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16장 15-21
시험에 무너진 삼손의 비극
이준원 목사 2013.8.7.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1. 나실인 삼손에게 온 시험
어렸을 때 삼손 하면 머리가 길고 힘이 엄청나게 셌던 사람으로 교회에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아무리 영광스러운 인물이라도 시험을 이기지 못하면 비참해진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삼손은 태어날 대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었습니다. 나실인은 주님께 자기를 드리기로 서약하고 구별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나실인으로 부르셨고,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꼭 지켜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포도주와 독한 술을 삼가야 한다. 포도주로 만든 시큼한 술이나 독한 술로 만든 시큼한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포도즙도 마시지 못한다. 날 것이든 마른 것이든, 포도도 먹어서는 안 된다. 그는, 나실 사람으로 헌신하는 그 기간에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어떤 것도, 씨나 껍질조차도 먹어서는 안 된다. 그는, 나실 사람으로 서원하고 헌신하는 그 모든 기간에는, 자기 머리를 삭도로 밀어서는 안 된다. 나 주에게 헌신하는 그 기간이 다 찰 때까지는 거룩한 몸이므로, 머리털이 길게 자라도록 그대로 두어야 한다.” (민 6:3-5, 새)
보통 사람이 나실인으로 서원하면 그 기간 동안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삼손은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되었고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평생 성결하게 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끊임없이 시험을 받으며 거기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시험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을 마귀가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삼손의 경우, 나실인으로서의 서약을 어기고 그의 생활과 인격이 더러워지도록 유혹을 받은 것을 그에게 임한 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과 하라고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라고 부추기고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도록 부추기는 것이 시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고 연약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성령님이 거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셔서 평생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신부로, 성령의 전으로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너뜨리려는 온갖 유혹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시험입니다. 신자를 향한 마귀의 시험은 결코 구원을 취소시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풍성함을 최대한 누리지 못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성령의 성전으로서의 성결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여, 구원은 받았지만 형편없고 복잡하고 불행한 삶을 살게 만들려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마귀의 시험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러한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으면 능력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 시험을 극복하는 능력, 불가능한 일을 이루는 능력, 세계를 복음화 시키는 능력, 이 모든 능력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가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시험합니다.
왜 마귀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시험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질투하고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주일 설교 때 마음의 상처의 치유를 다루는데, 마귀는 상처의 화신입니다. 가장 뒤틀린 내면을 가진 존재가 바로 마귀 사탄입니다. 그래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면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일어나 견디지를 못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닮은 아담과 하와에 대해 질투와 미움이 올라와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것들을 가만히 두면 안 되겠다, 어떻게 해서든 끌어내려야겠다.’라고 하며 인간을 죄에 빠지게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도 그랬습니다. 사탄은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고, 광야로 찾아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시험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삼손을 보고도 마귀는 질투하고 시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삼손은 마귀의 미움을 받을 만큼 탁월한 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삼손은 영웅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히 11:32)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무사히 도착하도록 옆에서 박수치고 격려하고 더 힘을 내라고 응원해주는 많은 거룩한 증인들이 있는데, 그들 중 하나가 삼손입니다. 이처럼 삼손에게 탁월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마귀는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여 시험했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는 잠시도 활동을 쉬는 때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장 미워하는 존재가 바로 마귀입니다. 우리에게는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인정해주시고 머리에 면류관을 씌워주시고 의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성령의 전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당연히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미워합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우리가 그러한 지위를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8-19)
우리가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는 늘 마귀의 질투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귀의 시험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귀의 시험에 우리가 무릎을 꿇게 되면,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도 그것보다 더 비참한 것이 없습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2. 지면 비참해진다
삼손이 마귀의 시험에 걸려 넘어갔을 때 그는 사정없이 삭발을 당했습니다.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잠든 사이에 그의 힘의 상징인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습니다. 머리카락이 잘려져 나가자마자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삼손의 능력은 머리카락에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그게 아닙니다. 머리카락은 상징일 뿐입니다.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0절)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기 때문에 힘이 엄청나게 셌던 것이지 머리가 길어서 힘이 센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머리가 긴 사람이 한둘이었겠습니까? 머리카락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머리카락이 잘려져 나가자마자 그는 힘을 써보겠다고 했지만 어림없었습니다. 이미 힘이 다 빠진 초라한 사람이 된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비참한 일이 일어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21절)
삼손은 두 눈이 다 뽑히고 캄캄한 암흑을 헤매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그가, 이제 어두운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이처럼 시험에 지게 되면 정말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이 시대 크리스천들도 마귀의 시험에 걸려 넘어가면 영적으로 삼손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도 삼손처럼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버리면 영적으로 아무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더러워지고 나중에는 마귀가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면서 비참하게 불의의 도구로 마귀의 종살이나 하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속에 있던 평안과 기쁨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좌절과 혼란이 채우게 됩니다.
