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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열왕기상

왕상 17장 1-16절(순종이 우리의 능력과 힘입니다) - 김창진

by Preacher 2023.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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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7장 1-16

순종이 우리의 능력과 힘입니다

김창진 목사 2017.3. 9.

https://https://blog.naver.com/hinsem/

 

●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의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말을 할 수 있지만, 아마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돈이 곧 힘이고, 권력이고, 능력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돈 자체에는 힘이 없지만, 교환 수단으로 사용되므로 돈이 많으면 힘이 센 것처럼 보입니다. 돈이 많으면 능력 있는 것처럼 보이고, 돈이 많으면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모으고, 가지려고 혈안이 되고, 때론 돈 때문에 사람을 속이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돈은 사람이 만듭니다. 사람이 만들고는 그 돈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최영장군이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하셨는지 모릅니다. 성경도 말씀하기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13:5a) 고 하십니다.

 

▶ 그럼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힘일까요? 우리에게는 어느 때 힘이 솟고, 능력이 나타나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요? 믿음이 들어날 때입니다. 그럼 어느 때 믿음이 들어납니까? 말씀에 순종할 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은 “순종”입니다. 그 순종에 대해서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 보고자 합니다.

 

● 엘리야 선지자

 

엘리야는 “길르앗에 사는 디셉 출신”(왕상17:1)으로 아합 왕 때 선지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엘리야가 선지자로서 제일 한 일은 아합 왕에게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왕상17:1)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 왕이 어떤 왕인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입니다. 열왕기상16: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왕에게 가서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선포한다는 것은 자신을 죽여 달라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비”라고 하는 것은 생명과 직결된 것입니다. 비가 없다는 것은 하늘의 저주를 의미합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물이 넉넉하지 않은 메마른 지역으로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헐몬 산에서 오는 새벽이슬로 대부분의 농작물을 키웁니다. 그런데 그 이슬조차도 없다는 것은 “죽으라.”고 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엘리야의 첫 번째 사역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 아합 왕에게 죽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요단강 앞에 있는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왕상17:2-3)고 하십니다.

 

왜요? 그 만큼 엘리야의 첫 번째 사역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말씀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아합 왕에게 가서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없을 것’이란 말씀을 선포하고,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그릿 시냇가에 숨어 지내며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으로 끼니를 때우고, 시냇물을 마시므로 3년 6개월(왕상18:1, 눅4:25, 약5:17)의 가뭄은 시작됩니다.

 

▶ 이런 엘리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엘리야는 위대한 선지자이고,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이기에 그런 일에도 두려움이나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5:17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라고 말씀합니다. ‘성정이 같다’는 말씀은 신적본성(神的本性)과는 구별되는 모든 인간적인 본성을 말하는데, 엘리야 선지자도 우리와 동일한 본성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우리와 차이가 없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에게 가서 저주를 선포하는데 두려움이나 무서움이 조금도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엘리야가 비와 이슬이 없음을 아합 왕에게 선포하고 두려워 할 때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요단 강 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왕상17:3)고 하십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어 지낼 때, 아침저녁으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 갑니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요? 외롭고, 처량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했는데, 지금 내 처지가 이게 뭔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자신이 선포한대로 비도 오지 않고, 시냇가의 물은 말라갑니다. 조금씩 조여 오는 불안감이 엄습하지 않았을까요? 까마귀가 먹을 것을 물어다 주지만, 엘리야가 마음 편히 그것을 먹고 쉬었겠습니까? “이러다 굶어 죽는 건 아닌가? 언제까지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에 의지하며 보내야 할까?” 염려가 없었겠습니까?

 

▶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이 믿음이고,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31)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우리에게 능력이라는 것, 힘이라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하고, 내가 무언가를 이루고, 내가 무언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것에 우리가 쓰임을 받을 때 그것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그렇게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냈습니다. 그것이 엘리야의 능력입니다.

 

● 사르밧 과부

 

그렇게 이스라엘이 3년 6개월의 가뭄 속에 있을 때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본문 8-9절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시돈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시돈은 두로와 함께 종종 베니게로 불리는 이방나라의 도시이며, 아합 왕의 부인인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아합 왕보다 더 악하고 못된 인물이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물들이고, 아합 왕을 좌지우지 하는 사람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이란 저주를 선포하고 잠적해 버린 엘리야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켤 텐데, 하나님은 이세벨의 고향인 시돈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시돈의 사르밧이란 동네의 과부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그릿 시냇가에 숨어 지내며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것으로 연명하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시돈의 사르밧 과부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성경 속의 과부는 가난의 상징입니다. 도와줄 대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르밧 과부 집에 가서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과부를 통해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 그래서 찾아 갔는데 엘리야가 만난 과부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본문 12절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배부르게 실컷 먹고 죽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뭇가지 둘을 주워서 그것으로 불을 피워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할 만큼 가난한 과부입니다.

 

우리 옛말에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 하도 못 살아서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를 먹어 배고픔을 달래던 때가 있었습니다. 나무껍질이나 풀뿌리에 섬유질이 많아 심한 변비가 생기고,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볼 때에 항문이 찢어져 피가 날 정도로 못 살던 때를 말합니다. 사르밧 과부가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는 마지막으로 먹고 죽으려고 하는 음식을 자신에게 먼저 가져 오라고 합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가루 한 움큼 밖에 없는 가난한 과부, 그것도 마지막 음식을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하는 과부를 찾아가서, 그 마지막 음식을 달라고 엘리야를 보내시는 하나님도 너무 하신 것 같고, 또 그 말씀을 따라 과부를 찾아가 마지막으로 먹고 죽으려고 하는 그 음식을 내 놓으라고 하는 엘리야도 뻔뻔스러워 보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르밧과 같은 처지와 상황이라면 어떤 반응을 했겠습니까?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하고 화를 내겠습니까? 아니면 “네! 그렇게 하지요”라고 반응하시겠습니까?

 

▶ 사르밧 과부는 참 놀라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본문 15절 서두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아들과 함께 마지막 음식을 먹으려던 과부는 엘리야의 요구대로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엘리야를 대접합니다. 그것으로 먹을 것이 더 이상 없을 것 같던 과부의 집에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을 뿐만 아니라. 비가 오지 않는 3년 6개월 동안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본문17:15-16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사르밧 과부는 그렇게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냈습니다. 그것이 사르밧 과부가 보여주는 순종의 능력과 힘입니다.

 

● 순종의 능력

 

이러한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능력입니다. 힘입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할 때마다 그대로 순종합니다. 아합에게 가라 하실 때 아합에게 가고, 그릿 시냇가로 가라 하실 때에 그릿 시냇가로 갔고, 사르밧 과부에게 가라 하실 때에 사르밧 과부에게 갔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어떻습니까? 15절a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16절a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그대로 됩니다. 이것이 순종의 능력입니다.

 

▶ 순종은 내가 있을 때, 내가 풍족할 때, 내가 여유로울 때, 내가 시간이 있을 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내일이나 미래에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순종은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15:22)

 

▶ 엘리야가 보여 준 순종의 모습, 사르밧 과부가 보여준 순종의 모습을 보시면서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배우므로 깨달은 대로 순종하시여,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나는 귀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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