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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학개

학 2장 20-22절(나의 인 스룹바벨) - 윤석준

by Preacher 2023.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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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2장 20-22

나의 인 스룹바벨

윤석준 목사 2015년 11월 29일

유은교회 [부산시, 하단동] http://cafe.daum.net/sola-gratia/

 

성경봉독 : 렘22:20-30; 렘23:1-8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47편 1,2,3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15편 1,2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75편 1,3,4

설교 후 찬송 - 시36편 1,2

성찬식 찬송 - 시103편 1,4

폐회찬송 - 시97편 1,4,5

 

우리가 학개서를 쭉 앞에서부터 살펴보면서, 날짜를 따라 선지자에게 말씀이 임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2장의 끝부분만 다른 부분과 다르게 같은 날 두 번의 계시가 임합니다. 2장 10절과 20절을 보시면 둘 다 날짜가 9월 24일로 같습니다. 그리고 20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2장 뒷부분에만 한 날 두 번의 계시가 임한 것이고, 이렇게 두 번의 계시가 임한 까닭은 그 계시를 받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계시는 제사장 퀴즈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한 계시였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이 되고 있는 이 두 번째 계시는 특별히 한 대상, 즉 ‘스룹바벨’에게 주어진 계시인 것입니다. 21절 말씀에서 이를 직접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즉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다 총독이었던 스룹바벨에게 전했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주셨던 계시의 내용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21절과 22절에 한 가지 내용이 나오고, 23절에 또 한 가지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을 살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주된 내용입니다.

 

첫 번째 내용

 

먼저 21절과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21절에는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라고 나오고, 22절에는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 “병거들과 탄 자를 엎드러뜨릴 것”, “말과 탄 자가 서로를 죽일 것” 이렇게 네 가지 서술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21절의 동사는 분사형으로 되어 있고, 22절의 동사들이 동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21절은 “~하면서” 혹은 “~할 때”라고 읽어야 되고, 22절의 내용들을 “~하다”라고 읽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바꾸면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실 때” 22절의 내용을 하시겠다.......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실 때”가 언제인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2장 6절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을 우리가 살폈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 학개 시대의 백성들에게 “조금만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겠다.”(6절)고 말씀하셨고, 21절의 말씀은 바로 이 때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은, 이제 곧 성전 건축이라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이 진동할 놀라운 일! 그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내용인가?

 

그러면 하늘과 땅이 진동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2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열국의 보좌를 엎는다.”, “열방의 세력을 멸한다.”, “병거들과 탄자를 엎드러뜨린다.”, “말과 탄 자가 서로를 죽인다.” 이 말들을 이해하기 쉽게 차례로 번호를 매겨서 1,2,3,4번이라고 한 번 해 봅시다. 이렇게 하면 원어에서는 1번과 3번이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말로는 1번을 “엎는다.”고 했고, 3번을 “엎드러뜨린다.”해서 다른 단어처럼 보이지만, 둘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같은 단어를 썼는지는 문학적 표현에서 흔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1,2가 한 쌍이고, 3,4가 한 쌍인 것이죠. 그래서 이걸 살려서 읽으면 22절의 말씀은 “엎고 멸한다”, “엎고 내려온다(히.야라드, come down).”가 됩니다. 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일종의 운율의 효과를 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에서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열방을 엎어버리신다는 것이고, 이 엎어버림이 보좌, 세력들, 군대들에게 적용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내가 이제 곧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니 열방이 모조리 뒤집어엎어질 것이다.”라는 점입니다.

