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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예레미야애가

애 3장 17-33절(고통 중에 오히려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 - 이준원

by Preacher 2024.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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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3장 17-33

고통 중에 오히려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

이준원 목사 2013.5.22.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어제 오클라호마에서 강력한 토네이도가 휩쓸고 지나가 20여 명이 죽고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뉴스를 보니까 정말 엄청났습니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한 번도 슬픔이나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 토네이도나 저번 보스턴 마라톤 테러나 코네티컷 총격사건과 같이 엄청난 사건이 꼭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으며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과 좌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토네이도나 테러 사건이나 총격사건의 피해자들 중에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재난은 대상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고통의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이 고난을 이기는 방법은 세상의 안 믿는 사람들의 방법과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점에 있어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레미야가 처음에는 믿음이 무섭게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절망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가 절망의 늪에서 신비로운 전환점을 경험하고 다시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의 구조를 보면, 1절부터 17절은 예레미야의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는 과정을 보여주고, 18절부터 20절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21절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발견하고, 22절부터 33절에서는 믿음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올라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1. 뿌리째 흔들리는 믿음

 

우리의 생각과 현실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때가 되면 그럭저럭 넘어가겠지’라고 생각을 하지만, 진짜로 문제가 닥치면 겉잡을 수 없이 휘말려 결국은 기력을 잃고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그랬습니다. 예레미야가 얼마나 훌륭한 선지자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장차 유다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최후의 비참함과 고통을 환히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 날이 오면 인내하며 견디어 내리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막상 비극의 날이 오자 예레미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다가 바빌론의 공격을 받아 멸망당하던 날의 비참함을 그는 목격했습니다. 3년이 넘게 계속된 기근으로 마른 막대기처럼 비틀어진 사람들이 쓰러져 시체가 되어서 길에 너부러져 있습니다. 잔인무도한 바빌론 군인들이 임신한 여인의 배를 칼로 갈라 죽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돌담에다 매쳐서 머리가 깨지고 뼈가 으스러져서 죽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성전이 불길에 휩싸이고 성전의 기구들이 약탈당합니다.

 

그러한 일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몸이 마치 눈물의 저수지가 된 것처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속에 헤어날 기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전에 자기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참혹한 일을 실제로 당하고 보니, 그렇게도 좋았던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그분의 음성을 듣던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비극 앞에서는 그의 믿음도 심하게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믿음이 흔들릴 때 나타나는 증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 가득히 불평을 담고 하나님을 향해 이웃을 향해 원망을 쏟아놓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해 절대로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도 역시 그랬습니다. 위대한 선지자인 예레미야도 그랬다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고난을 당할 때 약해진 한 인간으로서 불평과 원망의 시를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3장을 보면, 개역성경에는 주어가 안 나와 있지만, 영어성경을 보면 더 확실합니다. ‘그(He)’라는 주어를 17번 이상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물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괴로움을 주셨다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조국, 특히 하나님이 택하신 곳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며, 성전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며, 심한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예레미야가 누구입니까? 40년 동안 유다를 향하여 눈물로 예언을 한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하나님을 떠난 삶을 계속 산다면 망할 것이라고 예언해 왔지만, 막상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예언한 내용이 그대로 이뤄지는 것을 실제로 목격하니까 마음이 괴로워지면서, 조금 전의 질문들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이곳이 이토록 유린되는가? 왜 이런 비극이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어떻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이토록 굶주리거나 칼에 맞아 죽도록 내버려두시는가?’ 물론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심판임을 예레미야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여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3장 처음부터 잘 나타나 있습니다. 1절부터 18절까지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내용입니다. 전부 다 하나님 탓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종일 나를 매로 때리는 자는 하나님이고(1, 3), 나를 어둠에 가둔 것도 하나님이고(2), 곰처럼 자기를 갈기갈기 찢은 것도 하나님이고(10-11), 쑥을 짠 쓴 물을 마시게 한 것도 하나님이고(15), 활을 당겨 허리를 맞춘 것도 하나님이고(13), 돌로 내 이를 쳐서 부러뜨린 것도(16), 재로 나를 덮은 것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16). “내게서 평안을 빼앗으시니, 나는 행복을 잊고 말았다.” (17절, 새) 전부 다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믿음이 좋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선지자인 예레미야도, 이렇듯 고통과 괴로운 상황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괴로워하는 문제들을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가 정말 민족의 아픔을 위해 그렇게 울면서 기도한 적이 얼마나 됩니까.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불쌍해서 너무 안타까워 괴로워한 적이 얼마나 됩니까. 대부분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문제로 괴로워하고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습니까.

