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5장 1-11
교회의 변혁
이준원 목사 015.5.6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1. 사람 중심 vs. 하나님 중심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변화되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 내에는 민주주의적 전통이 있습니다. 다수결에 의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연구해보면, 초대 교회가 아주 비민주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교회에 원하시는 것을 사도들에게 명령하셨고, 그들은 그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사도들은 교회에 장로를 세웠고, 성도들은 그들에게 순종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백성들에게서 권력이 나온다는 인본주의적 사상입니다. 몸으로 표현하자면, 발이 원하는 것 또는 손이 원하는 것을 몸 전체가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발이나 손이 아니라 머리에게서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곳입니다. 권위는 맨 꼭대기에서 중간을 거쳐 아래로 흘러 내려갑니다.
그런데 민주주의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일이 결정됩니다. 힘이 대중에게 있습니다. 독재시절에는 독재자가 혼자서 자기가 결정하고 그랬지만, 민주화가 된 후에는 투표를 하여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릅니다. 선거를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지만 교회는 다릅니다. 민주주의적으로 한다면 머리는 발이 내린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몸은 머리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디모데 형제, 혹시 이 일에 스스로 나서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자네가 원한다면 자네와 함께 일하게 되기를 정말로 고대하고 있네. 그러니 몇 월 며칠까지 되는지 안 되는지 꼭 알려주게.” 이런 식으로 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행 16: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새... 그를 데려다가...” 이것이 바울이 한 행동의 전부입니다. ‘하면 좋고 안 하면 할 수 없고’라는 식이 아니라, 그는 주님께서 주신 권위를 사용하여 디모데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바울이 개인적으로 디모데가 마음에 들어서(코드가 맞아서) 제자로 삼았다기보다는, 주님께서 디모데를 제자로 붙여 주셨기 때문에 제자로 삼고 데리고 다녔습니다.
주님께서는 디모데가 장차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로 잘 성장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사도 바울과 같이 다니며 현장 실습을 통해 제자 훈련을 받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직접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복음 전파 사역의 중심에 같이 있으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훈련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머리로만 전달하는 성경 지식이 아니라 바울의 사역을 보고 배우게 하셨습니다. 바울도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주님의 마음을 깨달은 바울은 디모데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새 교우들이 오게 되면 목장을 방문한 후에 한 곳을 정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받는 입장에서 솔직히 ‘저 사람은 우리 목장에 안 왔으면...’이라고 생각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누가 주체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을 먼저 생각하기 전에,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것을 원한다’, ‘나는 그건 싫다’라고 말하기 전에, 주님께서 과연 내게 지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의 핵심이 바로 이겁니다. ‘계속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며 살 것인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길 때 하겠다는 분도 있지만 사양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겠다는 경우이든 못 하겠다고 하는 경우이든, 겸손하게 하겠다고 또는 못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 무엇을 생각합니까? ‘내가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할 때도 ‘내가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누가 주인입니까?
사역을 하다가 그만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기 싫으니까 그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주님께서 그만 하라고 하셔서 그만두는 경우가 있습니까? 누가 주인인가를 정말 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역도 그렇고 다른 일도 그렇고, 내가 원해서 하고 내가 하기 싫어서 안 하면서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한다면 “너는 왜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내 말은 듣지 않느냐?”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겁니다. 만약 주님께서 하고 있던 사역을 그만 하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또 다른 사역을 맡기시기 위함입니다. 그냥 편안하게 놀고먹으며 쉬라고 그러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행 16:6-7)
사도 바울은 주님의 복음을 아시아에서 계속 전하려고 했습니다. 아주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성령께서 막으십니다. 왜 복음을 전하겠다는데도 막으며 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다른 일을 맡기시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것은 너무 작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더 크게 복음을 전하기 원하시는데 바울은 아시아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울에게 이제는 유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게 하셔서 유럽으로 바울을 이끄십니다.
