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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학개

학 2장 1-5절(성전재건과 하나님의 위로) - 윤석준

by Preacher 2024.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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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2장 1-5

성전재건과 하나님의 위로

윤석준 목사 2015년 9월 27일

유은교회 [부산시, 하단동] http://cafe.daum.net/sola-gratia/

 

성경봉독 : 레23:33-43; 딤전1:14-17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113편 1,2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81-2편 1,3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130편 1,2,4

설교 후 찬송 - 시89편 1,2

성찬식 찬송 - 시103편 1,4

폐회찬송 - 시97편 1,4,5

 

우리가 앞의 설교에서도 몇 번 날짜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있지만, 학개를 읽으실 때 학개를 몇 문단으로 구분을 해서 읽으시려면 가장 좋은 방법이 날짜를 따라 읽는 것입니다. 학개서는 전체가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에게 계시하신 것을 차례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쓰여 있는데, 이것이 날짜별로 잘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정리를 한 번 해봅시다.

 

1) 1:1 - 다리오 왕 2년 6월 1일, 처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때입니다. 나태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이 계시의 내용이었습니다.

2) 1:15 - 2년 6월 24일, 여기까지 설교를 들었는데, 말씀이 임한 후 약 20여일이 지난 때입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이때까지의 삶을 청산하기로 결정을 하고 성전 건축에 들어가게 됩니다.

3) 2:1 - 그리고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것이 2장 1절에 나오는데, 이 때의 날짜는 7월 21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전 공사가 시작한지 딱 한 달이 되는 때입니다.

4) 2:10 - 같은 장 10절에 보면 9월 24일입니다. 앞의 계시에서 두 달, 성전 건축 시작 때부터 약 3개월이 지난 때입니다.

5) 그리고 20절에 보면 날짜가 같은 날로 나오는데, 앞의 내용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9월 24일에는 총 계시가 두 번 임했습니다.

 

이렇게 학개서는 총 다섯 개의 날짜를 문단으로 하여 이루어져 있는 책입니다. 우리는 이 중에서 이제 세 번째, 즉 2장 1절에 나오는, 성전 건축을 시작한지 딱 한 달이 지난 시점에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이제 막 건축하기 시작한 백성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요? 혹은 그 기간에 이스라엘 안에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러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우리가 됩시다.

 

초막절

 

오늘 말씀의 배경, 즉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성전 건축을 시작한지 한 달 되던 때를 성경은 “칠월 그 달 이십 일일”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7월 21일은 오늘날 우리가 보아서는 아무 날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날짜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구약본문으로 레위기를 읽었기 때문에, 아마 읽으면서 날짜를 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레위기 23장 말씀을 보면 7월 21일은 초막절 절기 때입니다. 레위기 23장 34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레23:34)

 

초막절의 시작이 7월 15일입니다. 그런데 이 초막절 절기는 7일 동안 행해졌고, 이렇게 7일 동안 초막절 절기를 지킨다고 보면, 초막절 마지막 날이 바로 오늘 본문의 7월 21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시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하고 한 달 되었을 때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초막절 절기를 지키고 있었을 때, 그 마지막 날에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초막절의 분위기를 살짝 엿보기 위해서 레위기의 초막절 마지막 날에 대한 언급을 한 번 봅시다. 좀 전에 읽었던 말씀의 뒷부분을 계속 보시면 됩니다.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첫날에 성회입니다)......칠 일 동안에 너희는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요, 제 팔일에도 너희에게 성회가 될 것이며(마지막 날도 성회입니다)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35-36절)

 

초막절 절기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절기 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성회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성회라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혹은 제사)와 사람들의 축제가 함께 어우러진 그런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초막절 때에는 첫날에도 성회가 있었고, 마지막 날에도 성회가 있었습니다. 즉 초막절의 처음과 끝은 성회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거룩한 대회”여서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조금 더 봅시다.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삼고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전제를 각각 그날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 예물 외에, 너희의 모든 낙헌 예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칠월 십 오일부터 칠 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37-40절)

 

아마 이 말씀들을 통해서 초막절 절기의 분위기를 대략으로나마 그리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서 설교를 들을 때 초막절에 대해 아주 상세히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초막절 절기 행사 안에는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성회와 함께, 루랍을 흔들며 행진하는 행사, 성전 안을 밝은 등불로 환하게 켜는 일, 또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붓는 의식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초막절에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집에서 나와, 루랍 가지를 가져다가 초막을 짓고는 거기에서 지내면서 선조들의 광야에서의 삶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런 절기였습니다.

