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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 2장 6-10절(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 - 안효관

by Preacher 2023.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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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2장 6-10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

안효관 목사 2017-07-09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며 멸망당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예언대로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로마군대에 의해서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은 로마의 폭정에 항거하여 주후 66년부터 제1차 유대항쟁을 시작합니다. 항장 초기 이스라엘의 저항에 번번이 당하자 로마의 네로 황제는 당대의 명장인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를 총사령관으로, 그리고 그의 아들인 티투스(Titus)를 부장으로 임명해 유대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합니다. 3개의 정예 군단을 이끌고 온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스라엘 땅 전역을 점령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만 점령하면 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점령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천혜의 요새인 예루살렘 성 안에 5만 여명이 넘는 저항군들로 인해서 예루살렘을 쉽게 점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은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퇴로를 차단하여 아무도 예루살렘 성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보급물자를 차단하여 성 안에 있는 사람을 굶어 죽이려는 작전을 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수 개 월에 걸친 포위작전 때문에 식량이 떨어져가고 물이 부족하여 굶주림과 질병으로 수 천 명이 사망했지만 아무도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저항군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졌습니다. 죽더라도 로마군과 끝까지 싸우자는 강경파와 유대 민족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항복해야 한다는 온건파로 나뉘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온건파 가운데 ‘이런 무력투쟁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굉장한 존경을 받던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라는 랍비입니다. 그는 바리새파로 온건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이 유대전쟁이 결국에는 대학살로 막을 내릴 것이고,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임을 예견하고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이 거절당하게 되었고, 그는 유대민족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로마 군 사령관과 모종의 타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한 꾀를 냅니다. 그것은 자신이 병들어 죽어간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문병을 다녀갔습니다. 그의 병은 점점 깊어져 결국 죽었다는 소문이 성안에 나돌았습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이스라엘의 큰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의 시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는 묘지가 없었기에 그의 시신을 방치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벽 바깥으로 내다가 묘지에 매장키로 한 것입니다.

 

온건파가 항복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성문 출입을 통제하고 있던 강경파도 그의 시신을 성문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의 제자들은 랍비가 든 관을 메고 예루살렘을 나와 베스파시아누스 장군 막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관에서 나온 요하난 벤 자카이는 로마의 총사령관인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당신은 얼마 안 있어 황제에 등극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작은 방이라도 좋습니다. 열 명쯤 되는 랍비가 들어갈 수 있는 교실 하나만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파괴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이 황제가 될 것이라는 랍비의 예언이 너무 충격적인 반면, 그의 요청이 너무 소박한 것이기에 ‘예언대로 된다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을 합니다.

 