우리가 정말 크리스천, 즉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내가 무엇을 좋아한다. 싫어한다.’ 하고 말하기 전에, 내가 좋은 대로 결정하기 전에, 정말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겠습니다. 지금 혹시 삶에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 있으십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찾지 마십시오. 과연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것을 찾으십시오.
정말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는가 아닌가를 어떻게 아는지 아십니까? 간단합니다. 정말 기도하가를 보면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다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크리스천 중에도 “이 문제가 정말 어렵다”,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정말 주님의 뜻대로 하고 싶다.”라고 말은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데도 실제로 생명을 건 기도를 하며 나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찾기 원한다면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지 않으면서 내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찾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정말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내 생각을 앞세우기 이전에 주님의 생각을 앞세우면서 기도하게 됩니다.
2. 영적 권위의 문제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아야 할 교회가 영적 권위를 상실했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위로부터 오는 권위보다는 물질이나 세속적 권력에 더 민감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관계가 약해졌거나 하지 않으면서 계속 권세를 행세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겉은 멋진 디자인이지만 속이 비어서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과도 같습니다. 겉으로는 멋진 모습일 수 있고 언제나 같아 보이지만, 속을 보면 텅텅 비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리 중에 ‘교황 무오설’이 있습니다. 교황이 하는 말은 다 진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 갈릴레오가 천동설을 주장할 때 교회에서 그를 징계했습니다. 갈릴레오는 결국 교회의 권위에 굴복하고 나가면서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라고 혼자 중얼거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나중에 정말로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자 아주 곤란해진 교황청에서 결국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이제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도 된다고 교황님이 말씀하셨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사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자라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와 다른 사람들이 교회의 잘못된 부분들을 고치려 했지만, 교회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을 파문시켰습니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은 출교 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출교라는 것은 종교적으로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개혁하려는 사람들을 출교시킨 이런 것이 바로 주님의 계시에 의해 인도함을 받지 않는 권세의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그래서 개신교회는 가톨릭 교회에 반대하여 민주적인 교회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 동안은 민주주의적인 분위기가 잘 유지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면서 평신도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만인제사장설’도 나왔습니다. 사제들만 제사장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인하여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의도는 좋았지만, 실제로 실천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중세의 암흑기에는 교황이 주님의 말씀을 대신하였고, 이제는 다수결이 그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물론 다수의 결정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적도 많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서로 다툼이 있을 때 보면 무조건 투표에 부치자고 합니다. “과반수가 넘으면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겁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교인도 아닌 사람들까지 투표하는 날 동원하여 부정 선거를 합니다. 심지어 큰 교회에서는 장로를 뽑는데 세상의 선거처럼 돈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면서 투표 결과가 잘 나오면 “주님의 뜻이다”라고 합니다. 정말 주님의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수결로 이뤄진 결정을 통하여 역사하실 때가 많은 것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다수가 좋다고 투표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단, 합심해서 기도하고 투표했을 때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렇게 하자고 한 사람들이 압도적인 다수였습니다.
