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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사사기

삿 16장 15-20절(둔감할 때와 민감할 때) - 문기태

by Preacher 2023.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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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16장 15-20

둔감할 때와 민감할 때

문기태 목사 2014.08.31

창원침례교회 http://whttp://www.changwon.or.kr/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18 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을 불러 이르되 삼손이 내게 진심을 알려 주었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하니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덴마크의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 케고르의 글 가운데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한 만담가가 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창한 화술과 위트로 온 청중을 사로 잡으며 극장을 웃음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극장 천장에서부터 불이 붙어 점 점 번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만담가가 가장 먼저 이 불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만담을 중단하고 청중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불이야! 불이야!"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청중들은 더욱 재미있는 듯 손뼉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만담가의 안타까운 구원의 소리는 `만담'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결국은 불은 지붕을 타고 온 극장을 태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청중들은 미처 불길을 피하지 못한 채 불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을 사로잡기 위하여 대중문화는 독특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떠들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현대인들의 눈과 귀를 점령하였고, 결국 현대인들의 마음까지 점령하여 심령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점점 둔감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마저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둔감해져야 할 때 민감하고 민감해야 할 때 둔감한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 나가면 어떻게 하나'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차를 타면 어떻게 하나' '옆집 아이가 우리 아이보다 공부를 잘하여 좋은 학교에 가면 어떻게 하지' 이런 것들에는 아주 민감합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옷은 무엇이지' '요즘 유행하는 노래는 무엇이지' 이런 것에는 둔감해져도 괜찮습니다. 이런 문제에 민감해서는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불행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왜 상처를 잘 받는지 아십니까 둔감해야 하는 일에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별 생각 없이 무심코 한 말인데도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를 무시해서 그렇게 말했을 거야!' '나를 비난하려고 그런 말을 했을 거야!' 그러면서 밤새 잠도 자지 않고 그 말을 묵상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전혀 묵상하지 않으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말, 의미 없이 툭 던진 말은 얼마나 깊이 묵상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온갖 나쁜 상상을 다 하면서 밤을 새며 그 말을 멋대로 분석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그 말을 한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을 다 잊고 쿨쿨 잠을 잘 잡니다. 그렇게 괴로워 하다가 다음날 찾아가서 따지고 싸움을 청합니다. 둔감해야 할 때 민감하면 유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혼자 상처를 받고 괴롭게 삽니다. 사소한 문제를 크게 확대하여 미워하고 원망하다가 좋은 관계가 다 깨지고 좋은 친구들을 모조리 원수로 만들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둔감해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설혹 누가 상처를 주려고 나쁜 의도로 말했어도 좋게 해석하고 넘겨 버리세요. 그렇게 태도를 바꿔야 정신 건강에 유익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죄의 유혹에 민감합니다. 사단은 사람마다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누가 어떤 유혹에 약한지, 누가 어떤 죄를 잘 짓는지 알고 있습니다. 시기, 질투, 폭력, 음행, 탐욕, 거짓, 더러운 말 등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악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이런 유혹에 민감하게 반응하면 우리의 양심은 더러워지고 하나님과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죄의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죄의 유혹에는 철저하게 둔감해져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둔감해도 괜찮은 것들에는 둔감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민감해져야 하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삼손이 등장합니다. 삼손은 나실인 이었습니다. 나실인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입고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구별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나 동물의 시체를 만지지 못하게 정해졌습니다. 머리도 자르지 않고 길게 길렀습니다. 사람들이 나실인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도록 구별된 삶을 살도록 정해졌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힘이 누구보다도 센 장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사 즉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날로 무감각해지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사자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벌들이 그 안에 집을 짓고 꿀을 만들었습니다. 그걸 발견하고 삼손은 손을 내밀어 꿀을 따서 먹습니다. 이방 여인에게로 내려가 아내를 삼습니다. 기생에게 들어가 자기 몸을 더럽힙니다. 결정적으로 들릴라라는 여인에게 나실인의 비밀인 힘의 원천이 머리카락을 길렀기 때문임을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들릴라는 은화 천 백 개를 받고 블레셋 지도자에게 비밀을 넘깁니다. 그래서 자는 동안에 삼손의 머리가 다 깎이고 맙니다. 그러자 이제껏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 삼손을 떠나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주셨던 큰 능력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정작 삼손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떠나신 것도 모르고 하나님이 주신 남다른 힘도 사라졌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둔감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인이 여러 번 있었으나 깨닫지 못하고 계속 멸망 길로 나아가다가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복을 축복과 은혜로 여기며 잘 관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민감하게 여겨야 할 것을 둔감하게 대하다가 다 잃어버렸습니다. 