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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복음

요 15장 9-12절(기쁨이 충만합니까) - 문기태

by Preacher 2024.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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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5장 9-12

기쁨이 충만합니까

문기태 목사 2017.03.12

창원침례교회 http://whttp://www.changwon.or.kr/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신 첫 번째 주제가 제자들 안에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실 것을 내다 보신 예수님은 그 상황에서 '저들을 탁월한 설교자로 만드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저들로 뛰어난 전도자로 만드소서.' 라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여, 내 기쁨을 그들 안에 두셔서 그들이 기쁨이 충만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다른 많은 것을 제쳐두고 가장 먼저 제자들이 기쁨을 충만하게 가지도록 기도하셨을까요 제자들이 기쁨이 충만하게 되지 않으면 그들이 선포하는 메시지가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고난에 눌려 늘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면 누가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 반응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제자들이 죄로부터 자유를 얻고 항상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접하고 기쁨이 충만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마28:8에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 할새' 라고 되어있습니다. 무서움과 기쁨은 함께 하기 어려운 감정입니다. 여인들은 천사를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무서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천사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 뉴스를 듣고는 큰 기쁨이 밀려왔습니다. 무서움과 큰 기쁨의 감정을 동시에 겪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이 기쁨이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찬양하며 성전에 머물렀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시시한 세상 기쁨과 비교가 안될 정도인 큰 기쁨이 우리 마음에 늘 넘치기를 원하십니다. 실제 예수님은 오랫동안 극한 가난과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배신도 당하셨으나 항상 기쁨이 충만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을 보면 위트가 넘쳤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죄인들이, 그리고 창녀들이 모두 기쁨으로 밝게 빛나는 예수님의 얼굴이 없었다면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고 다가올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셨고, 당신 안에 있는 큰 기쁨을 제자들도 충분히 누리게 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안에 예수님처럼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수님과 좋은 관계로 발전시켜야 합니다.(9)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이것이 무엇입니까 9,10절에서 강조한 것은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어려운 나날을 맞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제자들을 지켜 볼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쁨을 가져다 주고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가 기쁨의 원천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사람을 향한 사랑이 솟아나도 기쁨이 가득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면 더 큰 기쁨을 안겨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집과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매를 맞는 고난을 겪었으나 낙심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온 몸으로 느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고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갈 때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시험과 시련이 와도 샘솟는 기쁨으로 인해 굴복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온 지역에 흩어져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에게 편지하여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라고 격려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기쁨을 잃어버리고 비참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면 틀림없이 예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세상의 즐거움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면 기쁨도 함께 사라지고 맙니다. 기쁨이 충만해지기 원하면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 생명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현재의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 큰 기쁨이 솟아납니다.

 

베드로 사도는 행3:19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할 때 참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에 비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유머와 위트는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주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고 웃음이 터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맛보는 기쁨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멜로디와 감미로운 가사로 이루어진 노래를 부르며 감동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임재 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은 그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시간을 보낼 때 행복하고 흥겹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가지고 예수님의 기쁨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잠시의 쾌락"을 줄 수 있지만, 주 예수께서는 충만하고 영원한 기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쾌락은 환경에 따라 좌우되지만 기쁨은 내적인 것이어서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쾌락은 항상 변하지만 기쁨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적인 즐거움 뒤에는 흔히 우울함이 따릅니다. 그러나 참된 기쁨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근거가 있습니다(히 13:8). 쾌락을 계속 유지하려면 우리는 쾌락을 주는 것들을 끝없이 찾아 다녀야 합니다. 왜냐하면 쾌락이란 사람의 손에 영원히 붙들려 있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이와 반대입니다.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선물입니다.

 

쾌락은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지만 기쁨은 자기 희생에서 출발합니다. 자기 만족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 공허하게 됩니다. 오늘 한 잔 분량의 쾌락으로 즐거울 수가 있다면 내일은 한 통 분량의 짜릿한 흥분이 있어야 즐거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희생하여 내어 주는 것에 기초를 둡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초점을 두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모두 채워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더 큰 만족을 얻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의 것을 구할 때에만 떠나지 않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측량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풍성하고 변치 않는 기쁨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로 가까이 나아갈 때 깊은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항상 첫 자리에 놓을 때 기쁨이 이어집니다.