“모든 백성이 저희 귀에 단 금고리들을 빼서, 아론에게 가져 왔다.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아론은 이것을 보고서 그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 하고 선포하였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렸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다.” (출 32:1-6, 새)
이것을 보시면, 금송아지를 만들자고 한 사람들이 있었고, “모든 백성”이 거기에 동조하며 금송아지 앞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선포했지만 완전한 우상 숭배였고, 사실은 그들 마음 한가운데 쾌락을 즐기려는 타락하고 음란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집에서 살다가 광야에 나와서 힘드니까, 주님의 명령 아래 움츠려들었다고 생각하고 한 번 원 없이 진탕 놀아보자는 마음이 다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근동의 우상 숭배가 바로 그런 것이었는데, 인간의 말초적인 욕구를 채워주면서 제사를 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거기에 넘어간 것입니다. 훨씬 후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났을 때 그분께 등을 돌린 사람들도 다수였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6-67)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은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가 영생을 가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통해서만 영원히 살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것을 어렵다고 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기 싫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다는 것은, 그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 대부분이 다 떠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이 만든 제도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 장로교도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중요시합니다. 사실 민주주의적으로만 잘 되어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문제가 없기 위해서 존재하는 세상의 단체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함께 감당하기 위해 모인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따르는 것도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과정으로 하는 것이지, 주님의 명령과 반대되는 것을 다수의 결정으로 통과시켰다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속한 미국장로교의 결혼 정책이 요즘 문제입니다. 다수의 결정에 의해서 결혼을 “두 사람간의 결합 - 전통적으로는 한 남자와 한 여자”라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다수에 의해 그렇게 결정되었다고 해서, 결혼이 남자와 남자가 해도 되고 여자와 여자가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이지, 다수의 결정이라도 잘못된 결정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 2:22-25)
분명히 성경은 ‘남자가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말씀하지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룬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막 10:6-9)
예수님도 분명히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시고 둘을 한 몸이 되게 하셨는데, 요즘 사람들은 자꾸만 Adam and Eve도 한 몸이 되고 Adam and Steve도 한 몸이 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제가 지금 이런 설교를 하면 앞으로 잡혀갈지도 모릅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짭니다. 요즘 동성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꽃을 주문했는데 그것을 거부한 크리스천이 망했습니다. 나라가 벌금형을 내려서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설교해야지, 잡혀간다고 못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들도 비록 망했지만 마음이 평안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잘못된 전통들과 잘못된 다수의 결정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 중심으로 해서 그렇습니다. 평소에 자꾸 자기중심적으로 살다보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주장이 더 위에 있게 된 것입니다. 급기야 ‘재해석’ 또는 ‘새로운 신학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고도 위험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3. 오직 하나인 교회
교회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두 가지 차원에서 교회에 대해 말씀합니다. 보편적인 교회와 지역 교회가 그것입니다. ‘보편적인 교회(universal church)’는 지상의 모든 교회를 말하고, ‘지역 교회(local church)’는 지역성을 띠고 특정 지역에 존재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로 보편적이지도 않고 지역적이지도 않은 새로운 형태의 교회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단이라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교회의 형태는 모든 교회의 형태, 즉 보수적인 감독제(감리교), 중도적인 장로제(장로교) 또는 급진적인 회중교회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단이라는 교회의 형태는 신약성경이 말씀하는 지역 교회와는 다르며, 신약의 어디를 찾아보아도 이런 유형의 교회는 없습니다.
비성경적 구조가 강하게 역사하는 곳에 성경적 형태의 교회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지역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듯, 교회도 하나입니다. 교회가 두 개, 세 개, 다섯 개, 열 개, 백 개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출 3:13-15, 새)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모세야, 너는 온갖 잡신들을 섬기는 애굽에서 자랐다. 거기서는 그 잡신들 하나하나를 부를 이름이 필요했다. 그러나 참 신은 나 하나뿐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그래서 주님의 이름이 뭐라는 말씀입니까?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모세야, 신이 여럿이라면 이름들이 꼭 있어야 하지만, 내게는 이름이 없다. 나는 나다(I am who I am). 나는 유일한 신이기 때문에 이름이 필요 없다.”
“그러나 애굽에 가서 사람들이 물어보면 무엇이라고 해야 합니까?”
“너는 그저 내가 너를 보냈다고 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나다.”
정말 하나님께 무슨 이름이 필요합니까? 그분은 유일하시니까 이름이 필요 없으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서로 이렇게 말할 때가 많습니다.
“어느 교회에 다니십니까?” “교회(The Church)에 다닙니다.”
“그러니까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고요?”
“교회라니까요!”
“장난하지 말고 좀 제대로 말해보십시오. 정말로 어느 교회에 다니십니까?”
“저는 교회에 다닙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입니다. 신약 성경 어디를 보아도 교회에 이름을 붙이려고 한 흔적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오직 단 하나의 교회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은 세계를 하나로 묶어 다스리면서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합니다. 그 정신은 사실 맞습니다. 교회는 하나이지 여러 개가 아닙니다.