실제로 주후 68년에 네로 황제가 죽자 1년에 네 명의 황제가 바뀐 후에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에 오르게 되고,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을 파괴한 티투스 장군은 자기 아버기가 요하난 벤 자카이 랍비와 한 약속만큼은 지켰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새파를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약 26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야브네(얌니아)로 갔고, 거기서 율법을 연구하는 랍비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시바’(yeshiva)입니다. 그곳에서 율법과 구약성경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었고, 지금까지 구약 히브리 성경이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예시바 랍비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지혜로운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율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랍비 학교 하나만 있으면 결코 나라를 잃지 않을 것이고, 유대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멸망당하면서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하더라도 율법을 배우는 랍비학교 하나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와 타협하는 것이 비겁한 일일지라도 나라를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교육은 곧 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교육이 바로 되면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주후 70년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멸망된 이후 거의 1900년이 지난 1948년에 독립됩니다. 나라도 없이 1900여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유대인의 정통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금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육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나라에 흩어져 살든지 성경을 바탕으로 한 자녀 교육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언어를 가지고 성경을 가르치고, 조상들의 이야기와 그 조상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주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 등 이방 우상을 섬기는 것 때문에 온 백성들이 큰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400년 동안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탈출해 나왔고, 그들이 광야생활하는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해결할 수 없는 그 사막에서 매일 만나를 주셨고, 반석을 쳐서라도 그들에게 마실 물을 주셨습니다. 장정만 60만 명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이나 광야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 같은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결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들이 사는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적 같은 역사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역사하셨던 놀라운 경험을 한 장로들이 죽은 후에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출애굽과 광야생활, 그리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와서 그 땅을 점령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기적을 기적을 베푸셨고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죽고 난 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습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해내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을 자기 백성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늘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다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어버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는가?’ 하고 말입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어버렸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의 표현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유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 세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체험했던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와 은혜를 가르치지 않으면 다음 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르쳐야 합니다. 시편 78: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고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시고 그들은 일어난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면 그 자녀들은 자기들의 자녀들에게 가르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자손손 전수되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완고하고 패역한 세대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역사를 경험했던 여호수아와 그 세대의 장로들이 세상을 떠나간 후에 곧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자기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교육 장소는 언제나 가정입니다. 자녀들에게 율법과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장소가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가정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이 되면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집 베란다나 마당 또는 지붕에 초막을 짓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그곳에서 지냅니다. 작고 초라한 초막에 일주일 동안 머문다는 것은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불편을 감수하면서 먼 옛날 출애굽한 선조들이 광야생활하면서 초막에서 지냈던 불편과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아울러 그런 힘들고 고통스러운 광야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줍니다. 그리고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가정과 우리의 삶에 함께 하셨던 은혜에 대해서 나눕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이야기해 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수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가나안에 이제 막 정착해 살면서 처음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하기에 우선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그들에게 더 큰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부족들로 인해서 늘 가슴 졸이며 살아야 하는 삶의 불안도 그 원인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자기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었던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에 나라의 지도자 없다는 불안한 마음이 그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전수해 주는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그 첫 번째는 자녀들 세대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 우리 민족이 왜 하나님 섬겨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또 하나의 결과가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자 그들은 자연스럽게 가나안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되고, 이방 우상을 섬김으로 인해서 그들은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사사기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어버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아닌 거짓된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방 나라의 손에 넘겨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사사 옷니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메소포다미아의 손에 넘겨 8년 동안이나 고통을 당하게 하셨고, 사사 에후 시대에는 모압의 손에 넘겨 18년 동안이나 굶주림에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삼갈의 시대에는 블레셋 사람에게, 드보라 시대에는 가나안 부족에게 넘겨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기드온 시대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손에 념겨져 7년 동안이나 고통을 당해야 했고, 심지어는 나라가 멸망당할 위기에까지 몰리게 됩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들에 침공을 받고 노략질을 당하여 궁핍과 고통 속에 지내야 했습니다. 이런 계속된 고통은 그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긴 대가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는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 시대도 하나님을 잃어버린 시대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그래도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지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발표한 것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가 967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9.7%였습니다. 늘 불교 인구보다 뒤져있던 기독교가 드디어 불교 인구를 추월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인구가 600만 명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9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나자 그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분석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10년 전에 비해서 기독교 인구가 늘었다고 조사는 되었지만 실제로 교회에 출석하는 인구는 많이 줄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청소년이나 어린 아이들의 숫자는 10년 전에 비해서 엄청나게 줄고 있다는 것입니다. 10년 후인 2025년에 다시 한 번 인구주택총조사를 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한 세대가 지나고 나면 우리 기독교 인구가 엄청나게 줄어들게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세대의 신앙인들이 다음 세대에 하나님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야기냐?’고, ‘교회가 이렇게 많고, 성도들의 가정이 이렇게 많은데 왜 하나님을 알려주지 않는다고 하느냐?’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냉정하게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앙교육은 교회에서 시키는 것이라고 모든 신앙교육의 책임을 교회에 전가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영어 단어 하나 외우는 것보다 성경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가정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평소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보내기 위해서 열을 올리면서도 아이들에게 교회에 나가야 한다고 독촉하는 것에는 머뭇거려집니다. 방학이 되면 학원에 보내기 위해서 열을 냅니다. 어느 학원이 좋은 성적을 낸다고 하면 비싼 학원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 학원에 보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하는 성경학교나 수련회에 보낼 때에는 한참을 망설입니다. 그것도 학원 시간을 피해서, 학원에 갈 시간을 제외한 시간에만 수련회에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신앙이 더 중요하다.’고, ‘신앙이 먼저.’라고 말해주어야 할 부모들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학원을 더 중요하게 여겨 학원에 먼저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잘 못 따라가는 과목에는 과외선생님을 붙여서라도 공부하게 하면서, 성경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 성경과외를 시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학교 공부가 신앙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바르게 사는 것보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신앙교육은 교회에 맡겼으니 교회에서 신앙교육을 잘 시켜줄 거야.’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시 물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신앙교육에 만족하십니까? 일주일에 겨우 한 시간 정도 밖에 투자하지 않는 교회교육, 신앙교육이 아이들의 영혼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일주일 내내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교육철학에 물들어 사는 아이들의 사고를 주일에 하는 주일학교에서 단 한 시간 투자한다고 그들의 사고가 신앙적 사고로 바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교육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바쁜 현대에 맞게 구조조정이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요즘 주일학교에서 행하는 여름수련회나 성경학교도 점점 시간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시간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고 말씀을 가르치는 시간은 줄어들고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는 데에 더 많은 시간과 예산이 투자됩니다. 그러고서 아이들이 신앙 안에서 변화되거나 신앙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자라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수련회 기간을 길게 잡으면 아이들이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항변할지 모릅니다. 재미있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오지 않는다고 말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보면 아이들을 신앙으로 양육하고 가르쳐야 할 교사들에게 열정이 사라진 이유는 아닙니까?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이 교사들에게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힘든 프로그램을 하면 아이들이 힘들어해서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힘든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이 힘들어서 교사들이 하고 싶지 않은 것 아닙니까? 성경학교나 수련회를 길게 하면 아이들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기 전에 교사들이 성경학교나 수련회를 위해서 내 시간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더 중요한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까?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보여줄 하나님이 내 안에 남아 있습니까?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이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에 예언처럼 들려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베소 교회에 주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요한계시록 2:4-5)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고 누리는 것이 별로 없어도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했던 그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이라 하더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갔던 그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을 기꺼이 드린다 하더라도 행복했던 그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우리 자녀들을 믿음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큰 무기가 신앙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란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살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의 삶과 말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는 세대가 됩니다. 정말로 우리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크고 놀라우신 일을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아니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 손을 붙잡고 살아가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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