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18장 41-46
작은 구름 한 조각
안효관 목사 2015-06-07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소련에 진주했던 많은 독일 군인들이 전쟁이 끝난 이후 시베리아로 끌려가 비밀리에 중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40년이 지났을 때 독일의 민간단체가 주동이 되어 시베리아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던 군인 포로들을 구출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40여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그리고 추운 시베리아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보니 대부분의 포로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구출하고 난 후에 발견한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옛날 전쟁터에서 나올 때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선물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보잘 것이 없는 작은 물건일지라도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그것을 보면서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고, 그 희망이 그들로 하여금 혹독한 세월의 시련을 이겨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독일 출신으로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했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우리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는 말로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 언어인 헬라어로 인간을 뜻하는 단어가 ‘안드로포스’(ανδροπος)인데, 이 말 속에는 ‘위를 쳐다보고 걷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위를 쳐다본다는 것은 종교성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희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커다란 문제가 우리 앞을 가로 막을 수도 있고,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의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좀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 말입니다. 그런 희망과 기대 때문에 오늘이 힘들고 어려워도 참아냅니다.
만일 이런 내일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가 없다면 그 사람에게는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넉넉하고 지금 만족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이라는 시간을 마음껏 즐길 것입니다. 그저 오늘로 만족하기 때문에 내일을 위해서 뭔가를 계획하거나 내일을 위해서 오늘의 것을 남겨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쾌락에 빠져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삽니다. 죄를 짓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자기 몸이 상하고 망가지는 것도 괘념치 않습니다. 그저 오늘 하루 - 지금 이 순간이 즐거우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반면 너무너무 힘든 상황에서 내일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를 잃어버렸다면 그런 사람은 자기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은 우리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 희망을 하나님께 두고 살기에 삶에 어려움이 닥쳐도 우리의 힘과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희망을 안고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그 희망이 하나님께 있고, 그 희망의 끈을 든든히 붙잡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땅에는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처럼 저수 시설이 잘 되어 있거나 지하 깊은 곳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는 기술이 발달된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가뭄이 든다는 것은 곧 엄청난 고통의 시간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땅에는 때에 맞는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자주 표현되는 말이 ‘이른 비와 늦은 비’입니다.
이 ‘이른 비와 늦은 비’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지역의 날씨의 변화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를 ‘지중해성 기후’라고 말합니다.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은 건기와 우기가 명확하게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은 1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가 우기입니다. 비가 많이 오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5월부터 10월까지는 건기입니다. 비가 거의 오지 않습니다.
그런 기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비가 오기 시작하는 11월 경에 밭에 씨를 뿌립니다. 오랜 건기에 땅이 바짝 말랐다가 우기가 시작되면서 비가 내리면 굳었던 땅이 부드러워지고, 그러면 거기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 때 - 씨를 뿌리는 시기에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기 동안에 곡식들이 자라고, 봄이 되면 추수를 하게 됩니다. 건기가 시작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풍족하게 내리는 비를 ‘늦은 비’라고 합니다. 이 늦은 비가 내려야 곡식에 알곡들이 풍성하게 맺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늦은 비’는 봄에 꽃을 피워 가을에 열매를 거두는 과수나무에게는 과일을 많이 맺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에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아주 중요합니다. 비가 와야 할 때 비가 오지 않으면 곡식이나 과일들을 추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야 시대에는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건기에 약 6개월 동안만 비가 오지 않아도 온 대지가 바짝 말라버리는데,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 기간 중에 농사는 하나도 짓지 못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과일나무에도 과일에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뭄으로 인해 극심한 흉년을 겪어야 했고,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이 없어 온 백성들이 고통 가운데 살아야 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에서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르밧으로 갔을 때 과부 한 사람이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과부에게 엘리야가 ‘물을 한 그릇만 좀 얻어 마실 수 있느냐?’고 묻고는, 물을 가지러 가는 여인에게 ‘떡도 좀 있으면 한 조각만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과부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내게는 떡이 없습니다. 내게 남아 있는 것이라곤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뿐입니다. 지금 내가 나뭇가지를 줍는 것은 그것으로 내 아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떡을 해 먹고 죽기를 기다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가뭄으로 인해 먹을 것이 없자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해서 먹고, 그 다음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 당연히 굶어 죽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으로 떡을 먹고 죽으려 한 그 때가 가뭄이 시작된 지 1년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불과 한 해만 가뭄이 들어도 그렇게 굶어죽게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3년 6개월 동안이나 가뭄이 지속되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지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을까? 