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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사무엘상

삼상 22장 1-4절(지금 나의 부모은 어디에) - 안효관

by Preacher 2023.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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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2장 1-4

지금 나의 부모은 어디에?

안효관 목사 2020-05-10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E. Marcos, 1917-1989, 사진1) 대통령은 1965년에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E. Marcos)

 

임기 초기에는 정부개혁이나 경제 발전에 힘을 쏟으면서 필리핀을 아시아의 최강국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1969년 재선에 성공한 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장악하면서 그는 독재지의 길을 가게 되었고, 3,200명을 숙청하고 4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필리핀은 10년 동안 나라 부채가 80배 가까이 늘어남으로서 빈민국으로 전락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코스가 21년 동안 통치하면서 해외에 빼돌린 돈만 무려 50억 달러에 이르렀는데, 이는 당시 국가 외채 규모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런 그의 독재는 1985년에 일어난 반정부 저항운동인 피플 파워(People Power) 혁명으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마르코스는 자기 아내 이멜다와 미국의 하와이로 도망을 가면서 겨우 목숨을 건졌고, 하와이 망명 중에 심장병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와이로 망명을 하면서 그의 고향에 살아계신 노모를 모셔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 그는 늙은 노모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살 궁리만 했을 뿐 노모를 버린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şescu, 1918-1989, 사진2)입니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şescu)

 

그는 1967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 원수가 된 후, 북한의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김일성과 친밀하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김일성처럼 자신이 신으로 숭배받기 위해서 김일성의 독재방식을 루마니아에 적용시켰습니다. 차우셰스쿠의 통치는 말 그대로 공포정치였고, 풍족한 농업국가였던 루마니아는 경제가 파탄나 1980년대에는 국가부채가 무려 111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경제파탄을 국민들에게 속이던 그는 결국 루마니아의 민주화 운동으로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1989년 시위대에 쫓기던 그는 자신이 모아놓은 보화들을 챙겨 도망치다가 붙잡혀 군사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총살형을 당하게 됩니다. 차우셰스쿠의 처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생중계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사형을 집행한 군인 세 명은 총 6정에 180발의 총탄을 준비했고, 차우셰스쿠에게 160발의 총탄을 발사하였습니다.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160발의 총탄세례를 받으며 그는 처참하게 죽음을 맞고 말았던 것입니다. 차우셰스쿠가 시위대에 쫓겨 도망칠 때 그 역시 노모를 버려둔 채 자신이 그동안 쌓아놓았던 보화만을 끌어안고 도망쳤고, 결국 붙잡혀 그런 끔찍한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들의 상황을 우리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 살기도 위태로운 때에 다른 누군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해 허겁지겁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서 부모를 모시고 다닌다고 하는 것은 더욱 큰 어려움을 자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이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다윗이 사울 왕의 위협을 피해 도망 다니던 때의 상황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인 이후 다윗의 인기가 날로 높아가자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왕위를 노리는 정적으로 단정해버립니다. 그리고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자신의 정적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갖은 방법을 다 해 자신을 죽이려한 사울을 피해 다윗은 결국 이방 땅으로 피신을 떠나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사무엘상 21:10 이하에서는 다윗이 블레셋의 가드로 도망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다윗이 죽인 골리앗은 블레셋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드 출신입니다. 블레셋 가드에서 골리앗은 영웅 중에 영웅이었습니다. 그가 가는 전쟁은 언제나 승리를 거두었고, 아무도 그 앞에 대적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가드 사람들에게 골리앗은 전쟁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닮고 싶은 영웅이었습니다. 그 영웅이 다윗이라고 하는 어린 목동에게 목숨을 잃게 되었고, 블레셋은 전쟁에서 대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블레셋 사람들에게 다윗은 철천지원수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필 그런 블레셋 가드로 도망을 갑니다. 지금 다윗이 얼마나 긴박한 상황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블레셋의 가드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도망쳐온 사람이 다윗이라는 것을 눈치 채게 되고, 다윗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어 블레셋 가드에서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아둘람 굴이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블레셋 가드)를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다윗이 블레셋 가드에서 떠나 아둘람 굴에 이르렀을 때 그의 부모님과 가족들이 아둘람 굴을 찾아왔습니다. 단순히 도망 다니던 다윗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을 돕기 위해서 찾아온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사울 왕에게 왕권을 대적하는 역적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가문은 역적의 가문과 다름이 없습니다. 비록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되어 있는 사울에게 다윗의 아버지 이새와 그의 집안은 역적의 가문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호시탐탐 사울의 군사들이 이새의 집 주위를 순찰하고, 집안으로 들어와 다윗이 숨어들었는지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는 일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다윗의 식구들이 마음 편안히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아버지 이새를 비롯해서 어머니와 가족들이 다윗이 머물고 있는 아둘람 굴로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본문 2절에 의하면 다윗의 가족들이 아둘람 굴로 내려오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는 ‘환란 당한 자’입니다. ‘환란 당한 자’라는 말은 사울 왕으로부터 정치적으로 핍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사울의 잘못된 정치에 오랫동안 시달려 힘들어 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다윗을 편들고 다윗을 추종한다는 것 때문에 사울 왕에게 고통을 받고 있던 정치인들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에게 찾아온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빚진 자’입니다. ‘빚진 자’라는 말은 사울에게 고금리의 빚을 져서, 그것을 갚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저당잡힌 재산을 몰수당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그들은 사울의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다윗을 찾아온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마음이 원통한 자’입니다. 여기서 ‘원통하다’는 말은 새끼를 잃은 곰이 격분한 것처럼 매우 분노한 상태를 나타낼 때 쓰는 단어입니다. 즉 마음에 분노가 일어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다윗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첫 번째 부류나 두 번째 부류를 포함하여 사울 왕의 통치에 분노와 마음의 고통을 느낀 사람들까지 포함한 말일 것입니다. 그렇게 다윗을 찾아온 사람들이 무려 400명 가량이나 되었습니다. 아둘람 굴은 그리 크지 않는 동굴입니다