 

스룹바벨이 기억해야 했던 것

 

그러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도자였던 스룹바벨에게, 백성들과는 구별되게 따로 또 말씀을 주신 이유를 우리는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설교에서, 같은 날 하나님이 제사장 퀴즈를 통해서 백성들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부정했기 때문에 행하는 손의 모든 일이 부정하였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또 이제 그들의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악을 모두 끊으시는 복의 주체로서 복을 내리시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날 두 번째 메시지를 통해서 하나님은 지도자 스룹바벨에게는 하나님께서 열국을 엎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단지 커다란 건물을 하나 짓는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임재를 회복하는 일이며, 따라서 이 성전 건축은 열방 위에 하나님께서 다시 군림하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레위기와 신명기의 언약의 복과 저주에서 이스라엘이 언약에 순종할 때에는 그 복이란 “너희가 대적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레26:7-8)라는 것이며,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니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신28:7)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상황은 언약에 순종치 않음으로 인해, 그들이 적들을 쫓기는커녕, 그들이 도리어 적에게 쫓겨 나라를 잃고, 약속의 땅도 잃고 포로로 끌려갔던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금 다시 스룹바벨에게 하시는 약속은 이에 대한 회복입니다. 성전을 짓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게 된다는 뜻이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실 때에 그들에게 나타나는 일은, 열방이 그들 앞에 엎드러지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은 건물 하나 세우는 일에 지나지 않지만, 거기에 하나님께서 계시게 될 때, 이 일은 하늘과 땅을 흔드는 일이 될 것이며, 열방이 그 앞에서 엎드러지는 일이 될 것입니다.

 

교회의 힘과 지도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 앞에 꼭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단순히 비유나 허구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언약에 순종할 때 교회는 세상이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가진 곳이 됩니다. 교회가 세상 위에 군림할 수 있게 되는 방법은, 세상의 문화를 빨리 받아들여서 발빠른 대처를 통해서 세상과 최대한 비슷해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그 안에 역사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의 복이 그 교회 안에 있게 될 때입니다. 교회가 열방을 엎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학개 시대의 성전건축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임재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왜 교회가 순결할 때 세상이 두려워 할까요? 제가 작은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마하트마 간디가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했는데, 어떻게 이것이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나 직선적이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힘을 가져야 강한 것이고, 힘을 갖지 않으면 약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인도의 독립은 쿠데타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았고 빼빼 마르고 힘이 없어 보이는 한 사람의 폭력적이지 않은 운동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예들이 있지요. 지금 평가나 결론이 어떻든지 간에, 우리나라에 광우병으로 시민들이 청계광장에 모였을 때, 이 시위는 대표적인 폭력적이지 않았던 시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렇게 모인 일을 통해서 정부 관계 인사들이 사과를 하고, 시민들의 힘이 크게 부각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반 세상의 일이기 때문에 교회의 사안과는 다르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시지 않은 세상일에서조차도 때로는 전혀 힘이 없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길을 따라가는 교회는 어떻겠습니까? 많은 신자들이 불신자 간디조차 믿고 있는 것을 못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가 세상적 파워를 갖지 않으면 말이 씨알이 먹히지 않으리라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세상 위에 우뚝 설 수 있는 길이 무력과 힘이라고 생각해서야 되겠습니까? 교회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많은 인원동원과 재력이라고 생각해서야 되겠습니까? 교회가 진실로 힘과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은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을 때, 언약이 교회 안에 살아있을 때입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에 대해 가장 영향력 있었을 때가 언제였을까요? 한국 땅에서 교회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해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교회가 세상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을 때는 믿는 이가 전체 국민의 3퍼센트가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지금은 국민의 20프로가 넘는 이들이 교회를 다닌다고 하고, 그것도 서울 같은 곳에는 그 비율이 더 높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말씀을 떠나자 그 권능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교회 안에 이혼하는 사람들, 낙태하는 사람들, 성적 순결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고, 교회 안에 부동산 투기하는 사람들,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하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고, 교회 안에 권력을 위해서, 어떻게든 정계에 줄을 대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니,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관공서에 힘을 행사할 수도 있고, 인원동원을 통해서 커다란 시위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권위와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교회가 서서 열방을 엎드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의 순종에만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잘 기억하고, 우리 교회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를 마음에 잘 두도록 합시다.

