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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사무엘상

삼상 21장 10-15절(역경에 대처하는 방법 또 하나) - 안효관

by Preacher 2023.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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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1장 10-15

역경에 대처하는 방법 또 하나

안효관 목사 2020-03-29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미국의 유명한 흑인 지도자요 교육자인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1856-1915)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사진1>

 

그는 노예로 태어나 지독한 가난 때문에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다가, 16세에 학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약 800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웨스트버지니아 햄프턴 사범농업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원서를 넣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학장은 그에게 학교강당 청소를 시켰습니다. 그는 청소를 시켜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하루 종일 열심히 강당청소를 했습니다. 그 넓은 강당을 청소하면서 그는 “주님, 내 꿈(교육자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어 주소서.”라는 기도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런 성실함을 본 학장은 곧 그에게 입학을 허가하게 되었고, 공부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부커 워싱턴은 웨이랜드 신학교(Wayland Seminary)에서 공부한 후에 앨라배마의 터스키기(Tuskegee)에 흑인들을 위한 사범공업학교를 설립하게 되었고, 초대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처음 그 학교는 조그마한 건물 2동 밖에 없었지만, 34년 뒤 그가 죽을 때쯤에 이 학교는 훌륭한 시설을 갖춘 건물 100여 채와 학생 1,500명에 200여명에 이르는 교수가 있는 훌륭한 대학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그 지역의 부자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백인 부인이 워싱턴 박사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흑인이려니 생각하고선 멈춰 세우고서, ‘몇 달러를 줄테니 장작을 패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워싱턴 박사는 특별한 일도 없고 시간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웃으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장작을 패서 벽난로 옆에 차곡차곡 쌓아주었습니다. 일이 끝나고 돌아간 후에 그 집의 하녀가 워싱턴 박사를 알아보고 주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부인은 너무 부끄럽고 당황이 되어 다음날 아침 총장실로 찾아가 백배 사죄했습니다. 그러자 워싱턴 총장은 ‘부인, 괜찮습니다. 저는 가끔 가벼운 육체노동을 좋아합니다. 어디 그 뿐 입니까? 이웃을 위해 돕는다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지요.’라고 말하며 부인을 위로를 했다고 합니다.

 

저 같으면 ‘장작을 패 달라’는 부인에게 화를 냈을 것입니다. ‘나를 뭘로 보고 그런 요구를 하느냐?’고 말입니다. ‘당신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부커 워싱턴 박사는 마음이 넓었습니다. 시간적 여유도 있고, 어려서부터 해왔던 일이라 장작 패는 일 정도는 능숙하게 할 수 있고, 또 그 백인 부인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어쩌면 늘 겸손하게 살았던 부커 워싱턴 박사이었기에 불쾌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기쁘게 그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참된 덕목 가운데 하나가 겸손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무조건 남들 앞에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바르게 인식하고 자신의 자리에 설 줄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 자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의 자리, 내가 서야 할 자리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때로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형편없이 낮은 자리가 될 수도 있고,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하는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그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런 겸손이 바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신앙인에게는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신앙인의 덕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내게 배우라.”(마태복음 11:29)고 말씀하셨고,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겸손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낮은 자리에 오셨기에 우리 주님은 늘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왕이나 대제사장이나 종교지도자들과 친구가 되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가진 자들에게 빼앗기고 있는 자들에게 무시당하는 사람들, 종교적으로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로부터 부정하다고 업신여김 받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무시당하던 이방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반역자로 취급당해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세리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남성들로부터 인권을 인정받지 못한 여성들을 존귀하게 여겨주셨고, 건강한 사람들로부터 부정하고 불결하다고 손가락질 받던 병자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을 그들을 만지시며 고쳐주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인간들에게 조롱을 받으시며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분명 주님에게는 그 길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체포하러 온 군병들을 물리칠 힘도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권력의 중심지에 오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고, 겸손히 고난을 당하시며 채찍에 맞으셨고, 결국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벨립보서 2:5-1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겸손하신 주님의 결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 겸손하신 우리 주님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여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고,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겸손하게 사신 주님,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높여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베드로전서 5:5-6)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야고보서 4:10)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런 사람을 높여주십니다.

 

겸손한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덕목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어떤 어려움과 역경을 만났을 때 그것을 이겨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역경을 이겨내는 방법 한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역경을 이겨내는 방법은 생각의 유연성을 갖는 것이고, 생각의 유연을 갖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온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나를 맡길 줄 압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어려움을 만났을 때 두려움으로 인해 사고가 경직되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이성적 성찰을 하지 못하는 것과는 달리, 이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는 확신과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내게 주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며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에 여유를 갖게 됩니다. 그러면 그 역경을 이겨나갈 방법이 보입니다. 그 어려운 상황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믿음을 통해 생각의 유연성을 가지면 그것을 헤쳐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머물자니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 왕이 두려웠던 다윗은 블레셋으로 피신합니다. 물론 블레셋 땅도 다윗에게 안전지대는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블레셋과 악연을 가지고 있었던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리는 만무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피신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신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블레셋으로 피신한 다윗에게 다시금 위기가 찾아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알아본 것입니다. 자기들의 영웅 골리앗을 죽인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던 다윗이었습니다. 본문 11절의 기록에 의하면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을 ‘그 땅의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다윗이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었고, 사울은 그 다윗이 자신의 왕위를 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블레셋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처음 다윗이 블레셋 가드로 피신했을 때 가드 왕 아기스는 그가 다윗인 줄 알지 못하고 그를 맞아주었던 모양입니다.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을 받아들이며 아기스의 보호 아래서 다윗이 생활하던 중에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본 것입니다.

