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6장 1-11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허창수 목사 14.01.12
동성교회 [창원시] https://https://cafe.daum.net/huhcs48/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면 우리에게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가 부른 찬송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뻐하신다면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큼 찬송을 불렀습니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귀를 막고 눈을 돌려 외면하지는 않으셨을까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행여나 입술에 발린 찬송을 부르지는 않았는지. 입으로는 찬송을 부르면서 마음은 딴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어쩌면 우리의 예배가 습관적으로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북한에 제 2인자라고 하던 장성택이가 총살을 당하게 된 죄목 중에 하나가 박수를 건성건성 쳤다는 것입니다. 박수를 건성건성 쳤다는 것은 최고 지도자 김정은이를 존경할 마음이 없다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김정은이를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가장 악랄한 수령 앞에 박수를 건성건성 치는 것도 공개처형을 당할 정도라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찬송을 건성으로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가장 거룩하고 신성한 예배를 건성으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2절에서 3절로 다시 2절로 왔다 갔다하며 부르는 찬송을 하나님께서 과연 받으실까?
예배드리는 자세가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감격이 없습니다.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른다면 한절 한절 가사의 의미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르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성도들에게서 습관적인 예배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은혜를 받고 예배드릴 때는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인 예배가 되어 진 것 입니다.
이와 같은 형상이 오늘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본문에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1),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3)고 했습니다. 이방 사람들에 외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과 언약 맺은 백성들입니다. 가는 곳마다 회당을 짓고 율법을 배고 제단을 쌓고 양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친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속죄의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적으로 제사를 지내게 된 것입니다. 형식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형식이 필요합니다. 내용이 있고 형식이 있는 것입니다.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는 것은 알맹이 없고 껍데기만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알맹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7).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장소가 어디라고 했습니까? “거기에서”라고 하는 곳은 길르앗과 세겜입니다(8,9). 길르앗과 세겜은 특별히 구별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를 보호하는 도피성이 있는 곳입니다(수20:8).
도피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이 가득 찼으며(8), 세겜은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길에서 살인을 하였습니다(9).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고 했습니다(10).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할 도피성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다’(10)는 말씀은 오늘 우리가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예배답지 못한 예배를 하나님은 가증스럽게 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예배가 되지 못하는 것을 음행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음행은 예배 시간에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가장 거룩해야 할 예배를 더럽혔다고 하셨습니다.
길르앗과 세겜의 도피성은 오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과의 언약 맺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구별된 거룩한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신성하고 거룩한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찬송을 건성으로 부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를 막고 듣지 않는 다면 하나님께서는 가증스럽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에 참석한 것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축복을 저주로 바꾸는 미련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렸습니까? 찬송을 어떻게 불렀습니까? 행여나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가증스러운 예배를 드리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잘못되었다면 지금이라도 고칠 수 있어야 합니다.
호세아는 외쳤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지금이라도 여호와를 찾고 돌아가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말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예배를 드리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찬송을 부르자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찢으셨고 치셨다는 말씀은 범죄한 백성을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다시 싸매어 낫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미워서 찢으시고 치신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깨닫고 잘되라고 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가면 곧 바로 싸매어 고쳐 주십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잘못을 깨닫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고쳐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호세아는 또 외쳤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했습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것은 여호와를 알기 위해 힘을 다하여 노력하자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알기 위해 노력 할 때 여호와께서는 나타나십니다. 여호와께서 새벽 빛 같이 어김없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3).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가 된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였습니다. 5:4절에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므로 영적 음란에 빠져 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찢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로로 끌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참된 예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힘써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예배다운 예배로 회복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알면 입에 발린 찬송을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곧 바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우리의 찬송과 기도를 받으십니다.
여호와의 나타나심으로 받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이 없나니”, 새벽빛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루 중에 가장 어두운 때가 새벽입니다. 가장 어둔 새벽에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 나타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려울 때 여호와께서 새벽빛같이 나타나시므로 순식간에 어려움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밝은 아침해가 비취므로 맑고 밝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임하시면 비와 같은 복을 받게 됩니다.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비는 시들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립니다. 팔레스틴 지방에는 비가 매우 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실 때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게 하셨습니다. 이른 비는 씨를 뿌릴 때 땅에 흡족할 정도로 내리는 비이고, 늦은 비는 열매를 결실 할 때 적당하게 내리는 비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백성에게는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는 것처럼 필요한 복을 주십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축복입니다. 비만 오면 황량한 광야에도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옥한 땅이라도 비가 오지 않으면 식물은 말라 죽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매말랐다면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힘써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알고 그 앞에 예배다운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은혜의 단비를 내려 주십니다.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실 때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찾지 않고 여호와를 알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은 깊은 탄식을 하셨습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4). 지금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를 보시고 ‘아무개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랴 아침 구음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라고 하나님은 탄식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나 충성을 비롯하여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헌신이나 충성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자만는 이웃을 사랑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애가 있는 자만이 진정 하나님을 아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인용하신 말씀으로 구약의 내용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말씀입니다(마9: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12: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일맥 상통합니다(요4:23,24).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여호와를 찾는 것이며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면 지금 우리는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를 힘써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새벽빛같이 나타나십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같이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여호와를 찾지 않고 여호와를 알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11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을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모든 민족을 모아 알곡은 천국 창고에, 쭉정이는 불속으로 던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돌이킬 때”란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때입니다. 그리고 ‘추수할 일’이란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심판을 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여 드리는 그날에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예배를 드리던 자들에게는 무서운 지옥불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장 거룩해야 할 예배를 가증스럽게 드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가 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입술에 발린 찬송을 건성으로 부르는 것이 하나님을 얼마나 노엽게 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고 여호와를 알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어둠은 사라지고 이른 비와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때를 따라 필요한 복을 주십니다. 동성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여호와께로 돌아오십시오. 여호와를 아십시오. 그래서 새벽빛같이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며 이른 비와 늦은 비와 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부탁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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