래서 검을 빼들어 로마 병사들에게 대항해 싸우려 하다가 한 사람의 귀를 자르기까지 합니다. 이 외에도 너무나 많은 경우에 베드로는 걱정합니다. 그렇지만 베드로 염려로 인해 계속되는 문제들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제대로 다루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5절부터 14절은 베드로가 보낸 첫 번째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다른 제목을 붙이자면 ‘영적 성숙에 반드시 필요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아기라면 엄마 젖을 먹으려고 허겁지겁 합니다. 조금씩 자라면서 식욕이 왕성해서 잘 먹고 또 잘 자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건강한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이 왕성해서 열심히 받아먹고 영적으로 자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사모함이 없다면 어딘가 영적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입니다. 정상적인 크리스천이라면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지려는 갈망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영적 성숙은 우리의 삶을 바른 기초 위에 세울 때 가능합니다. 그 기초 중의 하나가 바로 겸손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5절)

 

베드로 사도가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할 때, 이것은 끈이나 매듭으로 자신을 맨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단어입니다. 여기에는 작업용 앞치마를 두른다는 뜻이 있습니다. 음식을 하거나 먼지가 많이 나는 일을 할 때(Home Depot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 입는 것처럼) 앞치마를 두릅니다. 1세기 로마 사회에서 노예들도 일하면서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옷 위에 앞치마를 둘렀습니다. 그래서 ‘허리를 동이다’라는 단어는 겸손한 봉사와 같은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대 사람들은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베드로는 서로를 향해 겸손의 허리를 동이라, 즉 서로서로 겸손의 옷을 입으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을 위해 베드로는 잠언의 말씀을 5절 뒷부분에 인용합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잠 3:34)

 

그런데 베드로가 원래 이런 말을 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상상해보면, 제자들은 더러운 발을 씻지도 않고 이제 저녁을 먹으려 합니다. 그것은 바닥 매트 위에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하던 당시 문화에서 문제가 됩니다. 인원이 어느 정도가 넘으면 한 사람의 머리가 다른 사람의 발 가까이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식사를 하기 전에 그룹에서 가장 지위가 낮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 당시의 관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 아무도 그런 종의 역할을 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모두에게 겸손의 본을 보이며 직접 그 일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 제자들 중 아무도 나서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도 가장 낮은 자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왕이 되실 것 같은 이 상황에서, 자기가 남의 발을 씻겨주는 낮은 자가 되어 버리면 2인자 자리를 놓고 벌이는 경쟁에서 뒤처지게 되기 때문에, 아무도 남의 발을 씻겨주지 않은 채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는 거기서 가장 높은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이도 가장 많은 편이었고 언제나 가장 앞장서 나서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이름이 세베대였는데, 그는 요즘 말로 하면 갈릴리 호수에서 어업계의 회장님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거기서 배를 빌려 일하던 어부였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속으로 베드로를 향해 ‘왜 도련님도 몰라보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베드로는 나중에 변화되어 겸손의 비밀을 깨닫고 오늘 본문에서 겸손하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16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다. 17 교만한 눈과 거짓말하는 혀와 무죄한 사람을 피 흘리게 하는 손과 18 악한 계교를 꾸미는 마음과 악한 일을 저지르려고 치닫는 발과, 19 거짓으로 증거하는 사람과, 친구 사이를 이간하는 사람이다.” (잠 6:16-19)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가장 앞에 오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토록 교만을 미워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인류의 타락을 가져온 죄가 바로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교만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마귀의 특징이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하다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지만 교만한 자는 대적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성경에 너무나 많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보다 강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대적하시는데 잘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자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음이 찢어지고 눈물이 나고 간절한 마음으로 나오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겸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에 참석해도 별 감동이 없고, 기도도 하기 싫고 말씀을 읽는 것은 부담이 된다면, 영적으로 병들었다는 표시입니다. 혹시 지금 자신이 교만에 빠진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아주 심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만하면 망한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맞은편에 기독교계통 학교인 정신여고가 있습니다. 매년 방학이 되면 정신여고 중창단이 미주 지역을 순회하며 연주 활동을 벌이곤 했습니다. 오래 전 인솔자와 함께 중창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단원은 모두 15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주가 끝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차를 타야 할 시간만 되면,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차 있는 데로 뛰어가 서로 먼저 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다투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공연을 했던 교회의 장로님 한 분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인솔자에게 물었습니다. “왜 저 학생들은 차를 탈 때마다 앞을 다투어 뛰어갑니까?” 인솔자가 대답하기를, 자동차의 좌석이 12개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운전사 빼고 자리가 11개라 네 명은 차 바닥에 엎드려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은 학생들이 서로 먼저 타서 자리에 앉으려고 그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인솔자의 설명은 놀랍게도 그 반대라고 했습니다. 서로 먼저 타서 엎드리기 위해 그런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정말 그럴까 궁금해진 장로님이 직접 차 있는 데로 가서 확인해 보았더니, 정말로 먼저 뛰어간 두 여학생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본 장로님은 상상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날 그 장로님은 정신여고 중창단을 위하여 15인승 밴을 제공해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학생들이 엎드리고 얻은 선물이었습니다. 겸손하니까 정말로 은혜를 주십니다.