 

두 번째 내용

 

스룹바벨에게 주어진 두 번째 계시의 내용은 23절 말씀입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두 번째 주어진 말씀은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하나님 자신의 인, 즉 도장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로서 왕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에, 이 때의 인이란 왕의 도장, 즉 옥새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도장은 끈을 달아 휴대하기도 했지만, 오른손에 반지모양으로 끼기도 했습니다. 성경에는 왕의 도장이 ‘인장반지’, 즉 반지처럼 손에 끼는 도장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에게 두 번째 말씀을 통해서 그를 자신의 인으로, 도장으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만을 생각해 보면 그 뜻을 유추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도장이란 항상 언약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얼핏 언약이 여기에 개입되어 있는 것 같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의 말씀은 예레미야 본문의 내용과 한 짝이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함께 예레미야를 펴 보겠습니다. 22장을 보십시오. 24절부터 27절까지를 제가 읽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너 고니야가(고니야는 ‘여호야긴’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는 ‘여고냐’로도 나옵니다.) 나의 오른손의 인장 반지라 할찌라도 내가 빼어, 내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의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미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에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고 너희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학개서의 “인을 삼겠다”는 말씀만 보고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을지라도, 예레미야의 이 말씀을 읽으면, 마치 꽉 막힌 수로가 확 트이듯이, 복잡했던 머릿속이 한 번에 싹 정리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가 이해가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향해 “내가 너를 내 인으로 삼겠다” 하셨는지(학개의 ‘인’과 예레미야의 ‘인장반지’는 번역이 다르지만 원문은 같은 단어입니다), 예레미야를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서에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호야긴을 향하여, “네가 내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서 바벨론에게 줘 버릴 것이다!”

 

지난 혼인교육 때 성혜 자매가 저에게 혼인예식 때 반지교환의 의미를 물어보았더랬습니다. 반지는 성경에서도 그랬고, 그래서 교회 역사 속에서도 항상 ‘언약’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혼인을 할 때 반지를 교환하는 것은 성경이 기록되던 시기 때부터 있었던 고대의 의식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반지는 상호간에 언약을 맺을 때 그것을 확인하고 인치는 도구였으며, 이 대상들이 왕이었을 때는 왕의 반지로 인을 쳤던 것입니다. 즉 반지는 언약을 인치는 도구였습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 전해내려 와서 언약의 대표적인 예식이라 할 수 있는 혼인예식에 남은 것입니다. 고대에는 신랑이 신부에게만 반지를 주었다가, 마틴 루터 선생님은 반지를 신랑, 신부 상호가 교환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혁했습니다.1)

 

그러므로 반지나 인장은 언약을 나타내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여호야긴 왕에게 하신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 언약의 징표인 반지를 빼서 버리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언약이 부서져 버렸고,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으로 맺어진 아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에게로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나의 인장으로 삼겠노라!” 여러분, 왜 하필 스룹바벨일까요? 스룹바벨은 우리가 방금 예레미야에서 인장반지라고 일컬어졌던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의 할아버지한테는 “네가 내 인장반지라도 빼서 버려 버리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손자 스룹바벨에게 다시 인장반지로 삼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정황입니다.

 

스룹바벨은 유다의 왕족이었습니다. 왜 그가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이 포로로부터 돌아왔습니까? 여호수아 혹은 예수아로 불리는 이가 ‘제사장’이었다면, 함께 포로귀환을 이끈 ‘스룹바벨’은 왕이었습니다. 여기에 학개 선지자가 더해지면, 이스라엘의 포로귀환과 회복은 이스라엘 세 직분들을 축으로 하여 이루어진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통해 다시금 이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할아버지 대에서 깨어졌던 언약을 다시 수복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23절 말씀을 앞의 말씀들과 함께 읽어보십시오. 언제 이 일이 일어납니까? 여호와께서 하늘과 땅을 진동하실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과 땅을 진동하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성전을 재건하는 때입니다. 성전을 재건할 때,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실 것이고, 반지를 빼서 열방에 던지셨던 신랑 하나님께서, 다시 신부 이스라엘을 맞아 결혼언약으로 들어오실 것입니다. 이것이 학개서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입니다.

