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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스바냐

습 3장 16-17절(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 이삼규

by Preacher 2023.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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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3장 16-17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이삼규 목사 20180715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습 3:16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832년에 한 미군이 블랙 호크(아메리카 인디언 소크족의 추장) 전투로 알려진 인디언 원주민과의 혈전에 참전했습니다. 대위였던 이 청년은 진급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찼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전쟁이 끝날 무렵 이등병으로 강등됐습니다.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대위가 이등병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는 최악의 인디언전 참전용사였습니다. 그러나 장교로서 영락없는 실패자였습니다. 사병으로서도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최 말단 계급으로까지 추락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큰 굴욕감을 느꼈을까요? 전쟁이 끝난 뒤 이 비쩍 마르고 멋쩍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청년은 뭔가 할 일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한 가지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모든 일에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디언전에서의 실패가 링컨 전 인생의 실패는 아니었습니다.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위축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는 성공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진멸의 예고로 시작되었던 스바냐 선지자의 예언이 회복에 대한 약속으로 끝을 맺습니다. 심판이 회복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남은 자를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습 3:14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14절은 ‘노래하라(라난), 외쳐라(루아), 즐거워하라(알라즈), 기뻐하라(사마흐)’라는 명령형 동사들을 연이어 사용하면서 그들 앞에 영광스런 미래가 펼쳐질 것을 예고합니다.

 

시온의 딸이 왜 기뻐 외치며 즐겁게 노래해야 할까요?

 

습 3:15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⓵형벌을 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적으로부터 고난을 받은 것은 그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요, 심판이었습니다.

 

겔 5:8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희 중에 벌을 내리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대한 심판을 거두셨다는 사실은 이미 그들의 죄악이 모두 사하여졌음을 시사 합니다. 남은 자들은 교만한 자들이 아니라 곤고하고 가난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을 떠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될 것이며, 그 결과 남은 자들에게는 더 이상 심판이 없게 될 것입니다.

 

⓶원수를 쫓아내었기 때문입니다.

 

'네 원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사용하신 도구들입니다. 이미 남은 자들은 범죄함과 형벌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심판의 도구인 원수들, 곧 교만한 이방 열국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끝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심판을 위하여 몽둥이로 사용하였던 이방의 군대는 이미 추방당하였습니다.

 

사 10: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사 14:5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통치자의 규를 꺾으셨도다

 

몽둥이라는 것은 징계를 위해서 잠시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징계가 끝남과 동시에 몽둥이의 용도는 쓸모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꺾어버리십니다.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몽둥이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로 이방 나라들이었습니다. 앗수르, 애굽, 바벨론 등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몽둥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나라들이 건재합니까? 용도가 끝났기 때문에 폐기처분 당한 것입니다.

 

⓷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이스라엘의 왕 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모이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시온에 있는 그 보좌에서 왕 노릇하실 것입니다. 여호와는 남은 자들의 왕으로서 보호자가 되십니다. 어떤 나라든지 그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나 대통령이 중요합니다. 백성들이 행복하려면 좋은 왕을 만나야 합니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왕이 나라를 통치한다면 백성들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을 위하는 왕이 나라를 통치한다면 백성들은 평안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고 그들 가운데 계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슥 2: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불로 둘러싼 성곽이 있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성주에 무엇을 배치하였습니까? 사드포대를 배치하였습니다. 그렇게 주민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막았지만 결국에는 사드포대를 배치하였습니다. 그것을 왜 배치하였습니까?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으로 다 막아낼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무용지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무기들을 폐기하도록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 외치며 즐겁게 노래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에 더 이상 악한 일이나 화나 재앙을 두려워해야 할 일이 없게 된 것입니다.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습 3:16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사람이 죽는 장면을 보셨습니까?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손이 아무 힘없이 떨어지고 맙니다. ‘손’(야드)이란 단순히 손으로서 역할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손(야드)’은 ‘힘, 능력, 기운’을 상징합니다. ‘손을 늘어뜨리다.’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은 아니지만, 두려움을 나타내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어 특정한 상황에서 무기력한 사람의 모습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늘어뜨리다’라는 말은 ‘라파’라고 하는데 ‘가라앉다, (해, 달 등이) 떨어지다, 떨어뜨리다, 느슨해지다, 움추리다, 낙심 또는 실망하다'를 의미합니다.

 

대하 15:7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너희의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 하니라

느 6:9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사 13:7 그러므로 모든 손의 힘이 풀리고 각 사람의 마음이 녹을 것이라

겔 7:17 모든 손은 피곤하고 모든 무릎은 물과 같이 약할 것이라

 

오늘 본문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떨쳐내고 손을 늘어뜨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⓵하나님 여호와가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17절).

 

에스겔 8장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죄악의 도시 예루살렘에서 떠나시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타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북쪽을 바라보니 거기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질투의 우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뜰 문에 이르렀는데 본즉 담에 구멍이 있었습니다. 그 담을 헐라고 하셔서 허니 한 문이 나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본즉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들이 섬기는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면에 그려 놓은 것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서있고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 서서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그 향연이 구름같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겔 8:12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가증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렀는데 보니까 거기에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겔 8:15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겔 8:16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

겔 8:17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에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그들이 그 땅을 폭행으로 채우고 또 다시 내 노여움을 일으키며 심지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

