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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시편

시 139편 1-4절(나를 살펴보시고 아시는 주님) - 안효관

by Preacher 2023.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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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39편 1-4

나를 살펴보시고 아시는 주님

안효관 목사 2015-09-13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중국의 우화 가운데 ‘고추 먹은 원숭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길을 가던 원숭이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진 빨간 토마토를 주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토마토가 너무나 맛이 좋았습니다. 조금 더 가다가 이번에는 빨간 사과가 나무에 달려 있는 것을 보고는 사과를 따먹었습니다. 이 사과도 기가 막히게 맛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원숭이는 ‘아, 빨간 것은 모두 맛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참 길을 가다가 보니까 이번에는 고추밭에 고추가 빨갛게 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원숭이는 빨간 것은 모두 맛이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고추밭으로 달려가서 빨간 고추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고추를 입에 넣고 깨물자마자 입 속에 불이 난 것 같았습니다. 너무 매워서 원숭이는 땅에 데굴데굴 뒹굴었습니다. 입 속에서 일어난 불이 얼굴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새빨개졌습니다. 그래도 매워서 펄쩍펄쩍 뛰다 보니 이번에는 이 불이 엉덩이로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원숭이를 괴롭히던 불이 드디어 꺼졌습니다. 매운 빨간 고추 때문에 입에서 일어난 불이 얼굴과 엉덩이에 붙어서, 그 이후로 원숭이의 얼굴과 엉덩이가 빨개졌다고 합니다.

 

이 우화는 우리에게 피조물의 한계를 알게 해 줍니다. 창조주가 아닌 한 모든 피조물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사물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에 제한을 갖고 산다는 것입니다. 만일 원숭이가 고추를 먹어보지 않고도 고추가 맵다 것을 아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 원숭이는 고추를 먹지 않았을 것이고,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라고 놀림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먹어본 빨간 것은 모두가 맛이 있다는 자신의 경험만을 믿었던 결과 빨간 것은 모두 맛이 있는 것으로 알고 매운 고추를 먹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도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공간 속에서 살면서 미래에 대해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9월 5일 추자도 인근 해상에서 돌고래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나 또 한 번 우리에게 안타까움을 주었습니다. 지난 해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300명이 넘는 생명이 희생되었는데, 또 다시 사고가 난 것입니다. 이 돌고래호 사건으로 인해 3명만이 구조되었을 뿐, 지금까지 사망자가 11명이나 되고 실종자는 7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그 사고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했을 것입니다. 희생당한 가족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런 사고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낚시하러 가지 말라고 말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또다시 많은 생명들을 잃어야만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내일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 경험을 근거로 해서 오늘을 살아갑니다. 원숭이가 빨간 토마토와 빨간 사과를 먹어보고서 ‘빨간 것은 모두 맛있다’고 생각하고 빨간 것을 마음 놓고 먹었던 것처럼, 우리 인간도 지나간 우리들의 경험을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경험을 근거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우리들의 지나간 과거 경험을 근거로 한 우리들의 판단이나 선택이 언제나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일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삶에 어려움이 찾아오면 그 어려움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은 그 현재의 어려움이 언제 끝이 날지, 어떤 결말을 가져다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유한한 인간의 한계에서 오는 불안이요 고통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은 그런 인간의 한계에서 오는 불안과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불안과 고통을 이겨낼 올바른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 자체가 고난’이라고 생각하고 고난을 무작정 감내하며 힘겹게 살아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어차피 한번 살다가는 인생, 마음껏 즐기면서 살자’ 그러면서 쾌락을 추구하며 그 세상적인 쾌락으로 불안과 고통을 덮으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내일에 대한 불안과 현실적인 고통 속에 산다 하더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며 현실을 신앙으로 이기며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현재의 고통을 불평하며 신음하면서 살아갈지라도, 우리 신앙인들은 같은 고통 속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 차이가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신앙인들은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세상 사람들처럼 불평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지적인 능력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남들보다 좋은 환경 속에 살고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살기 때문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많이 당하는데, 우리 신앙인에게는 그런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우리 신앙인들은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고, 불안한 미래 때문에 마음 편치 못할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에게는 우리가 신앙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들에게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것을 깊이 깨달았던 시편 기자는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39편에서 그 이유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홍해를 가르셨던 것처럼 늘 우리의 삶에 홍해를 가르는 그런 기적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갈멜산에 불을 내려 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에도 그런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아주 평범한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오늘 본문에서 두 단어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살펴보신다.’는 말과 ‘아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펴보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사실 때문에, 세상 그 어떤 불안이나 고통 속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펴보신다.’는 말은 광산에서 금이나 다이아몬드를 찾을 때 쓰는 말입니다. 너무 가물어서 물이 없을 때 땅 속 깊이에 흐르는 수맥을 찾는다고 할 때 사용하는 말이 살펴보신다는 말입니다. 광산에서 금을 찾거나, 가뭄 속에서 수맥을 찾을 때 쓰는 이 ‘살펴보신다.’는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포함됩니다.

