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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복음

요 15장 9-11절(기쁨이 충만한 삶을 위해) - 안효관

by Preacher 2023.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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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5장 9-11

기쁨이 충만한 삶을 위해

안효관 목사 2020-04-26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1983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의 ABC(American Broadcasting Company)라는 방송사에서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이후에 세상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서 방송한 일이 있었습니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수소폭탄이 터지고, 그 다음에는 방사선 때문에 온 세상이 쑥대밭이 되어 어디를 가나 방사선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음식물은 물론이거니와 마실 물조차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기후는 갑자기 추워지고, 그야말로 세상이 끝나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병원이란 병원은 다 오염되어 방사선에 맞아 죽어가는 환자로 만원이 되고, 심지어는 의사와 간호사들도 방사선에 노출되어 병을 치료해야 할 의료진들도 모두 환자가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느끼며 죽어갑니다. 어디를 가도 치료할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몇 시간 혹은 며칠을 더 사느냐 하는 것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정부에서 취할 방법은 방사선 환자들에게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약을 주는 것뿐입니다. 죽은 시체들이 도시에 즐비하고, 시체를 처리하던 사람도 방사선 때문에 죽어갑니다. 그야말로 세상 끝 날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런 방송 프로그램이 끝난 다음 시청자들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때 앵커였던 테드 코펠(Ted Koppel)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창문을 통해 보시면 아직도 좋은 세상이 밖에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니 어두운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참으로 좋은 세계가 아직도 밖에 있었다는 것을 느끼며 안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코로나19로 인해 전쟁터와도 같은 세상을 살면서 어떤 느낌을 받고 계십니까? 일상의 삶이 멈추고 우리는 거의 석 달 가까이 너무나도 위축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리고 지금 전 세계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막이 흐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라들마다 국경이 봉쇄되고, 어떤 나라에서는 사람들의 이동조차 제한했습니다. 공원에 산책 나오는 것도 막고, 집안에만 갇혀 살아야 하는 인간들 때문에 오히려 도시의 거리마다 짐승들의 놀이터가 된 곳들도 많아졌습니다. 심지어 공장들까지 멈춰서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오염으로 가득했던 지구촌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연이 정말 멋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데도 우리는 그 경치를 보며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습니다. 코로나라고 하는 작은 바이러스에 의해서 온 지구촌이 멈춰서면서 미국에서만도 2,400개의 일자리가 사라졌고, 지난 5주간 실업수당을 신청한 사람의 숫자가 무려 25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미국 전체 근로자 5명 중에 한 명이 이번 신종코로나로 인해서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1930년대 미국 경제대공황 때보다도 더 어렵다는 요즘, 우리나라라고 결코 예외는 아닙니다. 활동에 제약을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닥쳐올 경제위기는 지난 1997에 겪었던 IMF를 훨씬 뛰어넘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핵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느낌은 마치 핵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암울하기도 하고, 우리의 마음이 위축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코로나19의 확신이 많이 진정되고 있지만, 언젠가 또다시 제2차 확산이 재발할 수 있고 전 세계가 다시금 팬데믹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빨리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으면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제는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포스트코로나(코로나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에 많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앞으로도 그런 변화는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분명 우리의 상황은 너무나도 달라졌습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어내고 있는 지금도 이전과는 상황이 너무나도 많아 달라졌습니다만, 코로나19 사태가 끝난다 하더라도 그 변화는 계속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환경이 변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변할 수 없는 확실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상황이 변화되고 바뀌어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믿음을 붙잡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21세기가 될 때까지 우리 인류가 살아왔던 삶은 끊임없이 변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우리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변화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의 역사 가운데서 우리의 믿음은 여전히 그 중심에서 사람들을 지탱해 주었습니다. 어쩌면 시대가 빨리 변할수록 우리는 더욱 믿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가 표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따라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변화에 맞춰가는 노력도 분명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변화되는 상황에 뒤따라가려다 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잃기도 하고,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우리의 믿음은 변할 수 없고, 변해서도 안 됩니다. 세상이 변할수록 믿음을 더욱 붙잡아야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변치 않아야 할 믿음의 내용들이 참으로 많습니다만,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오늘 본문은 너무나도 많은 상황의 변화 속에 놓인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주님과 이별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대부분 자신들이 평생 가져왔던 직업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갈릴리 어부라는 직업을, 어떤 사람은 세리라는 직업을, 어떤 사람은 젊음이라는 시간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3년 동안 그들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하늘의 신비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신 복음을 듣기도 했고,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의 눈이 떠져서 앞을 보게 되는 기적이나 사람들로부터 부정한 사람이라고 취급받던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고침 받는 광경도 직접 보았습니다. 때로는 귀신들이 주님 앞에서 ‘당신이 왜 우리를 멸하러 왔느냐?’고 외치며 굴복하는 장면도 보았고, 귀신에게 사로잡혀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하던 사람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가 정신이 온전해지는 광경도 보았습니다. 때로는 어두운 밤 주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광경도 보았고, 때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의 현장에 있기도 했습니다.