 

그렇더라도 어쨌든 힘든 건 힘든 겁니다. 문제가 닥치면, 결코 흔들릴 것 같지 않았던 믿음이 사정없이 흔들리면서 하나님께 불평하고 이웃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같이 엄청난 민족의 비극 앞에서도 그렇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 있어서도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됩니다.

 

2. 절망의 늪

 

이렇게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가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절망의 늪입니다. 예레미야도 이 늪에 빠졌습니다. “나오느니 탄식뿐이다. 이제 내게서는 찬란함도 사라지고, 주님께 두었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다.” (18절, 새)

 

이제 주님께 두었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망을 하는 순간 반드시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있습니다. ‘이젠 하나님을 믿는 것도 소용없고, 믿음도 필요 없고, 이젠 다 소용 없어. 끝이야.’라고 절망할 때 찾아오는 불청객이 뭔지 아십니까?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19절) 포기하고 절망할 때 찾아오는 불청객은 바로 ‘기억’입니다. 그것도 나쁜 기억입니다. 여기에서 “기억하소서”는 번역이 잘못 되었습니다. “기억합니다”로 되어야 합니다.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19절, 새)

 

예레미야는 과거에 자신이 당한 그 고통, 그 쓰라린 고난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조국에 일어난 일들이 너무나 생생히 기억나 잠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눈을 감아도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20절)

 

이 모든 것이 이미 자기를 통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상황을 자꾸만 기억하고 그것을 잊지 못하니까, 그 결과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늪에 빠지면 이상하게도 기억나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그런데 주로 나쁜 기억입니다. 예레미야도 절망에 빠지니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자꾸 눈앞에 떠오르고 그것들이 쉴 새 없이 자기를 괴롭힙니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20절, 새) 이런 경우에는 기억이라는 것이 사탄의 하수인의 역할을 합니다. ‘기억’이라는 탈을 쓴 사탄의 종은,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들과 사건들을 빽빽이 적은 파일을 들고 등장합니다. 언젠가 자신이 범했던 죄악들,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 기억이 날 때마다 허탈감에 빠지게 하는 실패의 사건들을 모두 나열한 추잡한 X 파일을 가지고서, 손에는 쑥을 짜서 만든 즙을 담은 잔을 들고 찾아와 그 잔을 내밀면서 외칩니다. “빨리 이것을 마시고 죽어! 너는 이제 아무 희망이 없어! 너는 죄인이야! 너는 죽어야 해! 네 까짓 게 뭘 한다고 해? 너는 아무 가치가 없어. 그러니 빨리 죽어! 죽어버려!”

 

이것이 기억이 주는 잔인한 고문입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절망의 늪에 빠지니까, 나쁜 일들만 기억하게 되고, 그러니까 온통 서운하고 섭섭한 일들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책하면서도 어떻게 해결할 방법은 없고, 그러다 보니 완전히 낙심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힘든 상황에서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혼자만 있게 되기가 쉬운데, 그럴수록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되며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키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도 그러한 경험을 했다면, 이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나 이런 절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교만해서는 안 되고 늘 겸손하게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고전 10:12) 자신의 신앙경력이나 풍부한 성경지식이나 교회 안에서의 어떤 직분이나 사람들의 칭찬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마지막까지 견디고 인내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혹시 이전에 일어났던 안 좋은 일들이 자꾸 기억에 떠오를 때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잘못하고 죄를 지은 것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면 이미 용서해주셨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좀 틈을 보인다 싶으면, 자꾸만 이전에 저질렀던 죄악 된 모습들, 실패했던 일들, 해결되지 않은 인간관계들, 불편한 사람들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그런 것들이 자꾸 기억나도록 하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게 함으로써 우리 마음이 더욱낙심하고 좌절하도록 만듭니다.

 

이것은 사탄의 전략입니다.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가 주야로 묵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무엇을 생각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말씀 묵상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마음속에 쓸데없는 것들이 떠오를 때 즉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내게는 힘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수록 주님을 더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수록 스스로 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이러한 예배의 자리로 나아와야 합니다.

 

3.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기억하고 회복되는 예레미야

 

그런데 절망의 상황에서 갑자기 하나의 전환점이 마련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절망의 늪에 빠지고, 안 좋은 기억만 하면서 낙심에 빠져 있던 예레미야가 갑자기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갑자기 이렇게 바뀔 수 있었습니까?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21-23절, 새)

 

지금 상황이 좋아졌습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암담하고 비참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어떻게 갑자기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그가 어려운 상황을 보면서 고통스런 일들을 기억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주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졌습니다.

