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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여호수아

수 24장 14-18절(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 신만교

by Preacher 2023.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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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24장 14-18

오직 나의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신만교 목사

화평성결교회 [의정부시] http://whttp://www.hpehc.org

 

(24: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수 24: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 하오리니

(수 24: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수 24: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모세를 대신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청년 여호수아가 어느덧 노년이 됐습니다. 오늘의 본문 여호수아 24장은 여호수아서 맨 마지막 장으로 여호수아의 고별사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고별사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신 것과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 살이 하던 애굽에서 출애굽 시키시고 광야에서 40년간 보호하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셨음을 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셨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이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땅에서의 생활을 내다보면서, 기쁨보다는 오히려 염려가 앞섰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에 살게 됐는데 무슨 걱정일까요? 여러분, 가나안 땅은 무인도(無人島)가 아닙니다. 그곳에는 이방민족, 즉 가나안 7족속, 원주민들이 오랫동안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민족이며, 나름대로의 고유한 종교와 문화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에 살게 될 때 이방 종교와 세속 문화에 빠지게 될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방 종교와 세속문화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놓여진 ‘유혹의 덫’과 같습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유혹이 많은 환경에서 여호와 유일신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염려가 됐던 것입니다. 애굽과 같은 세상에 살던 우리도 출애굽해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천국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도 세상 문화와 세속주의의 유혹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염려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결단인가?

 

1.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결단을 촉구합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지 안했습니다. 무조건 하나님만 믿으라고 강제하지 안했습니다. 신앙생활은 강요된 종교적 굴레가 돼서는 안됩니다. 스스로의 결단과 선택이 중요합니다. 인격적이며, 의지적인 결단의 선택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너희의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혹시 여기 있는 우리 어린이 중에, 그리고 청소년들 중에 억지로, 강제적으로 이 자리에 와있는 친구가 있는가? 그런 친구들에게 이제 여러분이 섬길 자를 스스로 택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그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학교의 선택, 배우자의 선택, 직업의 선택, 친구의 선택,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의 선택이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바로 신앙의 선택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우상을 섬길 것인가? 이 선택이야말로 영원한 운명을 가릅니다. 그럼에도 결단하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 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또 앞으로 어떤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건 안됩니다. 신앙에는 회색지대, 즉 중립지대란 없습니다. 그런 분이 있다면 결단해야 합니다.

 

불의 사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왕상 18:21)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찌니라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바알을 섬길 것인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자들은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결단을 배워야 합니다. 저들은 뜻을 정하고 우상 제물이 섞인 왕의 진미를 거부했습니다. 또한 사자굴 속에 던져질지언정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결단했습니다. 풀무불 속에 던져질지언정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결단인가? 이들의 결단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여러분도 이제 결단하십시오. 신앙적인 결단을 하십시오. 믿고 섬길 자를 오늘 택하십시오. 선택과 결단에는 때가 중요합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했습니다. 결단이 매우 긴박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결단해야 합니다. 결단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오늘이 최선의 시기입니다. 오늘이 지나면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과단성 있게 섬길 자를 오늘 분명히 선택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는 결단을 촉구하면서 자신의 결단을 고백했습니다. 뭐라고요?

 

2.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고 결단합니다.

 

(수 24:15)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는 먼저 위대한 결단을 했습니다. 이것은 강요도 아니고 선동이나 위협도 아닙니다.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하여 몸소 체득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솔직한 신앙고백입니다. 전인격적인 결단입니다. 누구의 눈치를 보고 결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입니다. 머뭇거릴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해도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결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호수아는 그의 가족과 함께 결단했습니다. 나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전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결단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가? 오늘 이 시간이 전 가족이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가정 있지요? 얼마나 감사한가?

 

부모의 결단이 중요합니다. 여호수아는 먼저 결단했습니다. 단호하고 엄숙한 결단을 했습니다. 가장(家長)으로서 확고한 결단을 내리면 온 가족이 따라옵니다. 여러분이 확신 있게 예수를 믿으면 온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행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먼저 믿는 우리가 바른 결단을 할 때 다음 세대에 신앙을 전수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결단은 그의 가족의 결단을 이끌었고 그의 가족의 결단은 그 민족의 결단을 이끌었습니다. 내가 결단하면 내 가족이 살고 내 가족이 살면 내 민족이 살 수 있습니다.