 

3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는 시간 동안 주님의 제자로 주님을 따르면서 그들은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따르는 주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예루살렘에 올라오면서까지도 그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우리 민족을 회복시켜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 기대처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는 나귀를 타시고 개선장군처럼 들어가시는데, 수많은 무리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시기도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선동해서 뭔가 큰일을 도모하신다면 못하실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마음은 더욱 흥분으로 들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기대가 무너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곧 메시아로서 뭔가 큰일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자기들이 기대하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들이 기대하는 일이 벌어질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시더니 유월절 전날에는 저녁만찬을 준비하라고 하시고선, 그 만찬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내가 너희 곁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요한복음 14:2)고, ‘조금 있으면 세상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요한복음 14:19)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 곁을 떠나겠다고, 세상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불과 몇 시간이 지난 후에 제자들 주변에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잡수신 후에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게 잡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떼를 써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다음 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맙니다.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종려주일 아침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불과 닷새 만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만 것입니다. 불과 5일 전, 군중들의 환호성 속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에는 이 기세라면 예수님께서 못하실 일이 없으실 것만 같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헤롯의 정권을 뒤집어엎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랫동안 지배를 받아오던 로마로부터 조국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일도 해내실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불과 5일 후에 예수님은 가장 힘없는 사람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말았습니다.

 

너무나도 짧은 시간에 제자들에게는 엄청난 회오리가 불어닥친 것입니다. 정신 차릴 틈도,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볼 짬도 없이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상황이 변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와중에서 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3-16장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던 자리에서 주신 말씀들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은 조금 낯설게 들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떠나시고 난 다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지도 가르쳐주십니다. 10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방법이 뭐였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의 길을 가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사랑하신 사랑이나,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이나 오늘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모두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조건을 달지 않는 사랑, 자기 희생을 통해서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 아가페입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베푸시는 사랑, 목마르지 않게 풍성하게 베푸시는 사랑이 아가페입니다. 변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 그것이 아가페입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이신 예수님께 베풀어주셨고, 그 사랑 안에 거하셨던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그런 동일한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그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행할 때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 사랑이 베풀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산다면 그 사랑은 나와 무관한 것이 되고 맙니다. 마치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은 부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유산이 있는 줄도 모른 채 아버지 곁을 떠나 외톨이같이 방황하며 산다면 그에게 주어진 막대한 유산은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또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가페의 어마어마한 사랑을 베풀어주셨는데, 우리가 그 사랑을 외면하며 산다면 그 사랑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나는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그런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에 감사하며 산다면 우리는 그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언제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한결같이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바로 말씀 안에 거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주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따라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것을 삶으로 보여주는 바로 그 자리에서 최고로 아름답게 꽃피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날처럼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기억하며 그 사랑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1절)

 

주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오면서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종려주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고 주님을 맞을 때에도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고 계십니다. 주님은 아셨습니다. 당신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배신하고 종교지도자들에게 팔아넘길 것을 말입니다.(요한복음 13:11) 그러면 이제 오늘 밤을 넘기면 당신이 고통의 십자가를 지셔야 하고, 그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다. 그것도 우리 주님은 잘 아십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주님 안에서는 기쁨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고 싶으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앞에 두고서도 주님의 마음에 가득했던 그 기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할 때에 주어지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서 주어진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어내게 하는 기쁨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조차도 이겨낼 수 있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면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가지셨던 그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 그 사랑이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빌립보에서 아무런 죄도 없이, 아니 오히려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었다는 것 때문에 매질을 당하고 차꼬에 단단히 채워진 채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상황에서 기쁨의 찬송을 불렀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말년에 병으로 인해 약해진 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4)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가 채워졌을 때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기쁨은 우리의 상황을 초월하여 우리 안에서 샘솟듯 솟아오릅니다. 그것이 바로 기쁨이 충만한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도 기뻐하고, 아무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거나 매질을 당해도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의 힘입니다. 주님은 오늘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상황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앞으로 벌어질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몰라 두려운 상황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세상이 가질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바로 사랑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할 때, 그리고 우리 주님처럼 내가 받은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흘려보낼 때 그 사랑은 우리에게 충만해집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기쁨의 집’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집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이 열리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그 집에 들어가려 했으나 그 모든 노력이 허사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조언을 구하기 위해 한 신비가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우린 ‘기쁨의 집’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집을 발견했소. 하지만 갖은 수를 다 써도 문이 열리질 않습니다.” 신비가는 그들과 함께 ‘기쁨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그것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며 신비가에게 ‘기쁨의 집 문을 연 열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신비가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사용한 열쇠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쁨은 사랑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아니 사랑을 통해서 기쁨을 알게 되고, 사랑을 나누면서 기쁨을 맛보게 되고, 지속적인 사랑을 통해서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여러분, 어렵고 힘든 세상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우리가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바로 믿음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더 나아가 지금의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산다면 예수님께서 누리신 그 기쁨을 우리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믿음, 그 믿음 안에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세상을 둘러보면 온통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에게 근심만 안겨줄 뿐입니다. 그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우리가 가난한 자일지라도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을 나눔으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도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사실 모든 것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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