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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47편 1-9절(매일 부르는 감사의 노래) - 안효관

by Preacher 2023.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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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47편 1-9

매일 부르는 감사의 노래

안효관 목사 2019-07-07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아동문학가인 소파(小波) 방정환(1899-1931) 선생에 관한 일화입니다. 어느 날 그가 밤이 늦도록 책을 읽고 있을 때, 갑자기 창문이 열리더니 복면을 한 강도가 불쑥 들어와 시퍼런 칼을 들이밀며 말했습니다. “꼼짝 말고 손들어!” 그러자 방정환 선생이 말했습니다. “아니, 꼼짝 않고 어떻게 손을 든단 말이요?” 강도가 주춤하며 말을 바꾸었습니다. “그럼, 손들고 꼼짝 말어. 그리고 더 이상 잔소리 말고 돈이나 내놔.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야.”

 

강도의 위협에도 방정환 선생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고 390원을 내놓았습니다. 당시 390원이면 엄청나게 큰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이것이 전부이니 가지고 가시오.” 주인이 태연하게 돈을 주자 도둑이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얼른 도망가려고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방 선생이 소리를 쳤습니다. “여보시오. 돈을 주었으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할 것 아니오?” 깜짝 놀란 강도가 가슴을 쓰다듬으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래 고맙다. 이 ○○야!” 얼마 후 날이 밝았습니다.

 

누가 문을 두드려서 나가 보니까 순경이 강도를 데리고 찾아와서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간밤에 많이 놀라셨지요? 이 사람이 선생님 댁에서 강도질을 했다고 하기에 확인을 하러 왔습니다. 이 사람 맞지요?” 이 때 방정환 선생이 차분히 말했습니다. “아, 이 사람 말이오? 어젯밤에 우리 집에 왔었죠. 그런데 돈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사정이 딱해 보여서 내가 390원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고 갔는데요.” 순경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 사람이 분명히 선생님 댁에서 돈을 훔쳤다고 자백을 했는데요?”하며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래도 방정환 선생은 태연히 말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 그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내가 돈을 주니까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지 않았소? 돈을 훔쳐 가는 도둑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법이 어디 있소?” 순경은 하는 수 없이 강도를 풀어 주었습니다. 순경이 돌아가자 강도는 방정환 선생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세상에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강도는 눈물을 흘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방정환 선생은 강도의 등을 두드리면서 “일어나시오. 사람이 어렵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마시오.”하고 타일렀습니다. 그러자 강도가 방정환 선생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선생님 곁에서 평생 선생님을 섬기며 살게 해주십시오.” 그 후 강도는 죽을 때까지 방정환 선생 곁에서 집안 일을 도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에 그렇게 큰 힘이 있습니다. 비록 거의 강요에 의해서 툭 내뱉은 말이지만,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는 ‘감사하다. 고맙다’는 말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다주는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 말의 위력이 크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목사가 설교를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경영하는 사람들의 책이나 강연을 통해서도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그의 인생에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어주었는지 많은 사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의 기업인인 이나모리 가즈오(稲盛 和夫)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소를 잃지 말고 주변의 모든 것, 삼라만상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로 힘들고 불만이 있어서 감사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속았다고 생각하고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야모토 마유미(宮本由美)라는 작가 있습니다. 그는 집안이나 연줄, 학력 어느 것 하나 변변치 못한 평범한 소시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외국계 생명보험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에 한 찻집에서 우연히 사이토 히토리(齋藤一人)와 만나게 됩니다. 사이토 히토리는 일본에서 개인이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사업가, 즉 실질적인 소득이 가장 많은 사람으로 억만장자입니다. 미야모토는 그 사이토의 제자가 되어 그에게 삶의 자세와 대화법, 회사 경영 등에 대한 다양한 가르침을 전수 받았고, 그 후 사업에도 성공해 ‘교토의 부자’ 순위에 오르는 인생역전을 이루었습니다.

 

인생역전을 이룬 그가 쓴 책 가운데 하나가 『돈을 부르는 말버릇』인데, 거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을 하든 잘 풀리는 사람과 무엇을 해도 일이 꼬이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감사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좋은 일이 생길 때만 감사해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횟수가 매우 적습니다. 세상에 성공한 사람들이 적은 까닭은 이렇게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버릇이 성공을 끌어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사람들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얼마나 큰 힘을 가져오는지, 그 말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단 한 순간도 우리의 삶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늘 우리의 삶에서 감사를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가 신앙의 척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얼마나 감사하며 사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신앙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시입니다. 시인은 우리의 모든 삶에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힘든 역사적 순간들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사건들을 깊이 있게 묵상할 때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늘 함께 했음을 알게 됩니다.