둔감하게 여겨야 할 것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다가 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삼손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죄악 된 것,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것에는 그렇게 민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것에는 무감각하고 둔감하게 반응합니다. 외모에는 좀 둔감해도 괜찮습니다. 연예인들의 가십거리에는 둔감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민감해야 합니다. 여러분 영적인 민감함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이번 휴가를 제주도에서 보냈습니다. 주 초반에는 지방회 목사님 부부와 함께 보내며 섬기고 후반에는 특별히 형님처럼 따르는 목사님 부부와 그리고 머물고 있던 집 주인 부부와 교제하며 보냈습니다. 마지막 날 아침에 제가 예배를 인도하였는데 설교를 듣고는 형님같이 여기는 목사님이 아멘, 아멘 하며 마구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는 저를 끌어 안고는 "문목사, 고마워. 정말 필요한 말씀이야." 하며 또 우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당황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강한 도전이 되었습니다. 나는 언제 누구의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감격하였던 적이 있었는가 저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저 자신이 너무 하나님의 말씀에 둔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이 깨달아지고 몹시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민감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둔감해져 있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억제하다 보니 무감각하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확성기로 귀에다가 크게 말씀하셔도 하나도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보여주셔도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립니다. 감동을 주시고 도전을 주셔도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씀하시고 보여주셔도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물이 메말랐습니다. 감사가 식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름만 그리스도인일 뿐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거의 없습니다. 삼손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잊은 채 쾌락을 쫓으며 살면서 눈도 뽑히고 사슬에 묶여 꼼짝할 수 없는 초라한 존재로 전락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에 민감해야 합니다. 20절에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삼손은 힘이 장사였습니다. 혼자서 수 천명을 상대해도 끄덕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시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심령에 내주해 계심을 믿습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며 감동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은사를 주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엄청난 축복임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임재 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저는 20절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이미 한국 교회를 떠나신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교회를 떠나신 것은 아닐까 그런데 우리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떠나신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떠나신 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떠나신 교회는 그 결과가 비참해지고 불행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교회를 비난합니다. 교회를 욕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도들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하늘을 보고 침을 뱉어보세요. 어디에 떨어져요 자기 얼굴에 떨어집니다.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떠나셨다면 여러분을 떠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찬양을 해도, 기도를 해도, 말씀을 들어도,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응답도 없고, 감동도 없고, 함께 하시는 증거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무서운 일이지 않습니까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아닙니까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나지 않기를 원한다면 임재에 민감해야 합니다. 계실 때 잘해야 합니다. 임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감동에 즉각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내주하시는 예수님과 깊이 교제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삼손은 눈을 뽑히고 놋 줄로 꽁꽁 묶인 채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의 뜻과 상관없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초라한 모습으로 맷돌이나 돌리는 짐승 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감옥에서 임재를 회복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빼앗겼던 시선을 눈을 뽑히우고 하나님께로 돌리게 되었습니다.

 

죄악 된 길로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던 삼손이 놋 줄에 꽁꽁 묶이고는 멈추어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힘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마음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소서, 하나님이여 나를 강하게 하소서,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갚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다시 강력한 힘을 주셨습니다. 다곤 신전을 무너뜨리고 거기 모인 블레셋 사람 수만 명과 함께 죽었습니다.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둔감했을 때 삼손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사명도, 본분도, 눈도, 힘도, 은사도, 영광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시 하나님께 민감해졌을 때 사명감도, 본분도, 기도도, 힘과 은사도 회복되었습니다.

 

여러분, 민감함을 회복하여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감사와 감동이 충만한 예배를 매번 맛보시기 바랍니다. 민감함을 회복하여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바랍니다. 민감함을 회복하여 기도를 하며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감동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민감함을 회복하여 항상 내 안에 계시고 내 앞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며 그분의 친밀함을 맛보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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