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 --------------------/출애굽기

출 23장 9절(나그네의 사정을 알아 주라) - 안효관

by Preacher 2023. 8. 16.
728x90
반응형

출23장 9

나그네의 사정을 알아 주라

안효관 목사 2017-02-26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부산시 세대소통 프로젝트-노인의 마음’ 영상 <위 첨부화일을 클릭하시면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영상은 부산시가 지난 2월 3일에 유튜브와 SNS를 통해 공개한 ‘부산시 세대소통 프로젝트-노인의 마음’이란 제목의 영상입니다. 이 영상은 노년층 인구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고령사회인 부산에서 노인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세대 간 소통을 유도하기 위해 제작한 프로젝트 영상인데, 영상이 공개된 지 불과 3일만에 13만회 이상 재생될 정도로 폭발적인 관심을 이끌어내었습니다. 6분 37초 길이의 이 영상에서 20대 출연자는 80대 노인으로 특수 분장을 하고, 노인체험키트를 착용한 채 하루를 보냅니다. 그는 노인 되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다니면서 노인들이 겪는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기도 하고, 공원에 있는 어르신들이나 대학교 교정에서 젊은이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생각들을 들어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 영상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만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이기심이나 이기주의라는 말입니다. 이기심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거나 남의 이해는 돌아보지 않는 마음’을 말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하는 마음입니다. 이기주의라는 말도 비슷합니다. ‘다른 사람이나 사회 일반에 대해서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이나 행복만을 고집하는 사고방식’을 이기주의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그릇된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형편을 이해해 주어야 하고, 그래서 때로는 양보하고 손해 보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앞서 보았던 영상은 그런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소통과 공감이 잘 되지 않는 사회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다르다고 맹목적으로 비난하고, 자기와 다른 지역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인격모독과 비하하는 말을 서슴없이 쏟아내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은 나이 드신 분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나이 드신 분들은 젊은이들의 사정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핫한 이슈인 대통령 탄핵에 대한 문제에서도 그렇습니다. 탄핵 인용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가 마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단순히 자기주장을 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탄핵을 주장한다는 것 때문에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폭행을 당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고의 헌법기관인 헌법재판소에서조차 가히 상상하기도 힘든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지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너무나도 이기주의적인(집단 이기주의적인) 사회로 고착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런 이기주의적인 사회에 대해서 일침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그네’는 자기 땅이 아닌 다른 사람의 땅에 와서 거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짧은 여행을 위해서 잠깐 머물다가 가는 나그네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요즘 이주노동자들처럼 상당히 오랜 기간 다른 사람의 땅에 와서 살아야 하는 나그네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그런 나그네들은 언제나 설움을 경험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등 억울한 일을 많이 겪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만 집단 이기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떤 사회이고 집단 이기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은 사회일수록 그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적대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와 같이 세계화가 일상화되어 있는 글로벌한 시대에도 흔히 말하는 ‘이방인’에 대해서 수용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즘 유럽에서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인 난민의 문제가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입니다.

 

