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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오바댜

옵 1장 10-14절(오바댜의 교훈) - 신기형

by Preacher 2023.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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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1장 10-14

오바댜의 교훈

신기형 목사 2006-02-19

이한교회 [서울시, 하계동] http://www.ehan.org/

 

오바댜는 한 장 밖에 되지 않아서 짧은 책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오뱌다의 내용과 본문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선 저자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종’이란 오바댜의 이름이 총 11번 나오는데, 오늘 본문을 적은 저자의 배경과 성격에 대해서 알려주는 본문은 없습니다.

 

오바댜가 예언한 내용도 가볍지 않습니다. 에돔이라는 나라의 멸망에 대해서 철저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이 형성한 나라인데, 이 나라는 지난주 아모스서에서, 예레미야에서, 에스겔에서도 등장하는 이스라엘 이웃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다윗의 시대에는 속국으로 지내기도 했습니다. 에돔이 멸망할 것을, 그 이유를, 그리고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에돔의 백성 중에서 들은 자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돔에게 일어나는 일을 말씀하시는 것은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야할 중요한 교훈이 있고 우리에게도 주시는 중요한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오바댜에 나타난 교훈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심판

 

첫째, 하나님의 심판을 제대로 알라고 말씀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돔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면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위틈에 거하면 안전할 것이라고. 별들 사이에 깃들면 그 누가 우리를 어렵게 할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별들 사이에 깃든다 해도 그곳에 올라서 이끌어 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무리 강한 요새를 지어도 우리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곳은 없다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전능하신 분은 자연의 모든 것이 다 그분의 도구이라고. 도망가는 요나,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면 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하나님은 풍랑을 보내셨습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짐을 당할 때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보내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분에게 그 어떤 것도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막으며 누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심판은 또한 철저 합니다. 5절부터 말씀시는데요, 강도가 대게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면 그냥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심판일 경우 그 강도는 마음에 만족해도 그치지 않습니다. 포도를 따는 일도 일부 남겨두고 가는 양심이 있는데 심판이 임하면 그 남음도 없게 됩니다. 약조한 자들이 다 등을 돌리게 됩니다. 지각 있는 자들도 없어지게 됩니다. 지혜가 있어야 이 문제를 해쳐 나올 것인데. 용사들도 놀라서 꼼짝 못합니다.

 

6절. 에서가 어찌 그리 수탐되었으며 그 감춘 보물이 어찌 그리 수탐되었는고. 요엘서의 말씀처럼 팟종이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어 치우는 그래서 이런 경우가 없는 철저함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심판은 점진적임을 말씀하십니다. 오바댜는 내용 전개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봅니다. 에돔의 상황이 ‘나쁨’에서 약탈을 당함으로 ‘더 나빠지고,’ 진멸될 것이라는 ‘최악의 상태’로 이어집니다. 반면 하나님의 회복도 점진적입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한 에돔이 멸망하고, 이는 좋음이라면, 본토를 회복하고 보다 좋음이고, 열국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최상의 상태로 발전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점진적이라는 것은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빨리 깨닫고 그 길에서 돌아서면 다시 회복의 단계로 갈수가 있고, 그렇지 않고 계속 그 심판의 의미를 모르면 더욱 어려움으로 더욱 강한 채찍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겸손이란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나를 너무 못하게 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를 너무 크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내 힘으로 하나도 할 수 없는 자가 바로 나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다 주의 은혜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우리 들입니다. 우리도 아파보면 두통 하나로 꼼짝 달싹 못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우리의 작은 모습이 마치 에돔과 같습니다. 에돔이 얼마나 작은 나라입니까? 사해 근처에 거하는 작은 나라. 그런데도 교만하면 스스로 대단한줄 알고 자기 위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교만이 무서운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내가 강한 줄 속게 하고, 내가 가진 것으로 무엇이든지 이겨낼 수 있다고 속이고. 그래서 이 교만에 의해서 속다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앞에 그냥 쓰러지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을 때, 즉 겸손할 때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지혜를 얻게 되고 바르게 생각하며 바르게 행동하게 됩니다.