 

사실 그들의 역사는 결코 아름다운 역사도 아니었고, 평안한 역사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눠진 이래 굴곡진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북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남 유다 역시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면서 비참한 세월을 맞아야 했습니다. 멸망의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는 사람은 ‘비천한 자’(열왕기하 25:12) 외에 아무도 없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고국 땅은 황폐화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벨론이 메대와 페르시아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당한 후에, 메대의 초대왕인 고레스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약 5만 여명의 포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고 싶어도 적대자들의 방해 때문에 성전을 건축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20여년 만에 겨우 성전을 건축하긴 했지만, 솔로몬이 처음 지은 성전에 비하면 작고 초라한 성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주권도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기쁨과 설렘으로 예루살렘 돌아왔지만,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여전히 힘들고 어려움의 나날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의 시가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본문의 첫 단어는 ‘할렐루야’입니다. 할렐루야라는 말은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객관적인 상황에서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보다는 불평과 원망이 앞설 수도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님들까지 전쟁통에 죽임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가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삶이 여유롭고 형통한 것도 아닙니다. 너무나도 힘들고 팍팍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가장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1절에서 이어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그러면서 2절 이하에서 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한지,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하는지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자기들을 고국 땅으로 되돌아오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아픈 마음을 고치시고 상처를 싸매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비극적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엄청난 고난을 겪었지만, 그 고난에서 건져주신 분이 하나님이셨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시인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수없이 많은 암울한 역사 속에서 불평을 꺼내들지 않고 찬송을 꺼내들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당한 고통 가운데서 원망을 꺼내들지 않고 감사를 꺼내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무엇을 찾아내려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눈에 보여지는 것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무엇을 찾으려고 애를 쓰느냐에 따라서 우리 손에 쥐어지는 것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삶을 긍정으로 바라보고 감사를 찾아내려 하는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이 모두 감사뿐입니다. 거꾸로 부정과 불평의 눈으로 원망거리를 찾아내려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불평불만의 요소들뿐입니다. 우리 인생의 우물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힘쓰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에 감추어진 것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시대가 참 어렵고 힘든 시대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느끼는 체감온도는 너무나도 낮고 춥습니다. 경제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우리를 평안하게 해 주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경제가 너무나도 어렵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1997년 이후 겪었던 IMF시기보다도 더 힘든 경제상황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그렇게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지금까지 우리 민족이 걸어왔던 역사적 상황과 비교해 본다면 지금이 최고로 부유하고 넉넉한 시대입니다. 청년들이 일자리를 얻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고, 겨우 일자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비정규직뿐이어서 고용이 안정되지 못하고, 언제 잘릴지 몰라 불안한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기대하는 기대치가 너무 높기 때문에 그런 불평이 나오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이고 그런 불평거리와 어려움은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시대적 상황이 풍요로운데 그 풍요를 마음껏 누릴 여유가 없어서 그런 불만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유럽 최고의 명문 경영대학원인 인시아드(INSEAD)의 리더십 개발 분야 교수인 맨프레드 케츠 드 브리스(Manfred Kest de Vries, 1942-)는 그의 책 『삶의 진정성』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행복한 사람들은 상향비교보다 하향비교를 더 많이 한다. 상황이 어찌되건 간에 이들은 더 안 좋은 상황의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복 받았는지를 깨닫는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에 집착하기 보다는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자신의 상황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생각하며 자신이 누리고 있고 가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만, 반대로 자신보다 더 풍요롭고 좋은 여건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삶이 최악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은 그말대로 살지 못합니다.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나는 왜 이렇게 구차하게 사는지.’ 그러면서 자신의 상황을 한탄합니다. 나보다 더 빨리 성공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나에게는 왜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는 거야!’라고 불평합니다. 그렇게 자신보다 더 나은 상황과 비교하면 늘 자신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움을 당했더라도 ‘이것으로 끝난 것이 어디야? 더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는게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가 있고, 행복을 느끼며 살게 됩니다. 감사는 상향비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향비교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여기에서 ‘감사함으로’라는 말은 맹목적으로 또는 의무적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는 데에서 오는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듯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하나하나 깊이 묵상할 때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서 벅찬 감격이 우러나와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무언가를 경험하진 못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묵상할 때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셨구나! 그래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라고 깨달을 때 나도 모르게 감사와 찬송이 내 마음과 입술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찬송을 잊고 사는지 아십니까? 왜 우리의 마음에서 감사가 사라지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 역사하시고 나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내가 잘나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내 삶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내 손을 붙잡고 앞서 가시며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나 혼자 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흔적이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찬송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감사절이 되었다고 해도 무엇을 감사해야 할지 모릅니다. 영적 무지가 결국 우리의 입술에서 찬송을 빼앗아가고, 영적 무지가 우리의 마음에서 감사를 잃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 8-9절을 보십시오. 시인은 하늘에 구름이 이는 것만 보아도 하나님의 역사를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비를 내려 주시기 위해서 저 구름을 준비하셨구나!’ ‘산에 있는 풀과 나무를 잘 자라게 하시기 위해 비를 내릴 준비를 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들짐승과 까마귀 새끼에게도 먹을 것을 주셔서 생존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 인간이 볼 때 별볼일 없는 미천한 존재들입니다. 8절에 언급되고 있는 ‘풀’은 성경에서 아침에 자라서 저녁이 되면 시들어버리는 것으로 묘사된 풀입니다. 매일 아침 잘 자라는 듯 하다가 저녁이 되면 시들어버리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관심조차 갖지 않는 그 연약하고 별 가치가 없는 그 풀들을 위해서 구름을 준비하시어 비를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까마귀’는 부정한 새로, 성경에서 황폐와 저주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레위기 11:15, 잠언 30:17, 이사야 34:11 등) 더군다나 유대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까마귀는 새끼를 낳자마자 어린 것들을 내버리는 아주 못된 새로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본문 9절에서 ‘까마귀 새끼’라는 말은 하찮고 부정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어미에게조차도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그렇게 어미에게도 버림받고 하찮은 존재인 까마귀 새끼에게도 관심을 갖고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겠냐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9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이사야 49:15-16)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한 순간도 놓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백성인 우리를 고난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것만 생각해도 찬송함이 마땅하고, 매일 감사해도 부족할 뿐입니다.

