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22장 11-19
두려움을 아십니까?
안효관 목사 2018-01-14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뒤를 이어 일본의 마지막 막부인 도쿠가와 막부를 세웠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열 번째 아들은 도쿠가와 요리노부(德川頼宣, 1602-1671)입니다. 그 요리노부가 지방 고을의 영주로 파견되어있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직 젊은 나이인 요리노부였지만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원인을 알 수 없는 중병에 걸려 병상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 요리노부가 걱정돼 고을의 신하들이 모두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까치가 나타나 울어 대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까치 울음소리를 흉조로 여기기 때문에 자리에 모인 많은 가신들이 혹시 요리노부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회의장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안도라는 신하 한 명이 보다 못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까치는 입으로 웁니까? 아니면 꽁지로 웁니까?” 말도 안 되는 질문이지만, 안도가 워낙 자신 있게 말하는 바람에 신하들은 우물쭈물 하며 “당연히 입으로 울겠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안도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입니까? 까치가 꽁지로 울면 모를까 당연한 입으로 우는 건데, 무슨 걱정을 하는 겁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을 가지고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질책입니다.
그것은 비단 요리노부의 신하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 수없이 많은 것들로 인해서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요즘 하도 무서운 세상에 살다보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담대하고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사람도 두려움에 떨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성공이 어느 순간엔가 무너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젊은이들은 사랑하는 이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까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힘들게 공부해서 직장에 취업을 한 직장인들은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때론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합니다. 그런 두려움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홀로 걷기 시작한 아이는 엄마와 떨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늘 안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분리불안이라고 하는데, 엄마가 자신의 눈에서 사라진 순간 아이는 영원히 자기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울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크면 아이들 스스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행동을 연결시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잘못이 아닌 누구가 때문에 자신이 이런 일을 겪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인식을 가지게 되면 아이들은 부모나 다른 사람과 갈등을 겪게 되는데, 그 갈등 때문에 자신이 엄마로부터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4-5세가 되면 자신의 몸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는데, 자신이 다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물에 빠져 죽지 않을까? 무언가에 찔려 고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들로 인해 두려움을 느낍니다. 6살이 넘어서면 상상력에 의한 두려움에 빠집니다. 괴물이 나를 잡아먹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혹 내가 나쁜 일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도깨비가 와서 나를 데려가지 않을까 하는 그런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두려움을 인식하고 두려움을 느끼며 사는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성장한 어른들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두려움이라는 무서운 괴물의 손아귀에서 자란 우리 인간은 늘 두려움을 느끼며 삽니다. 때로는 정체도 없는 것으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끊임없이 우리의 뒤를 뒤쫓아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결혼한 남자들이 가장 두려움을 느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아내가 ‘우리 이야기 좀 해!’라고 말할 때라고 합니다.
그렇게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이겨내며 삽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46:1-3)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땅이 변한다는 것은 잘 정돈된 상태에서 엉망인 상태로 변했다는 것이고, 산이 흔들려 바다에 빠졌다는 것은 안정적이고 견고하던 것들이 모두 파괴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 삶의 주변이 모두 엉망진창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 삶이 뒤흔들려 온통 엉망이 되어버렸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이 우리 앞에 닥치면 우리의 마음이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왜 우리라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인간입니다. 감정을 갖고 사는 존재이기에 두려운 순간이 오면 두려움을 느끼고, 공포가 우리를 엄습할 때면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닥친 현실을 내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향해 서 계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무서운 세력 앞에서도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 가운데서도 용기를 낼 수 있고,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어가는 상황에서도 주님 품에 안긴 것 같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두려운 순간에도 주님을 의지함으로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지만, 우리가 두려움을 느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단 하나의 경우에만은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두려움에 빠뜨리는 상황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그 두려움을 이기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이사야 8:13) 성경은 우리가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오직 한 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자로, 하나님만을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고 말입니다.