 

다행히 여호수아의 확신에 찬 결단은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을 결단하게 해서 바른 길로 인도했습니다. 우리 어린이들도, 학생, 청장년 모두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선택, 위대한 결단은 없습니다.

 

김동길 박사가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당신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잘한 것 많고 자랑할 것도 많지만, 가장 잘한 것 딱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주저 없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선택, 이 결단이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이 결단이 없는 축복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예수를 믿기로 결단을 했으니 진짜 복 받았습니다. (옆에 분에게) “복 받으셨습니다.”

 

분명히 기억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메시야로, 그리스도로, 구원자로 보내주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유대교나 회교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믿는데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는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예수 이름 외에는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만일 이 말씀이 없었다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도덕과 수행과 선행을 통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만 믿으라고 전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 구원은 예수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만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 구원을 받을 가능성은 0.00001%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신이 얼마나 많은가? 일본에만 신이 8백만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집안 구석구석에 무슨 무슨 신을 만들어 놓고 섬깁니다. 사람들마다 수많은 신을 섬기고 각자 신앙과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여러 신들과 종교가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있는가? 못줍니다. 오직 진리는 하나뿐입니다. 예수 이름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진리입니다. 예수만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하십니다.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 하나 뿐인 진리, 그 하나 뿐인 구원의 길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옆 사람에게) “어쩌면 길을 잘 찾으셨어요?” 다른 종교에서는 우리 기독교를 독선적이라고 합니다. 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가? 너무 배타적이고 편협하지 않은가? 남산에 이르는 길이 어찌 한 길뿐인가? 동서남북에 길이 다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길은 많으나 종국적으로 도착 지점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을 종교다원주의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굉장히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그럴듯합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잘못된 생각입니다. 과연 불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석가나 공자나 마호멧이 우리를 죄와 사망과 심판에서 구원 할 수 있는가? 천만에요. 불가능합니다. 왜요? 그들 역시 인간입니다. 보통 인간보다는 훌륭한 성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죄인입니다. 죽음으로 끝난 사람들입니다. 지금 무덤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수 있겠는가?

 

예수 이름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진리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을 걸고 예수 이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적당히 지키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어떤 유혹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순교의 피를 흘림으로 이 진리를 지켰습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기겠노라”고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

 

3. 하나님을 경외하되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겨야 합니다.

 

(수 24:14)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지금까지 광야생활에서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 안하면 단 하루도 살 수가 없었으니까요. 하나님이 공급해주시지 않으면 의식주가 해결이 안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내모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라고요.

 

그런데 이제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 좋은 집에 살고 좋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호의호식하며, 삽니다. 문제는 이때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겠느냐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등 따습고 배부른데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겠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점이 염려가 됐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물질이나 환경에 약합니다. 이게 마귀의 전략가운데 하나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 유혹에 넘어갔고 오늘의 유럽교회가 하나님을 물질문명으로 대체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 신자들도 경제수준이 높아지면서 신앙의 열정이 식어버렸습니다. 어렵게 살 때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전에 여러분이 지금보다 더 열심히 있었습니다. 안 그런가? 그래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말씀하셨습니다(마5:3).

 

요즘 세상에 하나님을 대체하는 우상들이 너무 많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대판 우상들입니다. 이런 것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의지 하는 것, 그게 현대판 우상이요, 또 다른 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과 탐욕이 우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 재미와 쾌락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도 믿고 이런 것들도 좇고 삽니다. 이것을 종교적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마 6:24)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

 

이런 우상에 여러분의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이렇게 우리 마음을 빼앗는 우상들을 제거해야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습니다. 진실함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의 마음을 빼앗기면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고 다른 여자가 있으면 여러분의 배우자를 온전함과 진실하므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여호와를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경외하며 섬겨야 합니다. 여기서 ‘섬긴다’라는 말은 영어에서 ‘serve’, ‘service’를 말합니다. 예배를 가리킵니다.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는 이 말을 ‘일편단심으로 예배하라’고 번역했습니다. 껍데기 예배, 형식적인 예배는 안됩니다. 마음이 나뉘지 말고 한 마음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런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단단히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선언하십시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건성으로 말고요. 형식적으로 아니고요. 입술로만 말고요.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편단심, 주님께만 집중하는 예배를 통하여 그 믿음, 그 결단을 보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혼의 찬양 58장 부릅니다(‘두 손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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