 

박형미가 적은 <그곳에 파랑새는 있다>는 책을 읽었습니다. 벼랑끝을 지나야 정상이 보인다는 부제가 멋있어 읽어 보았는데, 그녀는 이 책에서 다음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우리는 현실에도 적응하지만, 꿈에도 적응해 간다.“ 참으로 좋은 말이었습니다. 현실에 적응해서 꿈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지만, 사람은 꿈에도 적응할 수 있어 꿈에 맞는 생각 행동을 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해 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악에도 적응해가고 교만에도 적응해 갑니다. 우리는 자기가 대단하다는 생각 속에도 적응해가고, 착각 속에도 적응해 가는 것 같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적은 <칠층산>이란 책이 있습니다. 20세기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같은 영적 유산을 주는 책입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 공부를 마치고 봉쇄 수도원이며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여 1968년에 타계한 명상가이며 신학자인 그가 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그르다고 하여 곧 내가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대가 악하다고 하여 곧 내가 선하다고 증명할 수 있는가? 우리도 너무도 이런 사고에도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자임을 자꾸 잊고 교만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12장. 솔로몬은 어떻게 보면 이런 삶과 생각에 속은 자가 그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문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심판을 알 때 그는 비로소 사람의 본문을 알게 됩니다.

 

2. 형제애

 

그러면 하나님은 왜 에돔을 심판하십니까? 오늘 본문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여기에 오바댜가 주는 두 번째 교훈이 있습니다. 형제에게 잘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관계에 있는 자에게 잘하라는 것이 두 번째 교훈입니다. 에돔이 이런 심판을 받는 것은 그렇게 큰 죄를 지은 것 같지 않습니다. 바벨론처럼 남유다를 멸망시키고 성전을 훼파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사람을 죽이고 끌고 가고 지난주 말씀처럼 지경을 넓히기 위해 여인의 배를 가르는 그런 반인륜적인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은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이는 형제에게 잘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라는 관계 하에서 심판의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어떤 일을 했습니까? 에돔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11절부터 15절까지 잘 나와 있습니다. 에돔 사람은 외국인이 예루살렘을 얻기 위해 제비 뽑을 때 이를 지켜보았습니다. 궁금해서 호기심으로 지켜보지만 사실 이 일을 당하는 자는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울까요? 차라리 그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 돕는 것인데, 그 자리에서 눈치 없이 다 보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두고 시험하려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그냥 땅에 무엇을 쓰셨습니다. 그녀의 자존심을 존중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돔 사람은 이스라엘이 땅이 빼앗기며 적들이 비웃으며 제비를 뽑을 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패망의 날을 기뻐하고, 재앙의 날에 방관했습니다. 그냥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의 노력을 해야 하는데.

 

13절. 환난을 당하는 날에 그 재물에 손을 대기도 했습니다.

14절. 더 사악한 모습이 나옵니다. 도망가는 자를 막았고, 몰래 숨은 자를 대적에 붙였습니다.

 

돕지 않은 것이고, 방관한 것이며, 자기의 잇속을 챙긴 것입니다. 바벨론처럼 그렇게 잔인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는 어떤 형제입니까? 아주 착하고 의로운 형제입니까? 아닙니다.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악을 인하여.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보다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입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야곱. 그가 이스라엘로 변화되기 까지 참으로 많은 세월을 보내며 고생한 야곱.

 

