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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복음

요 15장 7-11절(주님 안에 거하면) - 안효관

by Preacher 2023.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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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5장 7-11

주님 안에 거하면

안효관 목사 2020-11-15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196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John Ernst Steinbeck, 1902-1968)이 쓴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사진)

 

1939년에 발표했고, 이듬해인 1940년 그에게 퓰리처상을 안긴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입니다. 『분노의 포도』는 193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산업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 유래 없는 번영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그런데 번영의 기쁨도 잠시일 뿐, 1929년에 시작된 경제대공황을 겪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지독한 가뭄까지 겹치면서 강한 바람에 흙이 ‘먼지 눈보라’가 되어 태양을 가릴 정도로 혹독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농경지가 황폐화되어 농부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그런 극도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 소설은 시작됩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톰 조드(Tom Joad)는 살인죄로 복역하다 가석방 되어 집으로 돌아오던 중 어렸을 적 알았던 짐 케이시(Jim Casey) 목사를 만나 함께 집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톰의 가족들은 오랜 가뭄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하다가 결국 빚을 지게 되고, 은행에 농장의 소유권을 빼앗긴 채 오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습니다. 미서부 캘리포니아에서 일자리를 구한다는 전단지를 보고 톰의 가족 12명은 케이시 목사와 함께 낡은 트럭에 가재도구를 싣고 66번 국도를 따라 캘리포니아로 떠납니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하기 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톰의 형과 여동생의 남편이 사라져버리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캘리포니아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희망과 풍요가 아니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대지주들과 자본가들은 전국에서 몰려든 25만 명이나 되는 농부들에게 더 낮은 임금을 주기 위해서 담합을 합니다. 임금의 절반만 받고서도 굶어죽지 않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난한 농부들은 끊임없이 착취를 당합니다. 그렇게 가난한 농부들은 착취를 당하며 가난에 헐떡이는데도 대지주들은 좀 더 돈을 벌겠다고 오렌지를 불태우고, 돼지를 생매장하고, 감자를 강에 버려버립니다. 농사를 지어 풍요로운 결실을 얻게 되면 모두가 기뻐해야 하는데, 농부들은 결코 기뻐할 수 없습니다. 적은 임금에 죽도록 노동을 하고서도 오렌지 하나 자기들이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캘리포니아의 그 드넓은 땅에, 쾌적한 기후와 기름진 땅에서 포도가 탐스럽게 익어가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농부들의 마음에는 그것이 풍요에 대한 기쁨의 포도가 아니라 분노의 포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노동력의 착취와 가난에 반발해 노동자들은 조합을 결성하려 하지만, 대지주들은 사람들을 고용해 조합을 결성하지 못하도록 폭력으로 방해합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조합결성을 이끌던 케이시 목사가 대지주들이 고용한 사람들에 의해 삽에 맞아 숨지면서 주인공 톰이 그 사건과 연류되어 숨어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임신했던 톰의 여동생 로자샨(Rosasharn)은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 아이를 사산하고 맙니다. 설상가상으로 가족들이 머물고 있던 캠프는 홍수로 인해서 집이 다 잠기게 되고, 가족들은 급하게 다른 사람의 농장 헛간으로 몸을 피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또 다른 굶어 죽어가는 사람과 마주하게 됩니다. 아이를 사산한 로자샨은 말라비틀어진 그 낯선 남자의 입에 자신의 젖을 물리며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이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이 소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참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만났을 때 얼마나 비극적일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대지주들과 자본가들은 가격의 폭락을 막기 위해 돼지를 산 채로 땅에 묻어버리고, 오렌지를 배고픈 농부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불에 태워버립니다. 이런 시장과 자본주의의 비극에 맞서는 것이 연대입니다. 노동자들이 연대해서 지나치게 낮은 임금을 주려는 지주들과 맞서 노동자의 권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 짐 케이시 목사이고, 케이시 목사의 의중에 동의했던 주인공 톰 조드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 가운데 하나는 그런 연대를 통해서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소설 속에 흐르는 또 하나의 맥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유대입니다. 짐 케이시에서 톰 조드로 연결되는 것이 연대라고 한다면, 어머니와 딸 로자샨으로 연결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유대입니다. 혼돈과 불안과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사랑으로 위기에 처한 가족의 중심을 잡고, 가족이 와해되지 않도록 하나로 지탱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들에게 먹일 것이 부족한데도 배고픔에 수프를 끓이는 냄새를 맡고 몰려든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남겨 아이들에게 먹입니다. 그 유대의 결정체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자신의 아이를 사산한 로자샨은 어머니와 함께 헛간에서 굶주림에 죽어가는 낯선 남자에게 자신의 젖을 먹이며 신비로운 미소를 짓습니다. 낮선 남자에게 젊은 부인이 자신의 젖을 물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서 로자샨은 어머니의 눈짓에 기꺼이 자신의 젖을 내어놓습니다.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연결고리인 유대였던 것입니다. 이 소설은 짐 케이시 목사와 톰 조지의 만남으로 시작합니다. 즉 연대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은 어머니와 로자샨이 낯선 남자에게 젖을 먹이는 사랑의 유대로 끝을 맺습니다.