 

학개서 : 성전 건축 주제에서 왜 스룹바벨인가?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다시금 언약을 회복할 것으로 말씀된 스룹바벨의 정체에 대해 말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스룹바벨을 통해 언약을 회복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질문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학개서의 마지막을 스룹바벨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으셨을까요?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학개서의 주제는 성전 건축이라는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이야기에, 왜 스룹바벨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마지막을 맺으셨을까요? 스룹바벨을 자신의 인으로 삼는다는 이야기로 이 학개를 마무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example) 성경에서 가끔 우리는 이런 방식의 맺음을 보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룻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룻기는 겉으로 보아서는 한 모압여자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 같습니다. 하지만 룻기의 끝을 보면, 이 룻기의 주제가 사실은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게 됩니다. 룻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룻기를 펴서 한 번 보십시오.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기의 끝을 통해 룻기의 주제가 사실은 무엇인지를 아시겠습니까? 여기까지 보셔도 잘 모르시겠으면, 마태복음 제일 첫 장을 한 번 펴 보십시오. 예수님 족보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1장 3절 뒷부분부터 보십시오.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룻기의 끝부분은 왕의 족보입니다. 왜 한 모압여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이렇게 끝을 맺을까요? 왜 추숫날 저녁 어떤 멋진 중년의 남자가 아리따운 한 여인을 아내로 삼는 신데렐라 이야기같은 이야기가 왕의 족보로 끝을 맺을까요?

 

룻기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룻기는 사사시대의 저주가 어떻게 풀리는지에 대한 해답을 보여줍니다. 거기에 여인의 순종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이 모든 저주에 대한 해결은 구속자 보아스, 즉 기업무르는 자를 통해서입니다. 히브리어로 “기업무르다”라는 말은 “구속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룻기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사사시대의 저주를 해결하는 열쇠는 오직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룻기입니다.

 

학개 역시

 

여러분, 학개서 역시 룻기와 똑같은 방식으로 마지막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스룹바벨이 누구인지 말했습니다. 스룹바벨은 유다 말년의 왕 여호야긴2)의 손자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스룹바벨은 이스라엘의 왕족, 즉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가 영원히 네 집을 끊어버리지 않겠다.”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1,12,16)

 

성전 재건의 주제를 가진 학개서가 그 마지막을 다윗의 자손인 스룹바벨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끝맺고 있는 것은 우연도 아니고, 의미 없는 것도 아닙니다. 성전을 진정으로 건축하실 수 있는 분,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수축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예레미야에서

 

우리가 아까 하나님께서 인장 반지를 버리시는 장면을 예레미야 22장에서 살폈습니다. 다시 예레미야를 펴 보십시오. 이번에는 22장 그 뒤의 이야기를 봅시다. 23장입니다. 22장에서 여호야긴을 향하여, “네가 내 인장반지라도 빼 버릴 것이다.” 즉, “너와 나는 언약으로 맹약한 사이지만 나는 너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그 다음 메시지를 봅시다. 23장 5절부터를 함께 읽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방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거하리라 하시니라.”

 

빼 버린 인장반지로 인해 포로로 끌려갔던 이들은 “한 의로운 가지”를 통해 돌아올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일차적으로는 스룹바벨이지만 “다윗의 한 의로운 가지”라는 말이 명확히 보여주듯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성전을 재건하고,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오며, 그래서 반지를 빼서 버렸던 하나님과 다시금 혼인의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스룹바벨로 예표되어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언약 관계가 비틀어져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신부의 지위에서 쫓겨나 있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중매로 하여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학개는 성전 건축의 책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 건축이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다시’ 임할 수 있게 되는 방법을 적은 것이 이 학개서입니다. 그런데 그 유일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학개서의 결론을 스룹바벨로 맺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졌을 때, 그래서 내가 죽음 가운데 있을 때, 심지어는 내가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혼인 관계 안에 있었으나, 최근의 불의한 삶들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처럼 보일 때, 바로 그 때, 우리 속에 성전을 다시 짓고, 하나님과의 불태워졌던 혼인 문서를 재조립하고, 버려졌던 반지를 다시 하나님의 손가락에 끼우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내편에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을 뿐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 손을 잡아 끌어서, 신랑 하나님의 아리따운 신부가 되게끔 만들어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중보 없이는 없습니다. 성전 건축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과 언약의 회복은 그리스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내 마음의 완악과 불의함,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 보시기의 부정 때문에,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막힌 담을 모두 허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4)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이 은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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