 

첫 번째는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광산에서 금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또 가뭄이 들었을 때 땅 속 깊이에 흐르는 수맥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금이 많이 난다고 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금이나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서 평균 1,000미터 이상 지하를 파 내려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광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숱한 어려움도 감내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금을 캐기 위해서 광산에 들어갔다가 희생되기도 합니다. 많은 노력과 희생이 없다면 금을 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캐낸 것이 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펴보신다고 하는 말씀 속에는 우리를 찾아내기 위해서 그런 노력과 희생을 감내하셨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내기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져 죽어가는 우리를 찾아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셔야 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희생의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그 희생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찾아진바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에 찾아진바 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도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우리가 어떤 고통 가운데 있든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너무 힘들어 삶을 지탱할 수 없을 때에도 찾아오셔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삶에 지쳐 목말라 할 때에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자신을 희생하시며 우리의 생명수가 되어 주십니다. 믿음이 약해 세상 속에서 방황할 때에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믿음을 강건케 해 주십니다. 우리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헤맬 때에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십니다. 아무리 커다란 장애물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하더라도, 바로 거기에 찾아오셔서 당신이 친히 우리의 디딤돌이 되어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밟고 그 장애물을 건너가도록 우리의 발밑에서 디딤돌이 되어주십니다. 우리의 눈이 가리워져 바르게 분별하지 못할 때에도 빛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갈 길을 알게 하시고, 그 길에 밝은 빛을 비춰주심으로 넘어지지 않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아무리 삶의 문제가 얽힌 실타래처럼 풀려지지 않을 것만 같다 하더라도, 거기에 문제의 해답으로 찾아오십니다. 병든 자리에도, 물질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자리에도, 세상에서 상처받고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아 쓰라린 가슴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바로 그 자리에도 우리 주님은 찾아오셔서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해 주십니다.

 

단 한번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수없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울 때에도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기도의 자리에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에는 이 예배의 자리에 우리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열심히 살아갈 때 바로 그 자리에도 찾아오십니다. 여러분, 언제나 어디에서나 문을 두드리시며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 주님을 우리의 삶에 맞아들이십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하늘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절에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 안에 오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을 듣고 우리의 삶에 주님을 영접하면 우리의 모든 삶에 기쁨을 넘칩니다. 우리의 삶에 닥친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듯 간절하게 우리를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우리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의 삶에 영접하십시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사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십시다.

 

