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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사무엘상

삼상 21장 10-15절(역경에 대처하는 방법 하나) - 안효관

by Preacher 2023.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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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1장 10-15

역경에 대처하는 방법 하나

안효관 목사 2020-03-22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여러분, 이번 한 주도 평안하셨습니까? 요즘은 ‘평안하느냐’고 묻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대적 상황입니다. 모두가 힘든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은 학생대로 그들이 있어야 할 학교에 가지 못해서 힘들고, 학생을 학교에 보내고 일상의 삶을 살아야 할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학교에 가지 않음으로 직장을 쉬어야 하기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외부활동이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장사하는 사람들이나 소상공인들은 월세나 대출금을 갚지 못해 파산을 걱정해야 하고, 출하를 앞둔 농작물들은 갈 곳을 잃어 갈아엎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농부들 또한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어르신들은 경로당이나 마을회관까지 폐쇄되고 집에만 붙어 있어야 하기에 답답하기 그지없고, 마음껏 뛰어놓아야 할 아이들조차 놀이터에 나오지 못하고 갑갑하게 갇혀 있어야 합니다.

 

어렵기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일제강점기나 6.25전쟁 때를 제외하고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고 교우들의 건강과 국가적인 재난이 하루 속히 종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각 가정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당을 폐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당에서의 모임을 잠시 접고 각 가정에서 흩어져 예배를 드리는 ‘디아스포라 예배’라고 정의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예배는 전에는 결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방법이고, 급작스럽게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다급하게 도입된 예배방식입니다. 그로 인해서 교회당에서 반갑게 교우들을 만나 한 주 동안 살아왔던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위로하고 위로 받으며, 받은 은혜를 나누면서 교제했던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다른 어느 단체나 집단보다도 성도들 사이의 친밀한 교제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교육과 섬김도 교회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교회의 본질적인 역할이 일시중지되었습니다. 언젠가 이런 위기상황이 해소되고 다시금 교회당에 모일 때에 예전과 같은 친밀감과 예배에 대한 열정, 그리고 섬김과 신앙교육의 연속성이 되살아날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현실적으로 작은 교회들, 그리고 남의 건물에 세들어 있는 교회들은 교회 운영이나 월세를 내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소상공인들이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교회들도 그대로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몇몇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에게 집단 감염이 확산되고 있어,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교회가 신천지와 다를 바가 뭐 있느냐?’는 이야기들을 들을 때에는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는 지금 역경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배를 드리지 못함에서 오는 역경만은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이 상황이 예배의 장소를 우리의 가정으로 옮겨가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배당 중심의 신앙에서 가정과 삶 중심의 신앙으로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한 것입니다. 교회교육에만 아이들의 신앙교육을 위임하고서 자녀들의 영적 성장에는 손을 놓았던 부모님들에게는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가졌던 목회자 중심의 신앙에서 자기주도적인 신앙으로 성숙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주일이면 너무나도 분주했던, 그래서 마르다처럼 주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분주하게만 지냈던 우리의 삶에서 조금은 더 삶의 여유와 생각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는 것이 지금 한국교회에 위기가 아니라, 더욱 본질적인 위기를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다움의 본질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중세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상실했을 때 종교개혁을 외치는 목소리로 인해서 큰 변혁을 겪어야 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또 하나의 종교개혁을 위한 몸부림을 느껴야 합니다.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역경지수’(AQ-Adversity Quotient)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역경지수라는 것은 어떤 역경과 고난을 당했을 때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어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말은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폴 스톨츠(Paul G. Stoltz, 1960-) 박사가 만든 용어입니다. 아무리 지능지수(IQ)나 감성지수(EQ)가 높다고 해도 자신 앞에 놓여있는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사람은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스톨츠는 인간이 역경을 만나면 보통 세 가지 태도 가운데 하나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퀴터’(quitter)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이겨보려고 노력하지 않고 겁쟁이처럼 비관하고 움츠리면서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두 번째 유형은 안주하는 형입니다. 이런 사람을 ‘캠퍼’(camper)라고 말합니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 캠프를 치고 그 어려움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역경과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클라이머’(climber)라고 말합니다. 자신 앞에 높은 산이 가로막혀 있다 할지라고 그 산을 올라 정복하는 것처럼, 역경과 싸워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역경지수라는 것이 실패를 거듭할수록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실패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고 또 도전할 때 역경지수가 높아집니다. 다시 말하면 실패를 많이 겪어 본 사람이 역경을 이겨내는 능력이 발달하여 그만큼 성공할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입니다.