신명기 14:23절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두려움으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나태해지면, 아니 우리의 신앙이 병들어가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 왕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처음 왕이 되었을 때에는 아주 겸손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서 달라졌습니다. 왕이 될 때 가졌던 그 마음과 신앙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백성들을 더 의식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후 처음 치른 전쟁이 블레셋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 전쟁에서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가 늦게 온다는 이유로 자신이 직접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데, 율법에 번제는 반드시 제사장을 통해서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제사장이 아니라 왕의 권위를 가지고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아말렉과의 전쟁 때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과 전쟁하러 가는 사울 왕에게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기름진 것과 어린 양의 모든 좋은 것은 남기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만 진멸했습니다.(사무엘상 15:9) 성경은 그렇게 한 사울의 태도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좋은 것들 진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즐겨하지 않았다는 말은 의도적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고선 사무엘 선지자가 오니까 ‘내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다 행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가 ‘왜 좋은 것은 남겨두고 하찮은 것만 죽였느냐?’고 묻자 사울 왕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려 했지만 백성들이 좋은 것은 살려 와서 하나님께 제사하자고 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백성들을 핑계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백성들의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사무엘의 책망을 들은 후에는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정하면서도 ‘백성들 앞에 자신을 높여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사울 왕은 여전히 백성들의 시선을 의식했습니다. 백성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바람에 결국 하나님의 시선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을 떠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늘 마음에 하나님을 의식하며 삽니다. 그런데 믿음을 떠난 사람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눈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세상만 보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늘 세상이 두렵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것이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경건주의 신학자 벵겔(Johann Albrecht Bengel, 1687-1752)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이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이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늘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울에게 두려운 존재가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인 이후, 사울의 마음에는 늘 다윗이 두려웠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울은 왕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저 평범한 목동입니다. 왕인 사울에게는 엄청난 권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목동인 다윗에게는 그런 권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다윗이 두려웠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려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사울의 가족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다윗이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의 대상인 다윗을 제거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사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한 사울을 피해서 도망가던 도중에 ‘놉’이라는 마을에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그 놉이라는 고을에 성막이 있었고, 성막을 섬기기 위해서 많은 제사장들이 그 고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 고을에 나타나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말입니다. 당시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이고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지만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가자 다윗을 자신의 사위로 삼고 군대장관의 직책을 주었습니다. 다윗에게 군대장관이라는 높은 자리를 준 것은 다윗을 전쟁터로 내보내 전쟁터에서 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군대장관이라는 높은 자리를 주기 위해서는 뭔가 그 직책을 줄 사유가 있어야 합니다. 시골뜨기 목동에게 군대장관의 자리를 주는 것이 타당하지 않기에, 그를 사위로 삼은 후에 군대장관의 자리를 준 것입니다. 결국 사울 왕이 다윗을 사위로 삼고 군대장관의 직책을 준 것은 다윗을 신임해서가 아니라 다윗을 죽이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
왕의 사위이자 군대장관인 다윗이 도움을 요청하니까 제사장 아히멜렉은 주저하지 않고 다윗에게 먹을 것을 줍니다. 그리고 다윗의 요청에 따라 골리앗으로부터 빼앗았던 칼을 다윗에게 줍니다. 며칠 후에 사울이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놉이라는 고을에서 성막을 섬기는 아히멜렉을 비록한 제사장들을 모두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심문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왜 다윗을 도와주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히멜렉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아히멜렉의 대답이 나옵니다. ‘내가 다윗을 도와준 것이 당연한 일 아니냐?’고 말입니다. ‘다윗은 왕의 충신일 뿐만 아니라 왕의 사위이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이기에 도와 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당연한 말이고 맞는 말이지만, 그 말을 들은 사울 왕은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좌우에 서 있던 호위병들에게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신하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제사장을 죽이라고 한 사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17절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왕의 명령을 어기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왕의 신하들은 어느 누구도 왕의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들이 ‘여호와의 제사상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의 신하들이 제사장 죽이기를 싫어한 이유는 여럿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위해서 세우신 사람인데 그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울 왕의 명령이 잘못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죽임당할 만한 어떤 죄를 지었다면 모를까, 지금 제사장들이 한 행동에는 전혀 죄가 없습니다. 오직 사울 왕의 분노와 독단에 의해서 제사장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자신들의 계약적인 관계를 제사를 통해서 연결시켜주고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제사장이 있어야만 자신들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자신들과의 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이기에 그들을 죽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말들을 종합하면 사울 왕의 신하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에 사울 왕의 명령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부하다가는 자신들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울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왕의 명령을 따를 수가 없었고, 제사장들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했다는 이유로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신하들이 그의 명령을 거역할 때 자신이 잘못된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다 사라지고 오직 분노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에돔 사람 도엑에게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이방인 도엑은 사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제사장을 죽입니다. 한 명만 죽인 것이 아니라 제사장 85명을 죽였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놉이라는 성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다 죽였습니다. 심지어 젖먹는 어린아이까지 죽였고, 제사장들이 키우던 짐승들까지 모조리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짓을 하고 만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이라면 그런 끔찍한 일을 자행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제사장 85명과 그의 아내와 자녀들까지, 심지어 젖먹이는 아이들까지 죽일 수 있습니까? 사람이라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두 사람, 사울 왕과 에돔 사람 도엑이 말입니다.
여러분, 경건주의 신학자 벵겔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두려워했을 뿐 만아 아니라, 놉이라는 고을의 제사장이 다윗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도 자신을 배신한 것 아닌가 하는 것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의 싹을 제거하기 위해서 젖먹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무참히 죽이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태복음10:28)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은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환경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두려워합니다. 내가 죄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고 잊혀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내가 세상을 따라가지 못해 도태되거나 왕따 당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내 안에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 사라지고 세상 사람처럼 되어가지 않을까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다윗은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밧세바와의 범죄를 저지른 후에 나단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편 51:11)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그가 하나님 앞에 회개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하나님께 잊혀진 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거두어가심으로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로 살게 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아무리 왕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고 나라가 든든히 서 가기에 아무런 걱정 없이 남의 생애를 살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잊혀진 자가 되면 그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가심으로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가 된다면 성공하고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네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고 삶이 힘들다는 것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고,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잊혀진 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뿐입니다.
누군가가 쓴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남보다 부유하다고 생각될 때 저는 두렵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남보다 높다고 생각될 때 저는 두렵습니다. 주님께서는 낮은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남보다 지혜롭다고 생각될 때 저는 두렵습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남보다 선하다고 생각될 때 저는 두렵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은 세상의 권력자가 아니라 세상을 만드시고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정말 두려워해야 한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잊혀진 존재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 삶에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 닥쳐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사십시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으로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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