‘살펴보신다.’는 말 속에 포함된 또 하나의 의미는 절대로 하나님의 눈에서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읽은 말씀 바로 다음인 7절 이하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하나님의 눈을 피해 갈 수 있는 곳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간다 할지라도, 스올에 내려간다 하더라도, 심지어 바다 끝으로 도망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눈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 본문에서 ‘살펴보셨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에서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그렇게 말하고, 2절에서는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그렇게 고백하고, 3절에서도 “나의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라고 말합니다. 살펴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절대로 피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펴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안다’고 하는 말은 사랑하는 부부가 경험을 통해서 서로를 알아갈 때 쓰는 말입니다. 함께 생활하고, 함께 잠을 자고 사랑을 나누면서 서로를 알아갈 때 쓰는 말이 이 ‘안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경험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고 할 때 바로 그렇게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피상적으로 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우리와 함께 삶의 아픔과 기쁨을 느끼고, 우리와 함께 인생의 고비들을 넘기면서 우리의 희로애락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기에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19세기 헝가리 출신의 유명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리스트(Ferenc Liszt, 1811-1886)가 어느 시골 지방을 여행하다가 조그마한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그 카페에서는 그 지방에서 최고라고 손꼽히는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때 연주된 곡은 얼마 전에 리스트 자신이 작곡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잘 연주하다가 어느 부분에 가서는 자기의 곡과는 전혀 다르게 연주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주가 끝나자 리스트는 그 연주자를 찾아가서 “이 부분이 틀렸으니 이렇게 연주해 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연주자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버럭 화를 내면서 “아니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요? 나는 이 지방에서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이고, 특히 리스트의 곡에 대해서는 정통한 사람이요. 당신이 뭔데 참견이요?” 그러더랍니다. 그 때 리스트가 “예, 저는 이 곡을 작곡한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때서야 연주자의 얼굴이 빨개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누가 더 잘 알겠습니까? 곡을 만든 사람이 그 곡에 대해서 더 잘 알겠습니까, 아니면 그 곡을 보고 연주하는 사람이 더 잘 알겠습니까? 당연히 곡을 만든 사람이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고, 내 형편은 내가 제일 잘 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를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아는 것보다 우리를 훨씬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걸 인정하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에 대해서는 내가 전문가야’ 라고 생각하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왜소해지는 우리 자신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위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위임하고, 하나님께 내 삶의 문제를 위임하고, 하나님께 생의 고통을 위임하면,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펴보신다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서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고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절에서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그렇게 고백했고, 이어서 2절에서도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라고 말하고, 3절에서는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그랬고, 4절에서는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속일 수는 있습니다. 때로는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는 감출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나만의 비밀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감출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만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7절에서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짓말이나 속임에 결코 넘어가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가끔 거짓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앞뒤를 맞춰서 대본을 잘 짜고서 거짓말을 하는데, 어른들이 볼 때에는 훤히 보이는 거짓말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른이 보아도 아이들의 거짓이 훤히 보이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거짓말이나 속임에 넘어가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더라도 속일 수 없습니다. ‘뛰어봐야 벼룩’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뛰어봐야 벼룩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얼 감출 수 있고, 무얼 속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십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솔직하지 못하고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상 우리는 절대로 성결한 영적 생활을 힘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감추면 감출수록 우리는 더욱 죄로 물들어 가는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솔직하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정확하게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숨소리 하나까지도 다 아시는 분입니다. 무의식에 감추어진 우리들의 생각이나 욕망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 솔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주께서 나를 살펴보시고 나를 아시나이다.”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 앞에 선 우리 신앙인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펴보시고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펴보시고 아시는 분’이라는 이 사실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하고 죄로 인하여 어두운 곳에 숨고 싶은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숨기고 싶으나 숨길 수 없는 자신의 죄악된 모습이 반드시 드러나고 그 죄의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고 정직하게 살려고 힘쓰는 사람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찾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삶 속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우리의 불행을 행복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근심을 환희로 바꿔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훨씬 더 잘 알고 계시기에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께 맡기기만 하면 우리의 삶은 가장 선하고 가장 아름다운 길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여류 시인인 플린트(A. J. Flint)가 쓴 시입니다.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아! 두려움이 있는 자에게 자비가 있어라.

내 앞날에 놓인 불안스럽고 답답한 물음에

그는 분명하게 답하신다.

의심이 생기고 두려움이 싹틀 때

이 생각에서 해답을 찾으라.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신다.

오! 내 모든 근심에 위안이 있어라.

내가 떨군 짐을 그가 손수 들어올리시고

짊어지시는구나.

독수리 날개짓이 지쳤어도

내 달려갈 길 가리라

내가 아는 바는 이러하니,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살펴보시고 나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용기를 갖고 힘차게 우리의 삶을 사십시다. 그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 기쁨으로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살펴보고 있단다. 내가 너를 잘 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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