이것은 구원의 문제는 아닐지 몰라도, 결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에 이름이 나온 것을 보면, 분명히 삼손은 구원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어지는 선물인데, 우리는 구원의 문제를 뛰어넘어 이 세상을 살 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복된 삶이 되고, 행복해지고,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진정한 풍성함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마귀의 시험에 무릎을 꿇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 비극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그 비극의 실상을 잘 모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잘 모르고, 마귀가 원하는 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는데 정작 어떤 결정을 할 때 보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합니다. 당장의 이익에 따라 결정을 합니다. 신앙으로 선택을 하지 않고, 욕심을 따라 선택을 합니다. 그래서 불행해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행인지도 제대로 깨닫지 못할 만큼 영적으로 완전히 어두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에 가는 날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참 승리의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영화인데 웨슬리 스나입스(Wesley Snipes)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Passenger 57>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악당들이 비행기를 공중에서 납치하여 인질극을 벌이는데 마침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정보요원이 악당들을 물리친다는 내용입니다. 그 영화에서 비행기가 나중에 목적지에 도착을 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탑승객들은 하이재킹을 당한 비행기 안에서 극도의 불안과 초조를 경험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영광을 가지고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힘 있고 멋지게 살다가 들어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날마다 마귀에게 하이재킹 당해서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니고, 심지어 마귀의 하수인 역할까지 하다가 비참하게 만신창이가 되어서 간신히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그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크리스천의 비극은 대부분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가 적은 데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를 지키지 못하는 데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크리스천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다 받은 사람입니다. 안 받은 것이 없습니다. 내 손에 없다고 해서 안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과 지혜를 주시고 우리를 언제나 보호해주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은혜를 가득 부어주셨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엡 1:3)
그런데도 왜 믿는 자들이 기쁨이 없고 자주 혼란에 빠지고 고통스러워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안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넘치도록 이미 주셨습니다. 그런데 시험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지키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왜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합니까? 상처의 치유를 받고 새 힘을 충전 받는 겁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러 올 때 무슨 은혜를 받겠다고, 위로를 받겠다고 오면 또 실패합니다. 그럼 어떻게 와야 합니까? 물론 은혜도 받고 위로도 받고 치유도 받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듣겠다는,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살겠다고 결단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매주 실패하고 오고, 실패하고 오고,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위로와 격려를 받고 치유를 받아도, 세상에 나가서 또 다시 무릎 꿇고 또 다시 굴복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풍성함을 누리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면, 시험에 지지 말아야 합니다. 시험에 이기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갈망과 더불어, 주신 말씀을 붙들고 결단하는 것이 있어야 하며, 실제 삶으로 나아가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함께 격려하며 나아가는 곳이 바로 목장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함께 드리는 예배가 중요하고, 또 함께 모여 위로하고 격려하고 체크해주는 목장이 중요한 것입니다.
3. 삼손의 교만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당할 때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자기는 소망이 없는 것 같다고 하며 시험을 받을 때 쉽게 좌절해 버리는 태도입니다. 싸워 보기도 전에 미리 흰 수건을 흔들며 항복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가 자기 약점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자신감을 잃고 미리 포기하는 것이 바로 마귀가 잘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마귀는 그런 식으로 자기의 정체를 숨기며 슬그머니 일을 진행합니다. 우리 눈에 우리 자신의 초라한 모습만을 확대시켜 보도록 하고, 그 대신 자신의 모습은 못 보도록 합니다.
사탄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들어오는지 알지 못하게 들어옵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공격을 하면서 그 사람이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또한 ‘내가 이래서는 소망이 없어. 예수 믿어도 똑같아. 날마다 이렇게 넘어지는데 믿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하며 자기 자신과 싸우고 넘어지게 만듭니다. 사탄은 크리스천이 다른 사람들과 싸우게 하거나 스스로 자기 자신과 싸우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자기 정체를 살짝 숨기고 기다리며 우리를 노립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 다른 사람 또는 자기 자신과 싸우다가 힘이 빠질 대로 다 빠져서 주저앉아 버리면 바로 그때 와서 잡아먹습니다. 그 수법이 얼마나 간교합니까.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사탄이 시험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시험이 없습니다. 자기편에 있는 사람을 왜 괴롭히겠습니까. 또한 시험은 죄가 많아서 당하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시험은 죄가 없어서 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죄가 많아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거듭나지 못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 특별히 약해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마귀는 그저 크리스천을 보면 괴롭히려고 덤비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험이 올 때 우리는 먼저 적을 알아야 합니다. 적을 알려면 군대 지휘관이 병법을 배우듯, 우리도 병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병법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바로 성경입니다. 창세기 3장부터 요한계시록 21장까지 마귀가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을 잘 읽어보면 마귀의 정체를 알 수 있고 그 수법과 전략도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정체를 파악한 다음에는 마귀를 어떻게 대적할지 연구해야 합니다. 그 연구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나에게는 어떤 종류의 시험이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이용하여 계교를 부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천성적인 약점이 있고 환경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에 대한 욕심이 강한 것은 천성적인 약점입니다. 반면, 돈이 많았다가 갑자기 사업이 어려워져서 가난해졌다면 환경적인 약점이 생긴 겁니다. 약점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약한 부분이 곧 죄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약한 부분을 통해서 들어오는 시험을 용납할 때 그것이 죄가 됩니다.