 

전반적으로 이 절기 내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마음은 안식과 기쁨, 그러나 또 과거를 돌아보면서 반성하고 기억하는 일, 또 땅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는 일 등 여러 가지 내용들이 함께 섞여 있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절기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회중이 모여 교제하는, 기쁨과 축제의 기간이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초막절과 성전 건축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초막절 절기에 맞추어서 이렇게 말씀을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무 의미 없이 이 날을 택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7월 21일, 즉 초막절 절기의 마지막 날을 잡으셨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내용이 초막절 절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고, 초막절을 보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듣는 학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인지를 다시 한 번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지금 성전 재건을 결심하고 시작한지 딱 한 달이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내버려졌던 성전을 재건하기로 결심을 하고, 터를 닦고 공사를 시작한 지 딱 한 달이 되었는데, 그 와중에 초막절 절기를 맞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때 굳이 말씀하신 것은 이들이 지금 재건에 나선 성전과, 초막절 간에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굳이 초막절에 이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이었을까요? 이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1. 성전 재건과 초막절의 의미

 

먼저, 초막절 자체의 의미가 가지고 있는 뜻을 그들이 당시 시작한 성전 재건과 관련하여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그들이 착수한 성전 재건과 초막절 간에는 아주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초막절이 어떤 절기라고 하였습니까? 초막절은 원래 그들이 살고 있었던 좋은 집에서 떠나, 일부러 얼기설기 지어진 나뭇가지 집에서 지내는 때입니다. 그리고 이 때 그들이 기억해야 했던 것은, 우리가 예전에 배웠던 대로 “아!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할 곳은 땅의 집이 아니라 하늘의 집이구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설교했던 문장을 그대로 한 번 옮겨보겠습니다.

 

“신자들은 초막절 절기에 얼기설기 만든 나뭇가지 집 안에서 에덴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땅의 초라한 육신 속에서 영의 절정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눈으로 볼 때 가치 없어 보이는 하찮은 삶 속에서 온 세계와도 바꿀 수 없는 은총의 절정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것을 갖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비천한 가운데 있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 삶은 땅의 억만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지위와 권세를 누리고 있지 않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 삶은 인생 중 가장 위대한 삶입니다. 초막절이 보여주는 신자의 삶! 그것은 우리가 고생의 삶을 살아도 그것이 은총의 삶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강력한 표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학개서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그들의 상황을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이야말로! 성전이 무너져 있었는데 ‘초막’에서 살지 않고 ‘판벽한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무엇을 잊어버리구요? 하나님의 전이 무너져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초막절의 정신이야말로, 진정으로 학개서의 정신, 성전 건축을 해야 한다고 독려하시던 하나님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제 그들이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맞는 초막절 절기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새롭고 선명하게 다가왔겠습니까?

 

“아! 나는 그럭저럭 신앙생활 하는 중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전이 무너져 있는 것을 그대로 두고도 잘 살고 있었구나! 나는 진실로 초막절의 정신, 땅의 집을 두고 초막에 와서 살아야했던 정신을 잊어버렸었구나! 나는 정말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땅에 소원을 두고 살고 있었었구나!” 이런 사실들을 얼마나 확실히 깨달았겠습니까? 성전 건축을 시작하자마자 있었던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커다란 감회들을 주었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초막절에 말씀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 큰 의미가 됩니다. 그들은 아마 이전에도 초막절을 지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전에는 그저 외형적으로 초막을 짓고 거기에 기거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전 우선의 삶, 하나님 우선의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성전 재건을 시작한 후에 맞게 되는 초막절! 진정으로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에 대한 감회가 아주 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재건을 시작한 이들에게 초막절에 나타나신 것은 그들에게 초막절의 의미를 대단히 각인시켜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2. 비교와 위로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어보시면, 여기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메시지도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초막절 절기에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은 단지 ‘일깨워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가 돋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보다 ‘위로’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초막절 절기 끝에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를 한 번 보십시오. 3절입니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이 없지 아니하냐?”

 

1) 어떤 주석가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한 곳이 있습니다.

 

“이러한 축제적인 명절이 매우 비극적인 상황 다음에 올 때,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후에 올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전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화려한 성전 뜰에서 모여 많은 제사 음식 가운데 은혜의 축복 속에 즐거워하던 때가 회상되게 되고, 이로 인해 더욱 그 차이로 인한 슬픔이 나타났을 것이다.”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앞에서 절기는 축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액면 그대로 축제를 맞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즐거웠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즐거움이 어떻습니까? 말 그대로 단지 즐거울 수만은 없던, 그런 즐거움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의 모습은 성전을 새롭게 짓고, 절기와 축제를 하면 할수록, 과거의 번영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모여서 즐거운 마음으로 여호와께서 주신 절기를 기쁨 가운데 보내려고 하는데, 자꾸 그들에게는 과거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고 성전이 다 무너져버리기 전의 상황이 오버랩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즐거움이기는 한데 마음속 한켠이 뭔가 먹먹한, 그런 즐거움입니다.

