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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11장 13-16절(본향을 소망하는 믿음) - 이삼규

by Preacher 2023.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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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장 13-16

본향을 소망하는 믿음

이삼규 목사 20190203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히 11: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히 11: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설 명절을 맞이하여 고향을 방문하신 형제자매님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우리에게 돌아올 고향이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큰 축복입니다. 물론 돌아가고 싶어도 고향에 가지 못한 실향민들도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본향을 소망하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강론하여 드리겠습니다.

 

어떤 돈 많은 유대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가까운 것을 알고 멀리서 공부하고 있는 외아들에게 유서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종에게 그 유서를 잘 보관했다가 자기가 죽은 후에 아들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면 유서대로 집행하라고 하며 그 유서를 종에게 맡겼습니다. 종이 그 유서를 살그머니 보니까 유서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내 모든 재산은 이 유서를 전하는 종에게 다 물려준다. 그런데 내 아들 유리아에게는 그 모든 것 중에서 그가 원하는 무엇이든지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 유서를 보자 종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래서 이 종은 주인이 죽은 뒤에도 유서를 잘 간직하고 재산도 잘 관리를 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들은 이 유서를 보고 처음에는 실망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생각하다가 아들이 말했습니다. "나는 아버지 재산 중에서 한 가지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아버지의 모든 재산 중에서 이 유서를 가지고 있는 종을 택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법에 종은 재산이었습니다. 노예는 재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종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은 또한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들은 한 가지만 택할 수 있지만 실은 종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자기의 것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지혜로운 아버지와 지혜로운 아들의 한 멋진 에피소드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모든 것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왜 탈무드에 이러한 이야기가 쓰여져 있을까요?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상금과 축복의 상속자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 필요할 때 하나님 앞에 이것주세요 저것주세요 필요한 것을 아버지께 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있으면 다 됩니다. 주님 한 분만 있으면 다 됩니다. 주님 한 분 안에 천국도 있고 주님 한 분 안에 우리가 구할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주님 한 분만 여러분이 만나면, 주님 한 분만 바로 알면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믿음을 소유해야 하겠습니까?

 

확신과 증거가 되는 믿음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바라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은 모두 미래의 것들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의해 현재의 실상이 됩니다. ‘실상’이라는 말은 ‘휘포스타시스’라고 하는데 ‘자신감, 확신’이라는 주관적인 측면을 나타내기도 하고 ‘본질, 존재’라는 객관적인 실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실상’이라는 번역은 믿음이 단순히 주관적인 확신이 아니라 소망하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을 실제 형태나 증거로 드러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에서 ‘소망’은 안식에 들어갈 약속과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바라는 것들’도 역시 기본적으로 하나님 약속의 성취에 대한 소망과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서 실재가 되도록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2절에서는 선진들 즉 믿음의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1절에 나오는 ‘증거(엘렝코스)’와 2절에 나오는 ‘증거(마르튀레오)’는 다른 단어입니다. 2절에 나오는 ‘증거’는 어떤 사실을 증인이 증언하는 것을 뜻합니다. ‘증인(마르튀스)’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1절에 나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눈앞에 보이는 실재로 여기는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경험한 것만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정말 부질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눈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빛의 5%만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나머지 95%의 빛은 우리의 눈으로 식별할 수 없습니다. 만일 보이는 것만 인정하겠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존재하는 것의 95%를 부정하겠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귀는 진동수 16에서 2만㎐ 사이의 소리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동물들은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만일 들을 수 있는 소리만을 인정하겠다고 한다면, 4만㎐까지도 들을 수 있는 개만도 못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비록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우리는 믿음의 눈과 믿음의 귀를 열어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고후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여러분이 창조 때에 존재하였습니까? 그 어느 누구도 창조 때에 존재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어떻게 믿습니까?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여기에 믿음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압니다. 여러분! 엄마의 뱃속에서 세상에 태어날 때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요즘은 영상을 촬영하여 나중에 보여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막 태어나는 사람이 엄마를 알아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엄마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또한 증거도 있습니다. 무슨 증거입니까? 요즘은 유전자 검사 즉 DNA 검사를 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이 증거를 피해나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2019년 새해를 맞이하여 어떤 소망과 기대를 품으셨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과 기대라면 은혜 가운데서 그것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소망은 막연한 미래의 일이 아닌, 분명히 이루어질 사실이 됩니다.

 

(동영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상상하다/윌마 루돌프)

 

저는 우리교회 부임하여 ‘성령의 권능 받아 땅 끝까지 증인되는 교회’로 영구표어를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작년 다니엘 기도회 때부터 우리교회도 선교사님을 파송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사실 우리 형편으로 보면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필리핀 민다나오섬 다바오시에 강호경, 박예순 선교사님을 파송하였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창조된 것을 믿습니까? 믿음이 있을 때 이 세상이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금년 한 해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분명히 바라보며 진리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아벨로부터 시작되는 믿음의 선진들이 등장합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아담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셨습니다. 그는 비록 형에 의해 돌로 쳐죽임을 당하였지만 믿음으로 지금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에 옮겨진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늘나라에 승천하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창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 5: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진술은 70인역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라는 것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에녹이 살던 때는 가인의 7대 손 라멕으로 대표되는 불경건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불경건한 세상 기류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에녹에게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다.

 

에녹도 므두셀라라는 아들을 낳고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므두셀라가 에녹의 신앙이 변하게 된 기점이 된 것입니다. ‘므두셀라’는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옛날에는 창을 잘 던지는 사람이 우두머리가 됩니다. 그런데 그가 죽으면 끝이 나는 것입니다. 므두셀라를 낳고 에녹이 변한 것은 그가 죽으면 세상의 끝이 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므두셀라가 죽던 해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노아 홍수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에녹은 므두셀라를 보면서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테필린송으로 한 번 불러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1)반드시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2)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확신하십니까? 그래서 그분께 기쁨으로 헌신하십니까? 헌신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는 이러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험악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로 결당하십시오.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롬 12:1).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시기로 결심하십니까? 올해는 꼭 한 가지 이상 결심하시고 그것을 실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향을 소망하는 믿음

 

믿음의 선진들 가운데 에녹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죽음을 통과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바로 믿음을 따라 죽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이 비록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믿음으로 미래를 소망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고, 본향을 소망하고, 생을 마무리한 것입니다. 여기서 본향은 그들이 나고 자라난 육신의 본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육신의 본향을 그리워했다면 얼마든지 고향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본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습니다. 곧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천상병 시인은‘귀천(歸天)’이라는 시에서 인간은 이 세상에 ‘소풍 온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땅에 살지만 이 땅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이 땅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현실을 넘어 천국을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더디게 이뤄진다고 해서 결코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해서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삶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훈련시켜 그분의 약속이 이뤄질 만한 삶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굳건하고 삶이 바로 서 있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 인내하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그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하며 끝까지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 최선을 다하되 늘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성숙한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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