 

온전한 기쁨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직접 대화를 나누며 사랑의 관계에 들어갈 때 맛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머물 때 그분의 기쁨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예수 안에 거하려면 그분과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합니다.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며 깊은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나무에서 잘려진 가지가 곧 시들고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서도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 들어가 매일매일 기쁨이 충만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사람들과 좋은 관계로 발전시켜야 합니다.(12)

 

예수님께서 수많은 계명들 중에 최고의 계명을 정의해 주십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기도 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신 구약 성경 전체를 녹여서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증명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한마디로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일관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은 사랑 대신에 힘을 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정, 직장, 사회생활 속에서 힘을 가지려 합니다. 힘이란 자신이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여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움직이려고 하고 뜻대로 안되면 화를 냅니다. 서로 힘을 과시하려고 하다 보니 자주 갈등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 사랑이 여러분들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사랑이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사랑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예수님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성도들간에도 사랑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실수나 허물에 대해서도 서로 이해하는 사랑으로 덮어준다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죄와 잘못한 것도 용서하는 사랑으로 덮어준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서로 불편한 관계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가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계명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우리 안에 예수님의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에 예수님의 기쁨이 깃듭니다. 미워하는 마음에는 기쁨도 사라집니다. 원망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에는 절대 기쁨이 함께 살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사랑을 가득 품어 사람들과 좋은 관계로 발전시키고 예수님께 사랑을 받으며 예수님의 기쁨이 머물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사회적으로 비난 받을 죄를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의도를 품지도 않았고 그런 행동을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 너무나 불쌍해서 고쳐주었습니다. 결국 그것이 빌미가 되어 누명을 쓰고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발은 차꼬에 든든히 채워졌습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찬송을 불렀습니다. 무슨 기적을 바라고 찬송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금까지 받은 은혜가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닫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간수가 달려와보니 감옥 문이 활짝 열리고 죄수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로 알고 책임추궁이 두려워 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큰 소리로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고 안심시키자 간수가 등을 들고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너무 놀라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하고 묻습니다. 바울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고 복음을 전하여 그와 온 가족이 믿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성경은 결말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큰 기쁨이 찾아온 것입니다. 바로 빌립보 교회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예전의 관점으로 자신들이 당한 일을 바라보면 도무지 기쁠 수가 없습니다. 섭섭하고 억울할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애매하게 고발한 사람들이 얼마나 밉겠습니까 심하게 매질을 한 관리들에게 복수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니 기쁨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박해를 받는 것은 영광된 일입니다. 가치 있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귀신들린 불행한 소녀를 악신으로부터 구해주고 대신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자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기뻐하며 기도와 찬양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웃음 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노만 카슨스 입니다. 그는 미국의 유명한 '토요 리뷰'의 편집인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러시아에 출장 갔다 오다가 희귀한 병인 '강직성 척수염'이라는 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이 병은 류머치스 관절염의 일종으로서, 뼈와 뼈 사이에 염증이 생기는 병으로 완치 율이 낮은 편이라고 합니다. 그는 나이 오십에 이 병으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원통하고 분했습니다. 그때 그는 서재에 있는 몬트리올 대학의 한수 셀 리가 지은 <삶의 스트레스>라는 책을 보게 되었답니다.

 

그는 책을 읽는 중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다.'라는 말에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아하, 가장 좋은 약은 마음의 즐거움에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나는 오늘부터 웃어야지, 즐겁게 살아야지'라고 다짐하고 계속 웃었다고 합니다. 계속 웃으니 아픈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어느 날부터 손가락 하나가 펴지게 되었답니다. "여보, 여보 이게 웬일이에요 당신 손가락이 펴지다니 이게 웬일이에요" 부인과 아이들은 감격해 울었답니다. 그때부터 같이 웃으면 더 잘 펴진다는 말을 듣고 온 집안 식구들이 웃기 시작했더니, 몸이 점점 호전되어 완전히 나아버렸다고 합니다. 노만 카슨스는 미국 UCLA대학교에서 75세까지 웃음과 건강연구를 위해서 일생을 바쳤답니다. 노만 카슨스는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저서 <질병의 해부>에서 '웃음은 방탄조끼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세균, 병균, 바이러스도 웃는 사람에게는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얼굴이 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귀신이 들어오려다 예수님의 기쁨으로 충만한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고 놀라 도망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귀신이 두려움이나 불안함을 가지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표정 관리가 어렵습니다. 넘쳐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는 언어, 표정, 눈동자, 얼굴을 가진 사람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외로움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거절하고 신경질을 내며 욕하고 소리 지르는데 곁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참 기쁨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은 어떤 죄도 용서하고 어떤 실수도 회복시켜 줍니다. 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원한 것입니다. 배가 고파도, 감옥에 들어가도, 병들어도, 모함과 배신을 당해도, 죽음을 맞아도 항상 쏟아나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인해 성도님들이 너무 웃어서 눈이 작아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에게 기쁨이 있을 때 모든 세포가 되살아납니다. 긴장하면 화장도 잘 먹지 않지만, 기쁨으로 충만하면 말도 부드러워지고 눈빛마저 다정해집니다. 예수님은 기쁨이 충만한 아름다운 생애를 사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기쁨이 충만해져 아름다운 영향, 행복의 영향을 온 세상에 끼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발전시켜 큰 기쁨이 늘 머물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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