그럴진대,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의 사회에서는 이방인에 대해서 포용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사회적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주 엄격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도 400년 동안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었습니다. 자기들 땅이 아니라 이방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의 설움을 압니다. 나그네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삶인지를 압니다. 그 때 그들은 애굽 땅에서 죽도록 일했지만 결코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어떤 재산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노예 신분이었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해도 누군가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고, 하소연한다 한들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강제노동에 동원되어 날마다 피곤에 지칠 대로 일만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죽도록 일을 해도 배부르게 먹을 수 없었고, 심지어는 압제를 당하거나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도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노예의 죽음은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고 말았습니다. 언제 이 고통과 억압에서 해방될지 알지 못한 채 매일 고역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희망을 잃어버린 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고역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낯선 땅에 와서 나그네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잘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그 사정을 잘 알지 않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인도주의적인 이념 때문에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서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했던 지난 역사에 대한 깊은 반성에서 나오는 사랑의 마음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힘들었던 지난 세월을 빨리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지난 과거를 빨리 잊어야 더 좋은 내일을 희망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나그네를 볼 때마다 지난 날 애굽에서 나그네로 고통스럽게 살았던 그 날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지난 아픔처럼, 지금도 아픔을 겪고 있고 설움 속에 살아가고 있을 그 나그네의 심정을 알아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나그네를 만났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출애굽기 22:21절 이하에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한 율법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약자라고 하면 ‘고아, 과부, 가난한 자, 그리고 나그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회적인 약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고아는 자신의 삶에 울타리가 되어줄 부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과부 역시 남성 중심 사회였던 당시 환경에서 남편이라는 울타리가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돈이나 사회적인 권력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땅이 없어서 자기들 스스로 먹거리를 준비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보호해주고 도와줄 울타리가 없기 때문에 권력이나 돈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세상의 울타리가 없다는 것 대문에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기 때문에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그들을 학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과부들의 남편이 되어주시기 때문에 남편이 없다는 것 때문에 그들을 억울하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애굽 땅에서 압제를 당하고 고통당할 때 그들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나그네로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보호자이신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에 의해서 그런 압제와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가나안 땅에 가서 자유인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날 자신들이 억압받고 고통 받을 때 당했던 설움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때의 아픔을 잊고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그들을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그네의 사정은 알지 않느냐?’고 말씀하신 이유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내가 나그네로 살면서 압제를 당하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한 것처럼, 지근 내 앞에 있는 나그네도 억울한 일을 겪으면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그 마음과 그 눈물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압니다. 자신들도 눈물을 흘려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먼저 이해해 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이해하지 못할 상황은 없습니다. 이해하려 하지 않고 내 입장에서 내 생각으로 판단하려고 하니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거짓말을 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 때문에 굉장히 분노합니다. ‘어쩌면 저가 내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를 조금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가 왜 그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상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이해한다면 거짓말을 했다는 것 때문에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을 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먼저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낮은 자존감 때문이라고 한다면 자존감을 높여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신앙인답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들의 짧은 지식과 경험으로 남을 쉽게 판단해버립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해한다는 말의 영어 동사가 understand입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의 입장 아래서 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설 때 비로소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설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고, 그 상황에서 그가 왜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충분히 그럴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나그네가 되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2장에서는 조금 더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22:22절 이하에 보면, ‘과부와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고아와 과부를 괴롭힘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괴롭힌 그가 언젠가 그대로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힘없는 고아를 괴롭혔다면 네 자식을 고아로 만들어 네 자식이 그대로 당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과부를 억울하게 했다면 네 아내를 과부로 만들어 네 아내가 네가 한 그대로 억울함을 당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무섭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 등 힘없는 사람들을 결코 괴롭히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산상변모주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형되신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누가복음 9장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거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별세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신 이유는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실 것에 대해 마음을 다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그렇거니와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죄악으로 물든 우리 인간을 이해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우리를 구원하시고 싶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픈 우리 주님의 사랑의 마음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서 죽임 당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시지만 낮은 자리에 있는 우리를 공감하고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은 메시야이시면서도 낮고 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우리 주님이십니다.

 

소설가 이외수 씨가 쓴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이란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걸레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외형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면 비천하기 그지없지만 내면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면 숭고하기 그지없다. 걸레는 다른 사물에 묻어있는 더러움을 닦아내기 위하여 자신의 살을 헐어내야 한다. 이해란 그대 자신이 걸레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참 멋진 말입니다. 우리가 외형적으로 보면 걸레는 가장 천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걸레는 다른 것의 더러움을 닦아내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합니다. 그래서 걸레는 가장 숭고한 가치를 가진 존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걸레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도 닦아주고, 다른 사람의 고통도 닦아 주는 걸레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나그네와 같이 억압받고 설움당하는 이웃을 내 마음으로 품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숭고한 믿음을 가진 신앙인의 삶입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