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17장 17- 24
이제야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허창수 목사 4.10.12 2
동성교회 [창원시] https://https://cafe.daum.net/huhcs48/
우리가 생각하기로 죄라고 생각되지 않은 것들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큰 죄로 여기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는 죄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그것 때문에 재앙을 받게 되고 망하게 되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큰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르밧의 과부는 남편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죽었고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장성한 아들이라면 어머니를 부양할 수 있겠지만 ‘아이를 그 여인의 품에 안았다’는 말씀을 보아 아직 어린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19). 사르밧 과부는 다시 시집을 갈 수 있는 젊은 여자였지만 아들 때문에 시집을 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이 죽고 어린 아들을 키운다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이 생활이 어렵습니다. 벌어다 주는 남편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하지만 아이 때문에 일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돈도 제대로 벌수 없습니다. 그래서 과부는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한 번 구워먹고 아들과 함께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자기들도 먹을 것이 없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서 그 집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9). ‘개역개정판’에는 ‘음식을 주어’란 말을 개역판 성경에는 ‘공궤’라고 하였습니다.
개역판 성경에 ‘공궤’라는 말이 세 곳에 있습니다. 사도행전6:2에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에 ‘접대’를 개역판 성경에는 ‘공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이 ‘공궤’하는 일로 말씀 전하는 일이 소홀해지므로 집사를 뽑아 ‘공궤’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은 25:37에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나이까’라는 말씀에서 개역판 성경에는 ‘우리가 언제 공궤하였나이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9절에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주어’란 말을 개역 성경에는 ‘공궤’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25장에 악인들은 ‘공양’을 했으며(44). 의인들은 ‘공궤’를 하였다고 했습니다. ‘공궤’와 ‘공양’은 다 같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같은 것이지만 의미는 다릅니다. ‘공궤’는 의인이 하는 것이고 ‘공양’은 악인이 하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이방인이지만 엘리야에게 ‘공궤’하였다 것은 의인으로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내게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호와가 비가 내리는 날까지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과부는 이 말을 듣고 떡을 구워서 엘리야에게 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공양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많은 설교자들이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먼저 대접하므로 축복을 받게 되었다고 공양적으로 설교를 합니다. 만약 ‘공궤’라는 말씀이 없었다면 ‘공양’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분명히 ‘공양’이 아니라 ‘공궤’를 하였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과부가 엘리야에게 ‘공양’을 하였다면 가루통에 가루도, 기름병에 기름도 마르지 않는 축복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공양’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 공염불이 되지만 ‘공궤’는 기적적인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공궤’를 하므로 비가 내리는 날까지 먹을 수 있는 기적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죽었지만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계속 떡을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져 죽었습니다. 과부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과부에게 아들은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갑자기 병들어 죽었으니 낙담할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부는 엘리야에게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라고 원망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내 죄를 생각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과부가 생각한 죄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는 과부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죄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아들이 죽음으로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내가 생각하기는 죄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재앙을 당하고 보니 그것이 하나님 앞에 큰 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과부가 생각한 죄는 무엇입니까? 18절에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라는 말씀과 24절에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는 말씀에서 과부가 생각한 죄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과부가 계명을 범하거나 도덕적인 죄를 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과부는 어머니인 자신의 죄로 인하여 아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아들이 죽을 만큼의 어머니의 죄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과 엘리야의 입에 있는 말씀이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어머니의 죄라는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엘리야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사르밧의 과부의 집은 교회입니다. 엘리야는 목사요 과부는 성도로서 작은 교회입니다. 엘리야는 과부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였고 과부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들 때문에 말씀을 잘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열심히 말씀을 전하는 데 과부는 아들과 눈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말씀의 진실함을 조금도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 시간에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 아이 때문에 말씀을 잘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가르치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돌아가게 됩니다. 어떤 성도는 설교 시간에 다른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말씀의 진실함을 알지 못하기도 합니다. 말씀의 진실함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과부의 아들과 같은 존재입니다. 예배시간에 사업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과부의 아들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말씀의 진실함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여러분의 아들입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고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목사는 열심히 설교를 하는데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말씀을 듣지 못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졸음이 와서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을 죄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며 말씀을 버리는 것으로 무서운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부에게 아들은 우상이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하는 존재는 우상들입니다. 과부는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지만 아들 때문에 말씀의 진실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므로 가뭄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죽어가지만 과부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로부터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 들으며 성도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믿음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 때문에 말씀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도는 매일 같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야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자연히 믿음은 떨어지게 됩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로부터 3년을 말씀을 들었지만 엘리야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믿음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라고 기도했습니다(20). 엘리야는 하나님이 과부에게 내린 재앙으로 아들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라고 해서 구원받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택함 받은 자는 말씀을 듣고 진리를 깨닫고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택함을 받았다고 말씀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에서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의 반열에서 빼버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통해서 죄를 생각나게 해서 회개하도록 해서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암으로 죽을 정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사업이 망하고 잿더미에 앉아서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통회 자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비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신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면서 자신의 죄를 스스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아들의 죽음으로 자신의 죄가 생각났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은혜롭게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만으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기다리십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죄가 생각이 나서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기다림도 한계가 있습니다.
과부에게 아들은 세상적으로 가장 귀중한 존재입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과부의 모든 기대와 소망을 송두리째 빼앗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도 가장 귀중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예배드리는 것도 빠지고, 그것 때문에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말씀이 진실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과부의 아들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병들어 죽게 하고 망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엘리야는 과부의 품에 안고 있는 죽은 아들을 달라고 하여 받아 안고 다락으로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21).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아이는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아이를 그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볼 수 있습니다. 과부의 아들의 죽음은 어머니의 죄를 대신한 죽음이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나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죄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를 대속하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죄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을 부활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 부활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살아남으로 과부는 실망과 좌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으로 믿음이 성숙해 졌습니다. 과부는 엘리야에게 고백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24).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과부는 이제야 진실한 성도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성도다운 성도가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가르쳐 주는 말씀이 여호와의 진실한 말씀인줄을 이제야 비로서 알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입에 있는 말씀이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고백입니다. 지금까지는 엘리야의 가르치는 말씀이 엘리야의 지식으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제야 엘리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여호와의 진실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완전한 신앙고백이였습니다.
택함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죄를 가지고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재앙이 내리기 전에 속히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알고 고백하는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원하옵는 것은 동성교회 성도 여러분은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함을 알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구약 -------------------- > 열왕기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상 17장 1-16절(순종이 우리의 능력과 힘입니다) - 김창진 (0) | 2023.06.29 |
---|---|
왕상 17장 1-7절(하늘을 닫고 여는 사람) - 문기태 (0) | 2023.06.26 |
왕상 18장 41-46절(엘리야의 기도) - 김창진 (0) | 2023.06.16 |
왕상 18장 41-46절(작은 구름 한 조각) - 안효관 (0) | 2023.05.31 |
왕상 19장 1-18절(영적 침체를 극복합시다) - 문기태 (0) | 2023.05.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