겔 8:18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그토록 무서운 심판을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 백성들이 얼마나 가증한 일을 행했는가를 똑똑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떠나셨던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거나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우리 자신들이 기진맥진하거나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될 줄 믿습니다. 두려워말고 당당하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내야 됩니다. 여러분 당당하다는 말은 뻔뻔스럽다는 말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세상에는 뻔뻔스러운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정말 의로운 자들은 고민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는데 이러한 불의한 시대는 뻔뻔스러운 사람들이 당당한 것처럼 자신을 위장하면서 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뻔뻔스러움과 당당하게 사는 삶을 잘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뻔뻔스러운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그 힘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당당하게 살아가야 될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은 육체를 지닌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바로 보배를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뚝이처럼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됩니다.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오늘 하나님께서는 17절에“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심, 하나님의 구원하심, 하나님의 사랑하심, 하나님의 기뻐하심, 그 사실을 여러분들이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는 참 고독하다. 나는 참 외롭다. 나는 참 쓸쓸하다.”이런 말들을 자주 합니다. 우리의 고독과 우리의 외로움과 우리의 쓸쓸함이 어쩌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의 한 부분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로움과 고독함과 쓸쓸함이 어쩌면 사탄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도둑질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현상일수도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진정 고독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진정 그들의 삶이 외롭습니다. 쓸쓸합니다. 그리고 허무합니다. 그들의 삶의 마지막은 절망인 것입니다.

 

여러분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을 썼고 세계적으로 위대한 작가였던 헤밍웨이는 마지막에 자기가 가장 아끼던 엽총을 가지고 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세계적인 활동가로 스페인 내전에도 참전하고 1차 세계 대전 때도 이태리 전선에 참여했던 아주 활동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그 마음속에 일어나는 허무함, 외로움, 고독함, 쓸쓸함을 견디지 못해서 그는 마지막에 엽총으로 자살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서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다.” 자기의 마지막 절망적인 심정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절망감이 그의 마음을 뒤덮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든지 절망하고 낙담하고 주저앉아버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낙담하지만 마지막에는 힘과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추진하다가 절망감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하면서 자포자기 상태에 자기 자신을 내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런 절망감에 빠져있는 루터에게 그의 아내가 까만 소복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면서 “도대체 누가 죽었기에 당신이 소복을 입고 나타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인이 “당신이 믿는 당신의 하나님이 죽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소복을 입고 당신 앞에 나타났다.”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루터가 “어떻게 하나님이 죽을 수 있느냐? 하나님이 어떻게 죽었다는 말이냐?”고 하니까 그 아내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죽지 않았으면 천하의 루터가 이렇게 기진맥진하고 절망감에 빠져서 있을 수 있느냐. 나는 당신 모습을 보니까 하나님이 죽은 줄 알고 이렇게 상복을 입고 나타났다.”고 말했답니다. 그 말을 듣고 루터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을 했습니다. 그때 지어 불렀던 찬송가가 우리가 부르는 384장 '내주는 강한 성이요' 라는 찬송가입니다. 이 유명한 찬송가가 결국 종교 개혁의 주제가가 되었던 것을 봅니다. “1절에 보면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2절에 보면 내 힘만 의지 할 때는 피할 수밖에 없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운다.”하면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종교 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혼자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고독합니까? 쓸쓸합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십니다.

 

⓶하나님의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습 3:19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습 3:20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은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같고 이 세상에서 소외를 당하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참된 왕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높이시기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하십니다.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열린 믿음을 가지고 힘과 용기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낙담하고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로 하여금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도할 때에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기도를 합니다만 성경에 보면 손을 펼쳐들고 눈을 뜨고 하늘을 향해서 기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손을 내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너무나 힘들고 어려우니까 우리의 손이 자꾸만 내려옵니다. 아말렉과 이스라엘이 싸울 때 모세가 두 손을 들고 기도를 할 때는 아말렉을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힘이 빠져서 손이 내려올 때는 이스라엘이 패배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기도의 손을 높이 들고 험난한 이 세상에서 날마다 싸워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탄은 우리에게 끝없이 “네가 발버둥쳐 봐도 별 수 없어. 봐 너 발목에 피만 났잖아. 넌 될 수 없어.” 그러면서 끝없이 우리를 패배 의식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성경에는 다 된다고 하는데 우리의 삶 속에는 끝없이 안 되는 것이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체념 상태에 우리 자신이 빠져드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자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능력 있는 자가 능력 없다고 생각하고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졌는데도 우리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자꾸만 자꾸만 우리 자신들을 율법 아래로 율법의 굴레 속으로 끌고 들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는데 죄의 쇠사슬을 끊어 주셨는데 우리는 자유하지 못하고 다시 죄의 굴레 속으로 우리를 복귀시키고 있는 패배주의 적인 사고방식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게 하고 두 손을 늘어뜨리고 낙망하고 절망하고 낙담하게 하면서 사탄이 조련사처럼 우리를 마음대로 노략질하고 우리의 마음을 도둑질했습니다.

 

여러분 부모들의 그 입술을 통해서 우리의 자녀들을 무력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부모들의 불신앙이 자녀들로 하여금 믿음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입술이 성령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입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불신앙의 입술을 자꾸만 사용하면 나의 자녀들조차도 불신앙의 모습으로 변질되어갑니다. 멀쩡한 아이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꾸 격려하고 위로하고 새로운 용기를 부여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에게도 스스로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우리 자신들이 용기를 가지고 일어설 수 있도록 부정적인 체험을 통한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는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부정적인 자포자기 상태에 빠뜨려서 우리를 조정하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은 바로 이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긍정의 자리에 우리를 억압하는 율법의 굴레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참된 자유의 자리에 인도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중요한 역할인 것입니다. 19절 20절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19절에“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20절에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에게 칭찬 받는 믿음의 존재들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까지 명성을 얻는 그런 자들이 다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위축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두 손을 늘어뜨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과 용기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무안한 힘과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잠잠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잠잠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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