 

<사진3 - 아둘람 동굴 앞에서>

 

이 사진에서 제 뒤로 보이는 나무 아래가 아둘람 굴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나무 왼쪽이 굴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나무 오른쪽이 나오는 통로입니다. 그 안에는 많이 들어간다고 해도 100여명 밖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주변에 좀 더 큰 굴이 있고, 거기에는 2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굴도 있다고 합니다만, 지금 다윗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좁은 공간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른 대안을 생각해 내야 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돌아가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 많은 사람들을 그곳에 계속 머물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곳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금새 사울 왕에게 알려져서 사울의 군대가 그리로 몰려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이끌고 가까운 블레셋 땅으로 다시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모압 미스베입니다. ‘미스베’가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곳이 모압 땅임에는 분명합니다. 다윗이 비록 멀지만 모압 땅으로 간 이유가 있습니다. 모압은 다윗의 증조모인 룻의 고향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에게 오래된 외갓집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가족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400여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모압으로 간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는 다윗이 모압으로 간 이유를 더 간결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부모를 안전한 곳에 모시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나 다른 가족들, 그리고 자신을 추종하기 위해서 따라왔던 사람들은 젊기 때문에 사울의 추격을 피해 어디든지, 언제까지든지 도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연세가 많은 아버지 이새와 어머니는 젊은이들과 함께 도망자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모압 왕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안전하게 될 때까지 나의 부모가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다윗은 모압 왕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탁하면서 ‘당신들과 함께 있기를 청하나이다.’라고 되어 있지만, 원래 성경의 원문에는 ‘당신들과 함께 떠나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함께 있다.’는 표현이 아니라 ‘함께 떠나 있다’는 표현으로 아버지를 모압 왕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아버지를 맡기고 자신은 부모님에게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디로 이끄시던지 자신은 떠나야 하고, 자신이 떠나 있을 때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당신이 잘 보살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 속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안전하게 될 때에 다시 돌아와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자신이 모셔가겠다는 뜻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4절에 의하면 다윗이 요새에 머물고 있는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압 왕과 함께 있었고,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5절에서 다윗은 선지자 갓의 말을 듣고 유다 땅으로 들어갈 때 부모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우리는 이런 다윗의 모습에서 다윗이 얼마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했는지를 잘 알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는 국민들에게 쫓겨 미국으로 망명갈 때 고향의 노모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 역시 시위대에 쫓겨 도망칠 때 자신이 모은 보화는 끌어안고 가면서도 늙은 노모는 버려두고 도망치다가 결국 비참하게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부모와 가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모님을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서 아둘람에서 모압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서 모압 왕에게 아버지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은 이새의 8번째 아들입니다. 막내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아버지 이새와 어머니는 연세가 아주 높았을 것입니다.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장 마음 편하게 거하실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다윗은 분명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모압으로 가기로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버지와 어머니만 아니라면 그렇게 먼 곳까지 굳지 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든 아버지와 어머니를 마음 편한 곳으로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 모압까지 간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그렇게 효성스런 아들이 되었을까요? 다윗이 마르코스나 차우셰스쿠와 달리 그렇게 부모님을 끝까지 모시고 책임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은 하나님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하나님을 너무너무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모님께 그렇게 효도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십시까? 다윗이 하나님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사모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차기 왕으로 세울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사무엘상 16:7)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증언합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사도행전 13:22) 다윗을 만나셨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셨는지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다윗처럼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키 크고 잘 생긴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다윗의 형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뭔가 큰 업적을 남긴 사람,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다윗보다도 솔로몬을 더 사랑하셔야 했습니다. 