또 에돔은 평소 이스라엘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때 속이 시원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을 무시하던 형제가 어려움을 당하니 고소하다고. 마치 나오미가 고향을 떠났다가 빈털터리가 되어서 돌아왓을때 나오미를 조롱한 베들레햄 여인들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런 야곱이지만 형제에게 잘못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런 야곱이라도 어려울때 돕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가운데 맺혀진 관계에서 그 뜻을 따르기 위해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희, 세계의 인재를 구하다라>는 책에서 어떤 사람을 삼성에서 찾는지 나와 있었습니다. 창조인, 학습인, 세계인, 사회인. 사회인이란 인간미와 도덕성을 갖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책은 또 전경련에서 발표한 대기업이 원하는 인재의 유형 10가지를 소개하는데, 전문지식과 폭넓은 교양이 있는 사람 국제 감각과 외국어 구사 능력이 있는 사람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 계속 이어지다가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 여섯 번째로 나와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미국의 조직 창의성 분야 전문가인 앤 커밍스와 그레그 올드 햄은 창의적 인재를 4c를 갖춘 자라고 말합니다. 첫째는 compassion. 긍휼과 공감. 두 번째는 conception. 상상력. 세 번째는 controversy. 논쟁적이고 새로운 것을 늘 찾는 자. 네 번째는 commitment 헌신과 열정입니다. 인간미가 없는 사람은 사회에서도 기업에서도 쓸모가 없습니다. 인간미의 가장 기본은 바로 형제 자매, 직장 동료, 교회 성도들, 이렇게 형성된 관계가운데 사랑하고 돌보아 주는 것이 아닐까요? 평소는 경쟁하기도 하고, 평소는 잘못을 잘 알아서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어려울때는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도와주고 함께 해 주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덕입니다.

 

“서로”에 대한 구절을 찾아보았습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로마서 12장 10절 “형제를 서로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히브리서 10: 24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골로새서 3장 13절 “뉘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야고보서 5: 16절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우리가 잘 아는 자들 가운데 혐의도 있을 수 있고, 병도 얻어서 힘들기도 합니다. 용서해야할 일도 있고, 죄고 짓기도 합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기도해 주고 먼저 용서해 주고 먼저 사랑을 격려해 주라고 하십니다. 그 기준은 남이 나에게 어떻게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하셨는지에 있습니다. 에돔처럼 야곱이라서, 평소 우리를 무시했던 사람들이라서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못 본척 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죄인이라도 병자라도 어려울 때 돕는 것입니다.

 

어려운 가족을 모른 척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관계들 가운데 있는 자들의 어려움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에돔이 비록 바벨론처럼 살인의 죄는 짓지 않아도 어려운 자를 더 어렵게 하고, 형제의 도리를 행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 주님은 바벨론에게 임했던 그 심판한 동일한 심판을 하시겟다고 하십니다.

 

3. 이스라엘의 회복

 

그러면 에돔을 심판을 받는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됩니까? 어려움을 모른척 하는 자들이 심판을 받고, 어려움을 당한 자들은 그냥 못본척하시는 것입니까? 오바댜를 통해 주시는 교훈 마지막 교훈입니다. 이는 어려움을 당한 자들에 대한 위로와 약속입니다. 즉 어려움은 주님이 다 알고 계시고 다 갚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회복도 심판이 점진적으로 된 것처럼 점진적으로 되어 갑니다. 15-16절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한 나라들이 멸망할 것입니다. 17-18절은 에돔을 정복할 것입니다. 19-21절은 열국을 정복하고 다스릴 것입니다.

 

시온산이 회복되고, 에서의 산을 얻으며, 얻고 난 뒤에는 땅을 분배합니다. 다른 지역에 살다가 사로잡혀 간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속한 사르밧까지 나누게 되고, 예루살렘에 살다가 잡혀간 사람들은 남방의 성읍을 분배받게 될 것까지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자에게 주시는 격려이며 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지금은 황폐한 곳이지만 시온을 다시 돌려주실 것이며, 옛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다시 확인을 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이런 회복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통치로, 이스라엘이 지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에돔에게 원수 갚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는 여호와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한 학자는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구절이라고, 이것이 바로 의로운 하나님의 지배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구절이라고. 하나님께서 결국 원하시는 것은 의의 나라, 사랑과 긍휼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결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온 산에 오를 자가 되어야 합니다. 17절. “오직 시온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21절.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의 의 통치가 있을때 나아갈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성경은 남은 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붙들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남은 자. 어려움 가운데서, 바벨론의 문화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고 기다린 자들.

 

어떻게 남은 자로 살수 있을까요? 1절 오바다가 받은 묵시라. 묵시를 비전을 보는 것입니다. 심판의 주님을 보시고, 형제 자매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보시고, 그리고 주님의 약속과 승리를 보신다면 방자이 행하지 않고 남은 자로 살아 시온산에 오르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될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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