 

높은 역경지수를 가지고 성공한 대표적인 사람이 ‘KFC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홀랜드 샌더스(Harland D. Sanders, 1890-1980)입니다.

 

<사진1>

 

그는 40세에 육군에서 전역하고 작은 식당을 운영했지만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손님이 줄었고, 식당에 화재가 나면서 65세에 결국 폐업을 해야 했습니다. 무일푼이 된 샌더스는 다시 사업을 하기로 결심한 후 낡은 트럭으로 미국 전역을 떠돌며 자신의 요리 비법을 팔려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무려 1008번이나 거절을 당했지만 1009번째 시도에서 계약을 맺는데 성공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KFC라는 글로벌 프랜차이즈 업체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난 2011년 4월 1일 경북 상주의 한 숙박업소에서 서울대 졸업생이 목을 매 자살을 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해서 동아리 회장을 맡을 정도로 활달한 성격을 가진 그녀였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에 실패하면서 우울증을 겪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녀는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죄송하다.’ ‘이런 내 모습에 적응이 안 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고 합니다. 서울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졸업한 지 몇 달도 되지 않아 취업에 실패했다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녀에게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어쩌면 우리 사회에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온통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역경을 겪어내지 않고서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가라 하신 곳으로 무작정 떠나야 했던 아브라함도 그렇거니와,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온갖 고생을 다 겪다 결국 국무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른 요셉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 역시 역경을 이겨내는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은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무찌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굉장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사울보다도 더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그런 다윗이 자신의 왕좌를 노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다윗을 제거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 쏟았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마치 사울은 나라의 정사를 살피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정적이라고 생각한 다윗을 제거하려는 데에만 총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다윗을 불러 자신 앞에서 수금을 타게 하고는 수금을 타는 다윗을 향해 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다윗 죽이기에 실패한 사울이 작전을 바꿔 다윗을 자신의 사위로 삼았습니다. 사위를 삼는 조건을 이렇게 내걸었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포피 100개를 가져오면.’ 이것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의 영웅 골리앗을 죽인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블레셋 땅으로 갔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죽게 하려는 계략이었습니다.(사무엘상 18:25)

 

그런데도 다윗은 블레셋 사람 200명을 죽이고 그 포피를 가져와서 사울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사위가 되었다고 해서 사울이 다윗 죽이기를 멈춘 것이 아닙니다. 사위가 되었음에도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선포합니다.(사무엘상 19:1) 그러자 왕자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 왕에게 다윗을 죽일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는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구한 사람인데 왜 그를 죽이려 하느냐고 조언을 하자,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합니다.(사무엘상 19:6)

 

그럴 즈음에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다윗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블레셋을 무찌릅니다. 그러자 사울은 덜컥 겁이 났습니다. 골리앗을 죽일 때에는 어린 꼬마가 개인적으로 가서 골리앗을 죽였지만, 이제는 군대의 장수로서 전쟁에 승리하자 통솔력과 지도력까지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 다윗이 자신의 왕좌를 노린다면 온 백성이 다윗을 따를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결국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그 때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20:3절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신뢰해 준 왕자 요나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나와 죽음 사이가 한 걸음 뿐’이라는 말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큰 위기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블레셋으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블레셋이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에게는 철천지원수와 같은 곳입니다. 더구나 다윗에게는 더없이 위험한 곳입니다. 블레셋의 영웅 골리앗을 죽인 사람이 다윗입니다. 사울 왕의 사위가 되겠다고 블레셋 사람 200명을 죽인 사람도 다윗입니다.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장수로 참전하여 블레셋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긴 사람도 다윗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이 블레셋으로 피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구걸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다윗이 블레셋으로 피신을 가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가장 큰 이유는 오늘 본문 10절이 나타난 것처럼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만일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을 갔다는 것을 사울이 안다면 사울은 더 이상 다윗을 추격하거나 죽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군사력에서 블레셋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골리앗을 앞세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오를 벌이고 전쟁터에 나서긴 했지만 어느 누구도 나가서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거구인 골리앗이 두려웠을 뿐만 아니라 블레셋의 군사력은 이스라엘 백성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은 일찍이 철기 문화를 받아들여 군대무기인 칼과 창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반면 이스라엘은 철기문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었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사무엘상 13:19) 불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철기문화를 전해주지 않고 자기들이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 초기에 이스라엘 군대 중에서 철로 만든 칼이나 창을 가진 사람은 왕인 사울과 왕자인 요나단 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사무엘상 13:22) 그만큼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비교하면 전쟁무기가 열악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이 자주 이스라엘을 침공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이 블레셋으로 도망을 가면,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의 피신을 허락하면 사울로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걸 잘 알기에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도망을 친 것입니다.