 

예루살렘에 일어난 비참한 일들과 현재의 상황을 기억하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는가,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는가 하고 묻는데서 그친다면, 마음이 답답하고, 화도 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이 무슨 뜻인가를 묻고,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데에는 분명히 선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하나님의 인자가 끝이 없고 그의 자비가 무궁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고, 그 결과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침마다 일어나도 상황은 똑같고 여전히 미래가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기에, 그 전에는 무서운 현실을 직면하기 두려워서 눈을 뜨기도 싫던 아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로우며, 그의 성실하심이 크다고까지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확신 가운데 이러한 믿음의 선언을 합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4-26절)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이기에, 주님께 나의 소망을 두고 그를 기다릴 것이다’(24), ‘주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며 찾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복을 내려주신다’(25).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참고 기다리는 것이 좋다’(26)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고난 중에서도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깨닫고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심지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32-33절)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중심에 회상한즉”. 그렇습니다. 예레미야는 마음속 깊이 곰곰이 생각을 했습니다. 일어난 사실들만을 보거나 기억만 한 것이 아니라, 생각을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재해석해낸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19절과 20절의 “기억”은 가만히 있는데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들입니다. 과거에 일어났고 이미 끝났지만 사탄이 계속 생각나게 하는 나쁜 기억을 말합니다. 그러나 21절의 “회상(곰곰이 생각)”은 적극적으로 자신이 생각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만히 떠오르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좋은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가만히 절망의 늪에 빠져 있으니까 사탄이 주는 안 좋은 기억들만 떠올랐고 그것에 자기를 내어주다 보니 완전한 낙심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고리를 끊고, 스스로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묵상하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붙들기로 결단하니까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혹시 삶에 어떤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어쩔 줄 모르는 답답한 일이 있습니까? 어떤 고난의 문제가 닥쳤습니까? 내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있습니까? 그럴 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 고통스런 현실 때문에 곧바로 괴로워하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한 차원 올라가서 그 사건을 하나님의 눈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을 다른 각도로 다시 보는 것입니다.

 

그냥 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는 힘든 상황이지만,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재해석해서, 그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뭔가 있다. 분명히 주님이 지금 내게 뭔가 알려주기를 원하신다.’ 바로 그것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만 보고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하고 재해석하며 상황을 다시 보게 되면, 힘들고 괴로운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의 끝없는 인자와 무궁한 자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고통스런 순간이 오히려 축복으로 가는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내게 소망이 있음을 고백할 수가 있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오래 전 함께 나눈 적이 있는 내용인데,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악기는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서 모진 풍파를 견뎌낸 나무의 북쪽 가지를 잘라서 사용해야만 재질도 단단하고 그윽한 소리도 낸다고 합니다. 의학계에 크게 공헌한 “606호 페니실린”은 605번의 쓰라린 실패 뒤에 찾은 성공의 이름입니다. 순도 99.9%의 정금이 나오기까지는 광산에서 캐낸 광석을 잘게 깨어 부수고, 씻고, 끓이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고통을 겪어내야 빛나는 황금이 됩니다. 영국 격언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찬란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가는 말]

 

‘다른 사람이 암에 걸린 것보다 내 감기가 더 고통스럽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것은 그냥 담담하지만, 내게 일어난 아주 작은 일이라도 그것은 너무 아프고 힘이 든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바로 그러한 세상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 각자도 물론 힘든 일이 많이 있고 여러 가지 삶의 고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 중에 소망을 발견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이번 오클라호마 토네이도를 당한 사람들이나 저번 보스턴 마라톤 테러 사건이나 코네티컷 총격사건의 피해자들 같이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돌아볼 줄 알아야겠습니다.

 

가깝게는 우리 주변에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헛된 욕망을 따라 살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영혼들을 위해 끊임없이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또한 우리 교우들 가운데 여러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서로 돌아보며 감싸주고 격려해주고 합심해서 기도하면서 주님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나가야겠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더라도, 주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가 아침마다 새롭다는 사실을 늘 맛보며 주님의 성실하심이 큼을 날마다 찬양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 자기 점검과 기도

 

- 지금 어려움을 당한다면 주님의 자비와 긍휼과 성실하심을 회상하며 이겨내자.

- 주변에 어려움을 당해 낙심해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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