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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사무엘상

삼상 23장 15-18절(스스로 조연이 된 사람) - 안효관

by Preacher 2023.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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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3장 15-18

스스로 조연이 된 사람

안효관 목사 2017-11-26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모든 영화나 드라마에는 주연이 있는가 하면 조연도 있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나 드라마라 하더라도 그 배우 한 사람만 가지고 스토리를 끌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조연이 없으면 좋은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 수 없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입니다. 자본주의화된 우리 사회에서는 일등만을 기억하고 일등만 추구하는 문화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2등이 아니라 1등이 되려고 하고,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 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도 조연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주연인 주인공만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우리의 현실을 풍자하면서 오래전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자조 섞인 탄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태를 반영하듯 공지영 작가를 비롯한 몇몇 유명인들이 글을 모아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에 1등보다 1등 아닌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모두가 1등이 되려고 할 때 2등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훨씬 더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오래 남아 있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주연인 주인공들에게 화려한 조명이 비쳐질 때 그 빛이 비쳐지지 않는 그늘진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조연입니다. 조연에게는 조명(스포트라이트)이 비쳐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조연이 없으면 드라마나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조명이 자신을 향해 비쳐지지 않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묵묵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조연입니다.

 

세상에는 1등보다도 1등이 아닌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처럼, 주연처럼 사람보다 조연으로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세상에서 1등이 아니라고 해서 모두가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내가 세상에서 주연처럼 대우받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이 실패한 인생은 아닙니다. 1등이 아니라고 해서 인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주연으로 살지 못한다고 해서 낙심하고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조연으로 묵묵히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이 세상은 아름답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주연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언제나 주연들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연들만 신앙에서 승리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산 조연이지만, 그 조연들 역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할 때 모세가 주연이었다면 모세를 도왔던 아론과 훌, 그리고 모세의 수종자 여호수아는 조연이었습니다. 모세가 살아있을 때에 조연이었던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는 주연이 되고, 갈렙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연이 됩니다.

 

여호수아처럼 조연으로 살던 사람이 성장하여 주연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영원한 조연으로 끝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또 주연으로 살 수 있음에도 스스로 조연처럼 산 사람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아들입니다. 왕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사울 왕이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으로 지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 차기 주연이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주연의 자리를 기꺼이 다윗에게 양보하고, 스스로 조연의 자리에 내려갑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은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나간 형들에게 아버지의 심부를 갔다가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보고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골리앗과 싸우러 갑니다. 그리고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줍니다. 이 일로 인해서 다윗은 백성들에게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게 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백성들의 환호소리에 사울 왕은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백성들에게 이렇게 인기를 얻은 다윗이 그 다음 노릴 것은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불안과 위기감을 느낀 사울은 그 이후로 다윗 죽이기 프로젝트에 들어갑니다. 다윗이 사울 왕 앞에서 수금을 타고 있을 때 사울이 단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 한 적이 여러 번이나 있었습니다.(사무엘상 18:11, 19:10) 직접 다윗을 죽이려는 계획이 잘 되지 않자 사울은 다윗을 군대의 천부장으로 삼아 전쟁터로 내보내기도 합니다.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다윗이 전쟁터에 나가 적군과 싸우다가 죽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전쟁에 나갈 때마다 승리를 거두고 백성들에게 더욱 인기를 얻게 됩니다.(사무엘상 18:13-16) 두 번째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다윗을 자신의 사위로 삼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사위가 되기 위해서는 홀로 블레셋 사람 백 명을 죽이고 그 증거를 가져와야 한다고 조건을 제시합니다. 블레셋 사람을 죽이러 갔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죽게 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사무엘상 18:25) 그럼에도 다윗은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증거물을 가져와 사울의 사위가 됩니다. 다윗이 자신의 사위가 되었음에도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공개적으로 명령을 내립니다.(사무엘상 19:1) 그러자 요나단은 오히려 아버지에게 다윗을 칭찬합니다. ‘다윗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우리 이스라엘 민족을 큰 위기에서 건지지 않았습니까? 왜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하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여전히 다윗을 죽이려 하고, 그럴 때마다 요나단은 다윗 편에 서서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갈 수 있게 도와줍니다. 늘 다윗을 도와주는 요나단을 보고 답답한 아버지 사울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살아있는 한 너와 네 나라를 든든히 서지 못할 거야! 그러니 당장 사람을 보내 다윗을 끌고와. 너를 위해서라도 그놈을 죽여야 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왕위를 아들 요나단에게 물려주어야 하는데 다윗이 살아 있으면 아들 요나단이 왕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일 뿐 아니라, 설혹 아들 요나단이 왕이 된다 하더라도 다윗의 세력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단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려 한다면 마땅히 다윗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요나단은 자신의 정적과도 같은 다윗을 도와줍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마땅히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입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다윗이 이스라엘의 다음 왕이 될 것을 사울 왕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이 요나단을 제치고 왕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은 왜 다윗을 도와주는 것입니까? 요나단도 사울처럼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압니다. 쉽게 표현하면 자신이 올라야 할 왕의 자리에 다윗이 오를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나단은 다윗을 도와줍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돕는다는 것은 다윗이 왕이 되도록 돕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자신이 올라야 할 왕의 자리를 다윗에게 양보한 것입니다.