우리가 어려움을 겪으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도 그렇게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열왕기상 18:16절 이하에서 그 이유를 가르쳐줍니다. 가뭄이 든 지 3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아합 왕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 앞에 나타나자 아합이 엘리야를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이 말은 3년이 넘도록 가뭄이 들어 온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엘리야 너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아합 왕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합 왕은 왕비 이세벨의 꼬드김으로 인해 바알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바알은 농사의 신이고 풍요의 신입니다. 그래서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바알신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온 백성들에게 바알을 섬기게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끝까지 바알을 섬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깁니다. 아합 왕 생각에은 농사의 신이요 풍요의 신인 바알을 섬기지 않은 엘리야 때문에 바알 신이 노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가뭄이 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8절에서 엘리야가 대답한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 때문에 오랫동안 가뭄이 든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는 아합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이 땅에 오랫동안 가뭄이 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누가 진짜 신이지 알아보자고 제안을 하게 되었고,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대결하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하늘에게 불을 내리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거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말했고, 그제서야 진짜 신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 선지자를 모조리 죽이고 맙니다.
갈멜산에서 승리를 거둔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에게 ‘올라가서 먹고 마시라’고 말합니다. 곧 큰 비가 와서 오랜 가뭄이 끝나게 될테니 가뭄에 대한 걱정은 내려놓고 마음껏 음식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대결할 때 거기에 아합 왕이 와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합 왕 역시 어떤 신이 참 신인지 분명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를 갈멜산으로 부를 때 아합 왕도 거기에 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결이 끝나자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이제 마음 놓고 먹고 마셔도 된다고 알려준 것입니다.
아합 왕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자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42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엘리야 선지자는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습니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하는 이런 자세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 번째는 기도의 간절함을 뜻합니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는 것은 무릎을 꿇고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깊이 넣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고, 얼굴을 깊이 묻었다는 것은 겸손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지금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한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그 땅에 비를 내리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8:1절에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아합 왕을 만나러 가라는 명령을 주시면서 ‘내가 지면에 비를 내려주마’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인 것입니다. 이제 그 땅에 우상을 섬기게 만든 우두머리들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복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약속하신대로 이 땅에 비려 내려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 것입니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다는 것은 다른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오로지 기도의 깊은 경지에 이르는 기도를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넣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귀도 막아집니다. 그렇게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잡고 약속하신 바를 이루어주실 것을 간곡하게 기도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깊은 기도의 경지에 이르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면서 사환에게 바다 쪽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다는 이스라엘 서쪽에 위치해 있는 지중해를 말합니다. 지중해 바다를 관찰하고 온 사환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자, 엘리야는 일곱 번까지 가라고 합니다. 일곱 번이라는 말은 끝까지라는 뜻입니다. 바다 쪽에서 뭔가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비를 내리실 확실한 징조가 보일 때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일곱 번이나 지중해 바다를 보고 온 사환으로부터 드디어 바다 쪽에서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하나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 44절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라는 말은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라고 번역해야 우리 표현에 훨씬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이 됩니다.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하나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엘리야는 사환을 아합 왕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빨리 갈멜산을 떠나 왕궁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갈멜산 아래에는 기손이라는 시내가 있습니다. 곧 큰 비가 오면 기손 시내에는 건넬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에게 ‘이제 곧 큰 비가 올 것이니 기손 시내에 물이 넘쳐 건너지 못할 상황이 되기 전에 빨리 시내를 건너 왕궁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중해 바다에는 겨우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 하나가 생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게 엄청나게 큰 비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합 왕에게 빨리 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그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 하나가 큰 비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것도 기손이라는 시내에 물이 가득하여 사람이 건널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3년 6개월 동안이나 계속되던 가뭄을 끝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비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 하나가 그렇게 큰 비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여러분,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아합 왕을 만나러 가라’고 말씀하실 때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신다고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그것을 경험으로 알았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으면서 시냇물을 마시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릿 시내가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시냇물을 마시면서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며 지냅니다. 