 

우리도 흔히 그럴 때가 있습니다. 매우 즐거워야 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상황이 몹시 침체되어 있고, 폭격 맞은 것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그 즐거움이 도리어 아주 구슬픈 것 말입니다.

 

어떤 회사가 개업식을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보통의 개업식이라면 술잔이 오가고, 웃음소리가 시끄럽고, 손님들과 함께 흥이 돋아야 하는 그런 자리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회사가 굉장히 저력 있는 큰 회사였다가 부도를 맞은 후에 인수 합병되어서 새롭게 시작하는 그런 개업식이라면, 여기 참석하는 직원들은 한편으로는 몹시 기뻐야할 일이면서도 서글프고 슬픈 마음이 가득 찬 것 같을 것입니다. 가정에도 그런 일이 간혹 있지요. 기쁘고 즐거운 어떤 일이 있는데도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 때문에 지금의 그 기쁨이 도리어 더 서글프고 우울해지는 그런 일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명절은 ‘하나님의 복이 내리는 기간’이요, 온 민족들이 다 성전에 모여서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만끽하는 그런 기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과거의 영화를 다 잃어버리고 초라하게 모여 있는 그런 이들입니다. 30명이던 식구들이 다 흩어져 버리고 세 명 남아서, 어떻게든 잔치를 하기는 하는데 음식을 차리고 음악을 틀수록 더 힘이 빠지는, 그런 일 말입니다.

 

2) 게다가 노인들 중에서는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본 이들이 있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것이 66년 전의 일이니, 그들 중에 75세 이상만 좀 있었다면, 충분히 솔로몬 성전의 화려함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1) 80대들은 자신들의 십대, 이십 대 때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이 성전의 모습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이 노인들에게는, 비록 보통 때에는 잊고 살았을지라도, 자기가 어렸을 때 보았던 그 화려하고 현란했던 하나님의 성전과, 또 그 때의 떠들썩했던 절기의 축제가 마음속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초막절의 불을 밝히고, 거대한 군중이 루랍을 흔들며 행진하던 때의 기억이 이 노인들의 마음속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이런 이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온통 폭격을 맞은 듯한 시절이 지나가고 이제 겨우 초라하게 시작하는 성전의 모습을 보면서, 왜 슬프지 않았겠습니까? 에스라 3장에 보면 이 때의 장면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 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스3:12-13)

 

실로 기이한 장면입니다! 젊은이들은 웃고 떠들고 기뻐하는데, 노인들은, 한편으로는 새롭게 성전을 짓게 되는 기쁨이 있었을지라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이 갖지 못한 심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비록 새로운 시작이 기쁘기는 하지만, 이전의 그 화려한 영광을 떠올려 보니,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서 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여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위로’입니다. 과거를 기억하면서 새로운 출발이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그 서글픔과 슬픔이 새로운 시작을 덮어버리지 않도록, 또 그들의 마음이 너무 상하지 않도록 위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일어서려 하지만, 혹 과거의 번영을 생각할 때 풀이 꺾이는 사람들, 혹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서 인생에 쓴 고난을 맛본 사람들이 다시금 새롭게 하나님을 향해 발돋움을 해보려고 하지만, 문득 문득 마음속에 옛 기억이 떠올라서, 지금의 새로운 시작이 의욕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패배감을 불러일으키고,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을 해야 뭣하나?”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위로’를 주십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본질이심 : 전의 화려함이 본질이 아님

 