 

요나단은 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왜 자신이 올라가야할 왕의 자리를 기꺼이 다윗에게 양보한 것입니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조연은 결코 주연의 자리를 노리지 않습니다. 만약 조연이 주연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조연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입니다. 조연이 주연보다 사람들에게 더 인기를 얻거나, 조연이 주연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면 그 영화나 드라마는 잘못된 것입니다. 조연은 조연이여야 아름답습니다. 조연은 조연으로 끝나야 그 영화나 드라마가 삽니다.

 

요나단은 자신이 조연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드라마를 써 가실 때 다윗을 주연으로 택하셨고 자신은 주연인 다윗을 돕는 조연의 역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주연의 자리를 다윗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조연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조연보다는 주연이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주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우리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께서 써 가시는 역사의 드라마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주연으로 쓰실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며 양의 틈바구니에서 무명으로 지내던 다윗을 주연으로 간택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사울을 이스라엘 왕이라는 주연배우로 쓰시다가 마음에 들지 않자 조연으로 역할을 바꾸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드라마의 작가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누군가는 주연으로, 누군가는 조연으로 쓰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왜 나를 조연으로 쓰시느냐?’고, ‘왜 나를 주연처럼 만들어주지 않으시느냐?’고 항의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대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고 그것에 따라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수요일 저녁 성경공부 시간에 사도행전을 읽어나가면서 오랫 동안 나누었던 말씀 가운데 하나도 그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최초의 공식 이방 선교사가 된 사람은 바나바와 바울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을 때 선교단의 리더는 바나바였습니다. 그런데 구브로라는 섬을 지나면서 선교단의 리더가 바나바에서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바나바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자신이 선교단의 리더인데 자신이 2인자인 조연이 되고, 자신이 데려다가 교육을 시켜 안디옥교회를 섬기게 한 바울이 1인자인 주연이 되었으니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기분 좋은 일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바나바는 선교여행을 마치는 순간까지 자신이 주연의 자리에서 조연의 자리로 역할이 바뀌었다는 것 때문에 불평하거나 속상해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조연의 자리에서 조연의 역할을 충실히 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모든 일을 그렇게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자신이 조연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때 바나바가 기분 나쁘다고 항의하거나, 아니면 더 이상 이 선교단에 함께 할 수 없노라고 선교단에서 뛰쳐나왔다면 제1차 선교여행은 어쩌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가려 하시는 하나님의 드라마에 배우들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드라마에 주연처럼 쓰시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주연 배우는 하나 아니면 둘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조연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 이름조자 언급되지 않고 ‘지나가는 행인1’ ‘행인2’라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주연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조연이 없어도 영화나 드라마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행인1’이나 ‘행인2’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좋은 영화나 좋은 드라마를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만이 해야 할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당신의 드라마를 써 가실 때 우리를 주연으로 쓰시든 아니면 조연으로 쓰시든, 어쩌면 아무도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 행인1이나 행인2로 쓰시든 우리는 하나님의 드라마에 등장배우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조연은 겸손한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역할입니다. 조연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아야 합니다. 조연의 역할은 주연배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주연배우를 돋보이게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 조연은 자신의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체면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묵묵히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만들어 가시는 드라마의 주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하나님의 드라마에 조연이라면 누가 이 드라마에 주연입니까? 우리가 출연하는 이 하나님의 드라마에 주연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주연이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통해서 주연이신 예수님을 돋보이게 해야 하고, 예수님을 세상 속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조연의 역할입니다. 