권투, 유도, 태권도, 레슬링 같은 투기 종목들을 보면, 상대방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점수를 올려서 이기게 됩니다. 어떤 때는 정말 비열하다고 할 정도로 상대방의 약점만 공격합니다. 상대방이 경기 중 발을 다쳤다면 아주 그곳만 집중적으로 공격해서 이기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어떤 운동선수보다 더 비열하고 잔인합니다. 시합은 규칙이라도 있지만, 마귀에게는 규칙이란 게 없고 정정당당함이란 건 더욱 없습니다.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며 파고듭니다. 그리고 거기에 넘어가면 음흉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런 마귀가 계속 공격해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약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유혹받기 쉬운 부분에는 가지 말아야 하고, 그런 것을 안 봐야 합니다. 요셉이 유혹을 받았을 때 거기서 토론을 하며 말리지 않고 그냥 도망갔습니다. 옷을 빼앗기고 누명을 썼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즉시 그 자리에서 도망을 했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바로 그 점에서 약했습니다. 삼손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시험을 한 번 당했을 때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두 번, 세 번 계속 허용했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5-16절)
삼손은 유혹을 무슨 장난감처럼 손에 들고 놀다가 망했습니다. 마치 위험한 폭탄을 발견하고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놀다가 폭발해서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유혹은 장난이 아닙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어떤 장사나 성인군자라도 자기 약점을 통해서 들어오는 유혹을 손에 들고 놀기 시작하면 그대로 당하는 것입니다. 던져 버리든지 피하든지 안 보든지 해야 하는데, 삼손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과신했습니다. 그러한 교만이 그를 무너뜨렸습니다. 삼손은 들릴라라는 기생의 손에 들린 금잔은 보았지만 그 속에 든 독은 못 보았습니다. 들릴라의 미소에는 취할 줄 알았지만, 그 미소 뒤에 숨겨진 독은 못 보았습니다. 그의 교만이 그의 눈을 어둡게 해서, 들릴라의 포근한 무릎에 머리를 기댈 수는 있었지만, 그 침실 벽 뒤에 숨어 있는 적들은 못 보았습니다. 그처럼 삼손은 자신만만하고 교만했기 때문에 자기 약점에 대해 주의하지 않은 결과, 가장 바보 같은 인간이 되어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마귀가 가장 쉽게 해치우고 잡아먹는 사람이 바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기도하는 것을 보면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삼손의 인생을 보면 기도가 없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최후의 순간 겨우 한 번 기도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 온갖 모욕을 다 받은 다음에 분을 이기지 못하여 기둥을 안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8절)
삼손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20년 사사생활 동안 다른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었던 기도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일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삼손은 자기 힘만 의지하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은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게으른 사람을 보면, 자기 자신을 과신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기도가 무엇입니까?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 2:18)
기도란, 시험을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 저를 도와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 힘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는 교만을 나타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삼손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자기 힘만 믿고 나아갔기 때문에, 20년 동안 아슬아슬하게 유지할 수 있었지만, 결국 비참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승리합니다. 나에게 아무리 약한 부분이 있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약한 부분 때문에 시험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한 부분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 게으름과 교만을 통해 마귀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자기 힘을 자랑하다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증인들에 들어가게 된 것은 결국 기도 때문입니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 인하여, 살아 있을 때 자기 힘으로 죽인 자의 수보다 기도하고 죽을 때 죽인 자의 수가 더 많았습니다.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0절)
우리는 마지막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삼손처럼 그렇게 비참하게 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스러운 삶이 있는데, 자기 힘을 의지하다가 시험을 이기지 못해서 비참한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매일 주님과 동행하며 기도로 주님께 의지함으로, 언젠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매일 매순간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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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점검과 기도
- 기도하지 않고 내 힘과 지혜를 의지하는 부분은 없는가?
- 오직 하나님께만 나아가고 하나님만 의지하겠다고 결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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