그리고 이 위로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중요한 주제 하나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 속에서도, 우리가 진실로 ‘바라보아야 할 것’을 바라보고, 그릇되이 보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3절 말씀을 봅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거기 있는 노인들의 심정을 이해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려고 해도,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것을 하나님은 이해하십니다. 하나님은 새로 지어지는 성전의 화려함이 옛것과 비교해 너무 서글프다고 노인들이 울 때, “성전이 새로 지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화려함이 뭐가 중요하냐! 왜 너희들은 외형을 보는 것이냐!” 하면서 호통 치시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너희가 마음이 울적한 것을 이해한다.”, “이전에 보았던 크고 화려했던 성전에 비해, 이렇게 작고 초라해진 성전을 보고 마음이 서글퍼진 것을 내가 책망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이해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이 그릇된 것을 향하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야 합니다. 왜 노인들이 울었습니까? 왜 성전을 보니 그들의 마음속에 슬픔이 솟았습니까? 전의 화려함 때문이 아닙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은 누구나 이런 상황에 처할 때 마음이 슬퍼지고 눈물이 나게 됩니다. 저나 여러분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솔로몬 성전의 화려함과 장엄함을 보았는데, 이제 마치 무슨 동네 신전 같은 성전을 짓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전의 본래의 의미, 성전의 본질!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애굽의 하나님, 두려워 말라 :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성전의 본질임 하나님은 책망하지 않으시면서도, 핵심을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4절 말미를 보십시오. “내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않느냐!” 이 말이 단순한 위로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성전’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아닙니까! 5절도 보십시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언약했던 내 말과 내 신이 너희 중에 여전히 있지 않느냐!” 성전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표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니까 성전이지, 건물이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의 핵심이 바로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 즉 임마누엘 아닙니까?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더 이상 솔로몬의 중흥시대와 같은 화려한 성전을 짓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한다고 할지라도, 바로 그 솔로몬 성전 역시, ‘무엇 때문에’ 화려했는지, ‘무엇 때문에’ 장엄했는지......그 사실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만약 이들이 이것을 진심으로 깨달았었다면, 덜 슬퍼하고 덜 울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솔로몬 성전의 화려함은 ‘성전 건물의 화려함’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솔로몬 성전이 화려했던 이유는 ‘화려하신 하나님께서 거기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장엄했던 이유는 거기 계신 하나님께서 장엄하셨기 때문이지, 성전의 기둥과 대문이 멋졌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건물의 위용’보다는 ‘하나님의 위용’을 바라볼 수 있었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자주 실수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그분을 생각하다가, 자꾸 외면적인 것을 다루다가 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보다 외면으로 쏠리는 경향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때 사무엘에게 무엇을 부탁했는지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리셨다!”라고 선지자가 말했으면, “아이쿠 큰일났구나!” 하면서, 울고불고 매달려도 시원찮을 것인데, “내가 백성들 앞에 위신이 있으니, 나랑 함께 가서 사람들에게 보일 때에 좀 안 버림 받은 것처럼, 내가 선지자를 대동하고 있다는 것을 좀 보여주시오.” 사울의 부탁이 그것 아니었습니까? 사울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지 않다는 사실보다, 자기의 위신이 더 중요했습니다. 우리 역시 이것을 자꾸 실수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안 계신데, 외형만 그럴듯하면 하나님이 계신 것보다 낫다고 생각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두렵고 무서운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무언가 사람의 눈에 보기에 들어 보여야 한다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4절과 5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위로하시면서도, 성전의 본질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비록 인생의 슬픔이 이해되기 때문에, 우는 것을 멈추라 할 필요는 없어도, 이스라엘은 솔로몬 성전이나 이 스룹바벨 성전이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똑같다고 깨달았어야 했고, 화려한 솔로몬 성전이라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껍데기일 뿐이고, 이 초라한 성전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면 여기가 가장 화려하고 멋진 곳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적 눈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외양보다는 중심을 보는 이들이 됩시다. - 중세교회는 화려한 치장과 어마어마한 건물이 성경적 교회관을 대치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가 자꾸 중세를 본받으려 합니다. 건물은 자꾸 크게 짓는데, 성경적 교회됨을 사라지고 있습니다. - 칼빈 선생님은 화려한 로마교회의 강단을 다 치워버리고 설교단 하나와 작은 의자만을 설교자리에 놓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자꾸 크리스탈 강대상을 놓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설교단을 방송국에서 하는 무대처럼 꾸며서 현란한 조명을 달고, 최고급 음향시스템을 자꾸 갖다 놓습니다.

 

이것이 비단 예배당에만 국한되는 이야기입니까? - 여러분의 삶에 참된 하나님과의 동행이 있습니까? 에녹은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들림을 받았는데, 여러분의 삶에 삼위 하나님과의 동행,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성령 하나님의 매일의 지도하심이 있습니까? 그저 내가 교회를 오래 다녔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사 다니면서 성경도 안 읽고 기도도 안하고 살아가니까, 나 역시도 그런 것들이 잘 안되어도 나름 괜찮지는 않습니까?

 

-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온 회중이 함께 나아와 하나님께 드리는 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참된 임재하심이 있습니까? 만약 우리의 예배 중에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시는 일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 헛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좀 더 주해하는 것 같은 설교를 듣고, 남들 잘 안하는 교리문답을 알고 있고, 또 매주일 성찬을 하면서 시편을 부르면, 그것으로 이 예배에 하나님이 임할 것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껍데기 예배에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한 심령에 임하시고, 외형적 교제에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무리, 즉 성도의 교제 가운데 임하십니다. 이것이 없다면 ‘임마누엘’이 없는 성전 건물만 갖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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