가뭄이 계속되어 시냇물이 마를 때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심을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시내가 마를 때까지도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으면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겠다고 하시더니 정말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가뭄으로 인한 흉년이 지속되는 때에 까마귀가 어디에서 떡과 고기를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사람도 먹고 살기 힘든 시기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한 번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대로 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체험한 엘리야 선지자는 ‘내가 지면에 비를 내리리라.’는 그 약속도 믿었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신다면 단번에 3년 6개월 동안 지속된 가뭄을 끝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비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합 왕에게 ‘큰 비가 와서 시내를 건너지 못할 상황이 곧 올 것이니 마차를 타고 빨리 왕궁으로 돌아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은 하늘을 캄캄하게 덮을 정도로 큰 구름이 되어 많은 비를 내리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당신의 뜻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고 산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상황이 언젠가는 좋아지리라는 것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지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망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죽이고 난 후에 큰 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엘리야 자신에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제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3년 6개월 동안이나 오지 않던 비가 갑자기 많이 내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가진 희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지면에 비를 내리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희망을 걸었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그 땅에 비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단순히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 한 조각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구름 한 조각에서 큰 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면에 큰 비를 내리실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희망이고 그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힘들고 낙심될 때 다시 일어설 용기가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믿음을 통해서 희망을 보는 자가 그 용기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삶과 행동이 다릅니다. 모두가 낙심되어 절망하고 있을 때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하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주변이 모두 캄캄한 밤과 같을지라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밝은 햇빛이 비치는 아침이 온다는 것을 알기에 아침을 준비하며 삽니다. 모두가 체념한 채 하루하루 의미 없이 살아갈 때 희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작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며 삽니다. 비록 그 희망이 이루어질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여러분, 에이미 멀린스(Aimee Mullins, 1976-)라는 사람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사진) 그녀는 선천적으로 종아리뼈가 없는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불과 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두 다리 모두 무릎 아래를 절단해야 했고, 그 이후로 의족을 끼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미국 워싱턴에 있는 조지타운대학에 입학한 뒤에 1996년 장애인 올림픽에 100m 달리기와 멀리뛰기 선수로 출전하게 됩니다. 비록 메달을 따진 못했지만, 그 이후 그녀의 도전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패션모델과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고, 최근에는 강연을 통해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희망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1년에는 피플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50인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전에서 장애(disabled)라는 말을 찾아본 적이 있어요. ‘불구의, 쓸모없는, 망가진, 약한’ 같은 부정적이고 패배감이 묻어나는 단어였죠. 난 장애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장애는 장애물이 아니라 능력을 일깨우고 끊임없이 나를 갈고 닦을 수 있도록 자극하는 기회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힘든 역경이 닥쳐올 때 우리는 너무 많은 핑계와 벽을 세우며 스스로 장애를 만들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그녀는 분명 두 다리를 모두 절단하고 의족에 의지해 살아야 하는 장애인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스스로를 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없어진 두 다리보다도 아직도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남아 있는 것으로 그는 많은 일에 도전하며, 다른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일깨우며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진짜 장애는 육체적인 결함이 아니라 장애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패배감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혹 나는 신앙의 장애인으로 살고 있진 않는지 생각해 보십시다. 신앙의 장애인이란 내 삶의 형편이나 환경이나 나 자신의 여건이 불만족스럽다는 것 때문에 희망을 잃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에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 하나만 있어도, 아니 작은 구름이 하나도 보이진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다는 것을 믿고 산다면 우리는 결코 희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네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립보서 4:13)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진짜 신앙인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진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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