콜럼버스에 교회가 몇 개입니까? 잘 모르지만, 예를 들어 약 500개라고 쳐보십시오. 그렇다면 콜럼버스에 교회가 500개라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콜럼버스의 한 교회가 모두 31만 4천 개의 조각으로 흩어져 있을 뿐입니다. 각 지역에는 오직 한 교회만이 존재합니다. 이제는 이 여러 개의 조각들은 다시 짜 맞출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 한인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지역에 약 15개의 한인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 말도 ‘하나의 한국 교회가 15개의 조각으로 흩어져 있다’고 바꿔야 합니다. 교회는 모두 하나입니다. 자기 교회만 중요시하는 개교회주의가 그래서 잘못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교회만 중시하면 안 되고 다른 한인 교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한국 교회만 아니라 다른 미국 교회들과 타인종 교회들의 소식에 대해서도 더 민감하게 신경을 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만 예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잘하면 하늘에서 우리 교회만을 보시면서 “야, 여기는 참 아름답구나. 저 멋진 예배당과 저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이 땅을 내려다 보시면서 울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마 23:37-38)
주님은 이 도시의 여러 교회 목사들을 모두 그분이 머리이신 한 교회의 부목사로 보십니다. 목회자들이 부목사들이라면 당연히 서로 만나고 교제하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열두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함께 삶을 나누며 사역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 도시의 감독들이며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는 장로들입니다.
요즘은 이 ‘장로’라는 말이 잘못 이해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그렇고 바로 얼마 전에도 그렇고, 이 말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장로님들이 결정내린 대로 나아간다니 아주 중요하군요.”
“그럼요. 괜히 우리 교회가 ‘장로교회’인 게 아니에요.”
어떤 교회의 당회에서 담임목사와 장로들 간에 의견 차이가 생겼을 때, 몇몇 교인들도 목사에게 가서 따졌다고 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장로교회인데 목사님은 왜 장로님들 의견을 안 따르세요?” 이해는 갑니다만, 그렇게 말한 분들은 ‘장로교회’라고 할 때의 ‘장로’가 뭔지를 전혀 모르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는 요즘의 장로(elder) 직분이 아니라 presbyter입니다. 여기에는 장로와 목사가 다 해당됩니다. 그래서 요즘 미국장로교에서는 장로를 ‘사역 장로(ruling elder)’라고 부르고, 목사를 ‘교역 장로(teaching elder)’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목사’와 ‘장로’는 신약 성경에서 같은 직분을 가리킵니다. 그러다 시대가 지나면서, 특히 종교개혁 이후에 전임으로 섬기는 목회자와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섬기는 장로로 구분이 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각 교회에 세워진 장로들(영적 지도자들)을 향해 뭐라고 합니까?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1절)
“너희 중 장로들에게”라는 말을 보면 장로인 사람들이 있고 장로가 아닌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사도였지만, 자신을 “함께 장로 된 자”라고 부릅니다. 교회의 장로들과 같은 영적 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 리더로서 어떻게 섬기라고 가르칩니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2-3절)
영적 리더가 그러한 태도로 나아갈 때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4절)
리더들의 사역에 대해 다른 교우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5-6절)
이렇게 목사와 장로는 최선을 다해 사역을 감당하고, 성도들은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며 서로 겸손히 사랑으로 대할 때, 교회가 든든히 서고 주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7절)
이 말씀은 우리가 무조건 염려를 맡기며 기도하면 다 돌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문맥을 봐야 합니다. 영적 리더들이 최선을 다해 교회에서 섬기며 양 떼를 돌보고, 성도들은 리더들에게 순종하며 서로 사랑으로 섬길 때, 바로 그럴 때 염려를 맡기며 기도하면 하나님이 돌보아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장로들의 지도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가 각처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전통이라든지 교단이라든지 직분이라든지 그 어떠한 인간의 제도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것들, 즉 전통과 교단과 직분과 은사와 능력과 경험 등, 모든 것을 다 사용하여 주님의 복음 전파 사역에 최선을 다해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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