 

2. 하나님을 향한 겸손

 

겸손의 비밀이 있습니다. 가장 낮아질 때 가장 높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여주셨습니다(빌립보서 2장). 그런데 이미 오래 전에(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나,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다.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준다.” (사 57:15)

 

이 말씀을 비롯해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높은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서 가장 높은 곳에 거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높은 데 계시는 그분과 누가 함께 있다고 합니까? 겸손한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낮은 자입니다. 높고 힘 있는 자가 아니라 낮은 자와 함께 해주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6절) 이 말씀만 보면 오래 전 “전도폭발 지도자 임상훈련”을 받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 암송 구절 중 하나가 이 구절이었는데, 강사 목사님이 손짓까지 가르쳐주시면서 ‘벧전(베드로전서) 5장 6절’이니까 ‘배가 뱃전에서 떠나는데 오륙도로 떠난다’고 외우면 된다고 했습니다.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것을 보면 그 방법이 아주 효과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란,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능력을 말합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것을 말하기도 하고, 시험의 기간을 지나는 성도들을 보호해주는 방패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때리고 어렵게 만드는 매운 손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는 능하신 손이 아니라 나를 때리시는 매운 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향해 오직 선한 뜻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하신 손으로 분명히 우리를 인도해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능하신 손아래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는 대개 이런 구절을 보며 높여주신다는 데에 초점을 맞춥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 구절에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에 초점을 맞추는데, 실제 초점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입니다. 주님 안에 있어야 능력을 받습니다. 본문 6절도 ‘하나님이 높여주신다’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그 전에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는 것이 초점입니다.

 

먼저 겸손하게 낮추어야 높아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습니다. 죽어야 부활합니다. 낮아지지 않으면 높아질 수가 없습니다. 먼저 낮아져야 높아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때가 되면”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때이지 나의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때는 언제 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실 때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때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아무렇게나 움직이시지 않습니다. 정확한 때에 이루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아무 때나 오신 것이 아니라 아주 완벽한 때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를 신뢰한다는 것은 크리스천의 믿음에 있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가장 적절한 때에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최악의 시련을 당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잠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동부의 버지니아 비치(Virginia Beach) 쪽에 가면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라고 하는 체사피크 만 다리-터널(Chesapeake Bay Bridge-Tunnel)이 있습니다. 다리길이가 장장 23마일입니다. 아주 오래 전 대학생 때 거기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다리가 바다 위로 놓여서 그 위를 달리는데 기분이 아주 상쾌하고 신기했습니다.