 

여러분, 내 삶이 지금보다 조금 더 넉넉하지 못하다고 불평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가 아니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조차도 누리지 못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원망하시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고, 아무 것에도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지금 이만큼이나마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며 문신인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은 평소 소박한 생활에서도 여유로움을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소 ‘자신은 항상 다섯 가지 반찬으로 밥을 먹는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제자가 스승의 밥상에 반찬이 겨우 세 가지 밖에 없는 것을 보고는 ‘밥상에 세 가지 반찬 밖에 보이지 않는데 어찌 거짓말을 하시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사재 선생은 “밥상 위에 있는 반찬 세 가지에다, 시장이 반찬이니 이것이 네 번째 찬이요, 따뜻하게 해서 먹으니 그것이 다섯 번째 찬이니라.”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비들 사이에는 “사재(思齋)처럼 먹으라.”는 말이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서울 사는 친구가 쉬지 않고 집을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편지를 띄우기도 했습니다. “내 이야기를 함세. 나는 20년을 가난하게 살면서 집 몇 칸 장만하고 논밭 몇 이랑 경작하고, 겨울에는 솜옷, 여름에는 베옷 몇 벌을 갖고 있네. 잠자리에 누우면 남은 공간이 있고, 옷을 입고도 남은 옷이 있으며, 주발 바닥에는 먹다 남은 밥이 있다네. 이 여러 가지 남은 것을 자산으로 삼아 한세상을 으스대며 거리낌 없이 지낸다네... 듣자니 자네는 옷과 음식과 집이 나보다 백배나 호사스럽다고 하던데 어째서 조금도 그칠 줄 모르고 쓸 데 없는 물건을 모으는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있기는 하네. 책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개 하나. 바람 통하는 창 하나, 햇볕 쪼일 툇마루 하나, 차 달일 화로 한 개,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한 개, 봄 경치 즐길 나귀 한 마리가 그것이네. 이 열 가지 물건이 많기는 하지만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네. 늙은 날을 보내는 데 이밖에 구할 게 뭐가 있겠나.”

 

여러분, 멋진 조선의 선비의 모습 아닙니까? 어쩌면 우리의 지나친 욕심이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불러야할 찬송을 부르지 못하게 하고,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를 막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묵상함으로 감사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에게 남들보다 더 여유롭고 풍요로운 뭔가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을 묵상하기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해서 그는 감사의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에 끌려 욕심을 묵상하며 살지 마십시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대하면서 매일 감사의 노래를 부르십시다. 그 감사의 노래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될 것이고, 우리에게는 하늘 기쁨을 한아름 가득 안겨주는 축복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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