 

연대와 유대. 결코 우리에게 낯선 단어는 아닙니다. ‘연대’라는 것은 서로 다른 존재가 한 덩어리로 굳게 뭉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유대’라는 말은 서로 다른 존재가 연결된다는 것에서는 연대와 같지만, 그 안에서 다이나믹한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 두 단어가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과 연대가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5: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하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예수의 사람인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만일 이 관계인 연대가 깨어지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맙니다.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그 생명을 잃고 말라비틀어지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연대가 깨어지면 우리는 다시 죽음의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 연대를 통해서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요한복음 1:1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연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연대, 그리스도와의 연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유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 것이 연대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나님과 연대를 이룬 사람들은 그 안에서 그리스도와 사랑의 유대관계를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자녀답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누려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 교제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유대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사랑 안에 거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거한다’(μενω)는 말이 무려 10번이나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만도 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9절에서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합니다. 11절에서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거하여)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5장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꼽으라면 단연 이 ‘거한다’(μενω)는 단어입니다. 이 ‘거한다’(μενω)는 단어는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끊임없는 영적 사귐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우리가 관계맺음에 들어갔음을 의미합니다. 연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주님과 종으로, 스승과 제자로 관계맺음을 했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에 기쁨이 넘치고,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7절에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여 주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면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그렇게 많이 기도하는데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까? 때로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내게 대해서 무덤덤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비유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이야 결혼을 할 때 상단 기간 동안 교제의 시간을 갖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이 사람에게 내 인생을 맡겨도 되겠는가? 믿을만한 사람인가?’ 그런 것을 생각하고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선을 보고 몇 번 만난 이후 곧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통신수단도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중매쟁이의 말만 듣고 결혼을 한다거나, 부모님들끼리 혼인 약속을 하고서 당사자의 의견에 상관없이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결혼하여 부부가 되고 한 가정을 이루었다고 해서 부부가 서로를 온전히 신뢰한 상태는 아닙니다. 살아보면서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고, 삶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점점 친밀해집니다. 그렇게 친밀함을 통해서 서로 깊은 마음까지 나누고 신뢰할 수 있게 되면 남편은 부인에게 마음 놓고 모든 재산을 다 맡깁니다. 이제는 온전히 신뢰의 관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서로 깊은 신뢰의 관계가 되면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아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남편을 위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면 아내나 남편이 서로에게 ‘무언가를 좀 해 주면 좋겠다.’고 요구를 할 때 아무런 주저함 없이 그 요구를 들어줍니다. 서로를 알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 부부가 서로 신뢰가 쌓이지 않았을 때 아내나 남편이 서로에게 뭔가를 요구하면 망설이게 됩니다. 특별히 뭔가 큰 것을 해 달라고 요구하면 마음에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닐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나 사귐을 갖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모두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때, 우리는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고 그런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그것이 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친밀한 관계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으면 우리의 삶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하게 됩니다. 본문 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거하여)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살 때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살 때 어려움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기도 하고,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손해를 보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좁을 길을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 마음속에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모든 환경을 뛰어넘는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힘들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며 사는 성도들입니다. 예수님과 깊은 영적 교제 안에서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이 그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4)고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은 언제나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에도 기뻐하고, 손해 볼 때에도 기뻐하고, 내 생각과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도 기뻐하고, 내가 기대했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의 감정은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 내가 손해 볼 때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깊은 영적 교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워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임을 알기에 기뻐합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대로 이루어질 줄 알기에 기뻐합니다. 내가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선하신 주님께서 언젠가 내게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을 알기에 기뻐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깊은 영적 교제 가운데 사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깊은 영적 교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 11절의 말씀처럼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거하기 때문에 우리도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에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기도에 응답을 받고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면 그런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본문 8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요한복음 10:10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풍성히 누리는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단순히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시려고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생명의 풍성함은 단순한 그리스도와의 연대를 통해서가 아니라 깊은 사랑의 관계인 유대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요한계시록 3:2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연대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은 사랑의 유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의 유대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과 더욱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관계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의중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동산을 거니시며 아담과 하와와 함께 교제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에녹은 그의 평생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곧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등록을 하는 것은 이제 우리 교회 소속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등록을 함으로서 우리는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기쁨으로 교회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기쁘게 교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유대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남녀전도회를 통해서, 구역모임을 통해서,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연대한 성도들끼리 깊은 영적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생활을 하는 데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생활 중에서 성도의 교제가 아주 중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19로 인해서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비대면을 강조하고 있는 현실 앞에 서 있습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실시해왔던 아름다운 믿음의 교제가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의 현실이 우리의 교제를 제약한다 하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성도의 교제입니다. 어쩌면 ‘코로나 블루’라고 말하는 우울감에 시달리는 이유가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서 제한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서로 더욱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단념하지 말고, 더욱 예배에 집중하면서 예배를 통해서 영적 교제를 나누고, SNS나 기도를 통해서 더욱 친밀감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의 일원이 되는 연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더욱 깊은 영적 유대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 깊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음으로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에 응답받을 뿐만 아니라 기쁨 충만한 삶이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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