 

그런데 다리가 중간에 갑자기 터널로 바뀝니다. 그러니까 바다 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터널 입구로 들어가는데 기분이 좀 묘했습니다. 불안감도 들었습니다. 터널로 들어갔는데 출구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게 정말 괜찮은지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로 들어가서 무사히 반대쪽으로 나왔습니다. 어떻게 끝이 보이지도 않는 바다 속 터널을 그리도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지도에 분명히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련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끝이 없다고 결론을 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끝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들어 올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분명히 그렇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도,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우리가 할 일은 염려가 아니라 겸손입니다.

 

3.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라

 

겸손하기 위해서는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면 어려운 상황이 닥쳐왔을 때 자신을 낮추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7절)

 

새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신뢰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보여주신 돌보심에 있습니다. ‘맡기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말 위에 담요를 휙 던져 얹는 것처럼 어떤 물건 위에 다른 뭔가를 걸치는 것을 묘사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걱정거리들로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불평, 불만, 낙담, 좌절, 의심, 절망, 회의, 고통, 슬픔 등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주께 맡겨 버리라!”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휙 던져버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이러한 신뢰를 실천했던 사람들의 예가 많이 나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한나입니다(삼상 1).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었는데,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여성에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한나는 괴로운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통곡하며, 자신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아들을 주시면 평생 주님께 그 아들을 드리겠다고 서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한나가 입술은 움직이면서 속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본 제사장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줄 알고 술을 끊으라고 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뭐 눈엔 뭐 밖에 안 보인다.” 자신은 술에 취한 게 아니라는 설명을 들은 엘리는 하나님께서 한나가 구한 것을 허락해주시기를 축복해주고, 한나는 가서 먹고 다시는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지 않습니다.

 

한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왜 그녀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습니까? 상황이 변했습니까? 아닙니다.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지만 주님께 근심을 던져버렸을 때 한나 자신이 변화된 것입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은 한나에게 아들 사무엘을 주셨고, 그 아이는 자라서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나에게 다른 세 아들과 두 딸을 더해주셨습니다. 이 한나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증거가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며 그분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때에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한나에 대해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지금 자신은 너무 슬프고 절박한 심정으로 나와서 간절히 하나님께 아들을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제사장은 자기에게 술에 취했다며 야단을 칩니다. 어떤 기분이었겠습니까?

 

바로 이런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으며 힘들어 하고 있는데, 그것을 본 주변 사람들은 나를 오해하고 오히려 더 많은 짐을 지우려 듭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나아가는 것 밖에 해결책이 없습니다. 오해하는 사람에게 따지고 싸우는 것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여러 성경 말씀들을 살펴보며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돌봐주시는가 의심이 든다면, 지난번에 살펴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들에서 자라는 들꽃도 그토록 화려하게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귀한 존재로 지으신 나를 입히실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공중에 나는 새들도 신실하게 먹이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그토록 귀한 자녀인 나를 먹이실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두려움과 염려가 찾아올 때, 그것을 물리치려고 혼자 애쓰지 말고 단순히 하나님께 말씀드리면 됩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것입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됩니다.

 

“주님, 제가 지금 곤란에 처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염려가 되고,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갈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저를 돌보신다는 것을 알기에 모든 것을 아버지께 넘겨드립니다.” 이렇게 더듬거리면서라도 말할 수 있다면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 됩니다. 그런 다음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의 바른 태도입니다.

 

[나가는 말]

 

15세기 영성가로서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쓴 유명한 고전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 주님! 저를 위한 주님의 염려는, 제가 제 자신을 돌볼 수 있는 모든 관심보다 더욱 크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지 않는 사람은 매우 불안하게 생활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저의 뜻이 주님을 향해 옳고 굳게 서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제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는 주님이 제게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항상 선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암흑 속에 거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 하더라도 주님께 찬양을 드리겠나이다. 또한 저를 빛 가운데 거하게 하심이 주님의 뜻이라면 또 다시 주님께 찬양을 드리겠나이다.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저를 위로해주신다면, 주님께 찬양을 드리겠나이다. 또한 저를 고통에 빠뜨리신다 하더라도 여전히 똑같이 주님께 찬양을 드리겠나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맡겨버린 사람의 고백입니다. 바로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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