솔로몬은 다윗보다 지혜롭고 똑똑했을 뿐만 아니라, 솔로몬 시대에는 뛰어난 건축기술로 어마어마한 건축물들이 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추앙받는 사람을 사랑하실까요? 만일 그렇다면 역사상 다윗보다 더 뛰어난 영웅들을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는 것이 속상해 울었다는 알렉산더 대왕이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징기즈칸을 더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역사상, 그리고 인류 역사상 다윗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다윗이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근간이 되는 말씀이 율법이고,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그 십계명 가운데 다섯 번째 계명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계명들을 너무나도 사랑했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편 19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편 19:7-10)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순금보다 더 사모했고,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순종했기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 또한 사모하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효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효도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을 갖고 사는 사람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한다는 이유로 부모님을 외면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부모님께 드려서 공경해야 할 것으로 고르반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그것으로 됐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섬긴다는 명목으로 부모를 섬기지 않고 부모님을 외면하는 것을 정당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주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기한 것이라고 말입니다.(마가복음 7:9-13) 진정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은 부모님도 잘 섬깁니다. 우리 부모님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사랑이 부모님의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가장 많이 부어 우리에게 그 사랑을 베풀게 하신 분이 부모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았고, 태어나 자라면서 그런 부모님의 사랑으로 양육되어 왔습니다. 그런 부모님의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임을 아는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부모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4월 20일 마음 짠한 뉴스를 접했습니다. 경남 통영의 한 마을에서 빨간색 승용차에 누가 자꾸만 돈을 두고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2월 10일부터 몇 차례에 걸쳐 자신의 빨간차 손잡이에 돈이 꽂혀 있고, 때로는 족발이 들어있는 봉지를 걸어놓기도 했다고 승용차 주인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이 마을 주변의 CCTV를 통해 확인한 결과 86세의 한 치매 할머니가 그렇게 하신 것을 찾아냈습니다. 할머니를 찾아가 이유를 알아본즉, 할머니의 아들이 타는 차가 빨간색 승용차였습니다. ‘공부를 못 시킨 것이 너무 미안해서’ 마을에 빨간색 승용차가 나타나면 그게 자기 아들의 차인 줄 알고, 손잡이에 5만원도 걸어놓고 만 원짜리 몇 장도 걸어놓고 배고프면 먹으라고 족발도 걸어놓은 것입니다. 비록 할머니는 가벼운 치매에 걸리셨지만, 결코 자식사랑을 포기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잊어도 부모는 자녀를 끝까지 기억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의 첫 번째 단계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기억은 치매가 와도 막지 못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부모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부모님의 희생을 기억하고, 부모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부모님 사랑이고 효도입니다. 그것은 내가 여유롭고 넉넉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부모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 내가 너무 힘들다는 것은 핑계일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너무 바쁘다는 것이 핑계일 수 없습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 부모님은 당신의 어디에 계십니까? 당신의 기억 속에 부모님이 계십니까? 당신의 뜨거운 가슴에 부모님의 사랑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 자녀된 성도 여러분,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기억하는 만큼 부모님과 자주 함께 하십시다. 부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며 우리가 자랄 때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늘 꼼꼼히 살피며 채워주신 것처럼, 우리도 지금 부모님의 필요가 무엇인지 실피고 채워드리십시다. 기회가 아직 있을 때에요.

 

그리고 부모님 여러분, 우리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유산을 많이 물려주는 것도 아니고, 공부 많이 시켜주는 것도 아닙니다. 최고의 유산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내 자녀들, 내 손주들도 사랑하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처럼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한 만큼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다른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일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자녀된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부모님을 사랑하고 효도하게 이끄시는 성령님의 이끄심임을 기억하고, 그 이끄심에 순종하십시다. 부모된 여러분,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이 나의 욕망을 위한 사랑이 되지 않도록,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이끌어 주십시오. 그것이 최고로 아름다운 사랑이고,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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