 

만일 다윗의 정체가 들통 나면 다윗은 생명이 위태롭게 될 것이 자명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 본 것입니다. 그리곤 아기스 왕에게 당신에게 온 그 사람이 다윗이라고 알려줍니다. 그 사실을 안 다윗은 두려웠습니다. 아직 아기스 왕과의 신뢰관계가 깊어지지 않은 상태인지라 아기스 왕이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가드로 간 지가 오래 되었고, 아기스와의 신뢰관계가 깊었다면 다윗의 마음에 그렇게 큰 두려움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스 왕이 다윗이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고 다윗을 죽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 다윗은 정신이 온전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미친 체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성경원문에는 ‘그들의 손 안에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의 손 안에서’라는 말은 블레셋 가드 사람들이 다윗의 행동을 저지함에도 불구하고 미친 체하는 행동을 계속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미친 체한 행동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대문짝을 그적거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문짝은 성문을 의미합니다. 당시에 성문은 시장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고 중요한 재판이 열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 성문입니다. 다윗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문을 긁거나 손바닥으로 치면서 미치광이의 행동을 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수염에 침을 흘리는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수염은 위엄과 존귀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염에 불결한 침을 흘린다는 것은 여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렇게 스스로 자신의 위엄과 존귀를 포기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수치스러운 일을 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오래 전 어렸을 때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차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을 죽인 후에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조차도 그가 다음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비록 지금은 사울 왕에게 쫓겨 피신하는 몸이 되었지만 왕의 사위입니다. 한 때 사울 왕 아래서 이스라엘의 군대를 관장하는 장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그는 분명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신분이나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의 입장에서 이방인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미친 체한다는 것은 여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미친 체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왜 다윗이 그렇게 행동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명예와 체면을 중시했던 사람들입니다.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자신이 위험에 처하자 명예나 체면을 다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물론 단순하게 생각하면 잡혀 죽지 않고 살려면 그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것처럼 체면이나 명예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던 문화에서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다윗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선택된 사람입니다. 지금 자신이 겪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기 위한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길 원하시는데, 자신의 체면이나 명예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회적인 풍습이 명예나 체면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긴다 하더라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걸 위해서 다윗은 체면을 내려놓고 기꺼이 미친 체해서 훗날을 기약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내 삶의 방향성이 내 삶의 모습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것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 중에서도 그것을 참아낼 수 있는 힘과 지혜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때로는 자신의 체면이 땅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명예가 곤두박질 쳐서 시궁창에 내려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겸손이 중요합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자신이 가장 낮은 자리에까지 내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하늘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천하만국과 온 우주만물로부터 영광과 존귀를 받으셔야 함에도, 그 영광의 자리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치욕적인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기꺼이 낮아지신 것입니다. 겸손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겸손한 자를 높여주신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겸손한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자신의 명예나 체면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기꺼이 낮아지는 삶을 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찌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포기하고 억울해도 참고 겸손하게 산 그 사람을 어찌 높여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겸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길이기도 그렇거니와 우리가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낮아짐으로 내려가는 겸손의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위기나 역경 속에서도 살아남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물이 그렇습니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결코 그런 자연현상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그 자리가 어떤 모양이든 그 모양대로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의 본질이 바뀌는 것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물의 특성 때문에 세상은 물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내 체면이 깎이면 내 존재 자체에 위기를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내 명예가 사라지는 순간 나라는 존재에 의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체면이나 명예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물론 때로 명예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워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어떤 위기를 만났을 때, 역경에 처했을 때에는 더더욱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훗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그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그런 미친 체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의 명예에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지금 비록 도망자의 신세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는 이스라엘 왕의 사위입니다. 한 때는 군대의 최고 장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미친 체했다는 것은 결코 명예스러운 일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다윗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제 목숨 구하기 위해서 그런 추악스러운 짓을 했다는 것에 백성들은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오늘 본문의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당신 그 때 왜 그렇게 행동했느냐?’고 따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윗의 신하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블레셋에 가서 살아남기 위해 명에고 체면이고 다 버린 그런 사람을 어떻게 왕으로 모실 수 있느냐?’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지금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먼 훗날까지 생각합니다. 특별히 명예나 체면이 깎이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늘 겸손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체면이나 명예를 내려놓은 것을 보고서 사람들은 손가락질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그를 향하여 박수를 쳐 줄 것입니다. 참 지혜롭게 행동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겸손이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늘 자신의 자존심만 내세우고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명예나 체면을 앞세우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렇게 행동한다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늘 겸손하게 사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춘다 하더라도 결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게 그의 일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일상이 그를 위기에서부터 건져줍니다.

 

지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사회 모든 분야에서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런 시기에 교회가 이런 역경과 위기를 이겨내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게 낮아지는 것입니다. ‘왜 교회를 박해하려 하느냐?’고, ‘왜 교회를 신천지 이단과 같이 취급하느냐?’고, ‘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강압하느냐?’고 따질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교회가 더욱 겸손해질 때입니다. 코로나19가 오래 지속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피폐해지고 민감해질 때 교회를 향하여 손가락질한다면 교회는 겸손히 더 낮아져야 합니다. 때로는 그런 비난과 조롱까지도 감수하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높여주십니다. 교회가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사회와 싸우려 하고, 비난을 피해보겠다고 국민과 싸운다면 교회는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같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박해하면 박해를 받고, 그럴지라도 묵묵히 믿음의 길을 올곧게 걸어가면 결국 승리합니다. 초대교회 로마 시대에 박해받던 교회가 그랬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이 사는 방식도 다르지 않습니다. 힘들 때일수록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것처럼, 세상 앞에서도 또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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