 

평소에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가 원수와 같은 관계였습니다. 특별히 조국 이스라엘을 사랑한 다윗에게는 자기 민족을 위협하는 블레셋이 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들을 보면 블레셋이 자신을 미워할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신이 당한 위기의 때에 블레셋으로 도망을 갑니다.

 

우리는 이런 다윗의 모습에서 위기와 역경을 이겨내는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역경지수가 높을수록 그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생각의 유연성입니다. 옹고집과 같은 사고를 버리고 생각을 유연하게 갖는 것이 역경을 이겨내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 블레셋이 자신의 민족과 철천지원수와 같은 존재이고, 자신에게도 위험하기 그지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처럼 어쩌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블레셋으로 몸을 피합니다.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위기나 역경을 만났을 때 우리의 생각을 좀 더 유연하게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위기를 만나면 생각의 근육이 위축되면서 크게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합리적인 시각을 갖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신의 피신처로 블레셋을 생각해냈고, 블레셋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다윗은 그런 위기와 역경의 순간에 어떻게 블레셋으로 갈 생각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에게 그곳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어쩌면 생명의 위기를 겪을 수도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블레셋으로 피신을 갔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에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그런 다윗의 믿음을 그가 지은 시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시편 56편은 오늘 본문을 배경으로 지은 시입니다. 블레셋으로 피신했음에도 그는 자신의 신분이 들통 났을 뿐만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히게 될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그 때 다윗의 마음에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서는 사울 왕에게 잡혀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블레셋 가드에서는 아기스 왕에게 잡혀 블레셋 사람들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이 다윗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56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편 56:3) 그러면서 시편 56편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구절이 “내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라는 말입니다. 그 말이 5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분명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블레셋 땅으로 피신을 갔고, 거기에서 자신의 신분이 들통 나자 가드 왕 아기스를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시편 56:4절에서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환경을 바라보니 사람이 두려웠습니다. 사울 왕도 두려웠고, 아기스 왕도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니 사람은 결코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나니 두려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람이 자신을 결코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체험하며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아무리 힘든 역경의 상황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생각이 유연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역경을 이겨낼 힘이 생겨납니다. 아니 때론 실패하고, 때론 깊은 절망적의 상황에 놓인다 하더라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우리에게는 늘 하늘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사람인지라 분명 두려웠습니다. 사울 왕도 두려웠고, 아기스 왕도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합니다. 두렵게 하는 그 상황이 다윗을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기름을 부어주신 것처럼, 그 약속대로 이스라엘에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가 당한 역경과 고난과 위기를 통과한 후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단련시켜 더욱 큰 사람으로 쓰신 것입니다.

 

분명 오늘 우리의 시기는 역경의 시기, 위기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이 역경과 위기를 잘 극복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더욱 귀하게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말입니다. 그 때까지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겨 나가십시다. 아무리 구석으로 몰린 상황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곳이 우리의 삶의 종착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힘든 상황을 겪게 하심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 선하신 뜻을 깨달을 때까지 믿음으로 참고 기다리십시다. 이번 어려움이 우리의 역경지수를 높여,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는 일꾼으로 준비되는 기회로 삼으십시다. 하나님께서 분명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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