제1차 선교여행의 주연이었던 사도 바울은 그 드라마에서 자신이 주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립보서 1:20-21) 하나님의 드라마에서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주연이시기에 조연으로서 나는 주연이신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으신다면 자신은 조연으로 죽는 역할까지도 기쁘게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조연은 주연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드라마에서 사라질 줄 알아야 합니다. 조연이 주연처럼 영광을 받으려 한다거나 사람들의 이목을 받기 위해서 자신의 역할보다 더 빛내겠다고 고집한다거나, 아니면 사라져야 할 순간에 사라지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살아남으려 한다면 그 드라마는 좋은 결말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죽는 것도 기쁘게 감당하겠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조연이기 때문입니다. 주연이신 주님이 드러나고, 주연이신 주님이 존귀히 여김을 받으신다면 자신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드라마인 역사의 현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 마치고 사라진다 하더라도 서운할 것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조연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드라마처럼 써가신다면 우리는 조연으로서 우리 인생의 드라마에 주연이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역할에 힘을 써야 합니다. 주연이신 예수님께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신다면 내가 멸시를 받아도 좋고, 주연이신 우리 주님이 영광을 얻으신다면 내가 드라마의 조명에서 사라져도 좋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오늘 CBS에서 우리 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CBS는 방송을 통해서 이 땅에 복음을 전하는 방송국입니다. CBS도 하나님의 드라마에 조연입니다. 주연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전함으로 예수님을 드러내는 일을 위해서 일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CBS가 하나님의 드라마에 조연으로 그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지 못하는 조연의 역할을 CBS가 우리를 대신해서 잘 감당해 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할 가장 귀한 사명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조연으로서 주연의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땅 끝은 고사하고 내 옆동네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 일을 CBS가 대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천원에 백반으로 식사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요즘 커피샵에 가서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을 마시려 해도 최소 1500원은 주어야 합니다. 조금 유명한 곳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려고 한다면 3-4천원은 주어야 합니다. 음식점에 가서 공기밥 하나를 추가하는데도 1000원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1000원만 내며 백반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사진1> 광주 대인시장의 ‘해뜨는 식당’에서는 이런 백반이 단돈 천원입니다. 이 천원식당을 주로 이용하는 사람은 대부분 밥값이 부담스러운 독거노인이나 일용직 노동자들이라고 합니다. 이 식당의 주인은 김선자 할머니입니다.<사진2> 할머니는 오래 전부터 천원인 음식 값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어렵고 외롭게 사는 사람들이 부담 없이 와서 밥을 사먹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실 천원이면 재료값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천원을 받는 이유는 공짜로 밥을 주면 와서 먹는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 자존심이 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사가 잘 될수록 적자나 늘어날 수밖에 없지만 이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천원에 한 끼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사진3> 그런데 세상에 밥을 굶고 다니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셨던 마음씨 따뜻한 김선자 할머니는 지난 2015년 3월 18일 대장암 말기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그 식당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지금까지 그 식당은 여전히 천원으로 한 끼 식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할머니의 딸이 어머니의 뒤를 이어 계속 식당을 운영하고 있고, 시장의 주변 상인들을 비롯한 천사의 손길들이 조금씩 도와주기에 힘든 누군가에게 계속 식사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그렇게 자신의 이름조차 드러내지 않고 알려지지 않으면서 거룩한 조연으로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따뜻한 온기가 있고, 살맛나는 감동이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드라마에 조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연인 우리가 어떻게 쓰임받기를 원하실까요? 나를 드러내려 하지 말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조연으로 사십시다. 왕이라는 어마어마한 자리를 다윗에게 내어주고 기꺼이 조연이 되었던 요나단처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역할이 무엇인지 바르게 깨닫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다. 때로는 내 자존심도 내려놓고, 때로는 힘든 일일지라도 기꺼이 감당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십시다. 스스로 기꺼이 조연이 되어서 말입니다. 조연이 조연다울 때 그의 인생은 성공한 것이요, 그의 인생이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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