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1장 21
아름다운 마무리를 짓는 믿음
서명성 목사 201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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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을 따서 자녀들의 이름을 많이 짓습니다. 구약에서 따온 대표적인 사내아이들의 이름은 아브라함, 이삭, 사무엘, David, Daniel 등입니다. 그런데 야곱이라는 이름은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누군가 ‘당신은 야곱 같습니다’한다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찜찜하겠습니까? 아마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것입니다. 신년 들어 히브리서 11장을 중심으로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께서 이 시리즈 설교를 하도록 인도하심을 느낍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관하여 깊게 생각해보게 합니다. 매주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제 자신이 먼저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습니다. 빨리 주일이 되어 깨닫게 하신 말씀으로 교우들과 나누고 싶은 설렘이 있습니다.
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이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그것도 귀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48장에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것을 주목합니다. 왜 그럴까요? 히브리서가 기자가 주목한다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때를 가장 귀하게 보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 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과정으로 보고 있고, 그 과정의 끝을 보아야 그 사람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닮은 인격과 삶으로 변화되는 것은 life long process 즉, 평생에 걸쳐서 일어납니다. 잠시 마음이 도곤도곤해서 열심을 내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주의 일을 제대로 해보겠다고 거창하게 계획만 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결말을 주목하면서 그들이 끝까지 믿음으로 살았음을 강조합니다. 오늘은 야곱이 어떻게 변화되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짓는 믿음의 인물이 되었는지 함께 살펴봅니다.
야곱의 신앙고백
우리가 건강식을 하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면 건강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는 있으나 노화 자체를 피할 수 없습니다. 늙으면 면역이 떨어지고 병치레를 많이 하고 쉽게 넘어집니다. 어제까지 건강하던 분이 한 번 앓고 나서 확연히 늙어 버리는 모습을 주변에서 자주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늙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땅을 떠나야 합니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피해갈 수 없는 인생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히브리서 본문은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하며 시작됩니다. 믿음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그렇다고 인생을 엉망으로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믿음으로 죽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믿음으로 죽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젊은 날의 야곱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장자권을 빼앗을 때에도 에서가 배고픈 순간을 노려 팥죽 한 그릇으로 유혹하였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마지막 축복을 가로챌 때도 자기가 에서처럼 위장하였습니다. 그러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야곱의 이름은 “발뒤꿈치를 잡는 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이스라엘’로 변화하게 됩니다.
창세기 48장을 보면 야곱이 애굽에 이민을 온 지 17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늙고 병들고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문병을 갔습니다. 이에 야곱은 힘을 내어 침대에 일어나 앉습니다. 늙고 병든 그가 자식을 위하여 마지막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조상과 자신이 믿고 섬긴 하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을 믿음으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사실 야곱의 집은 보통 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의 줄기가 흐르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이삭에게 전수하였고 이삭은 야곱에게 전수하였습니다.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운 야곱이 그 약속을 요셉과 그 아들들에게 전합니다.
“가나안 땅 루스에서”루스가 어디입니까? 야곱이 하나님을 처음 만난 곳입니다. 루스의 뜻은 ‘황무지’입니다. 그가 분노한 형의 낯을 피하여 하란으로 가던 중 들판에서 처량하게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던 곳입니다. 그때는 불안과 두려움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날 밤 꿈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셔서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창 48:4)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셨던 약속을 야곱에게도 주셨습니다. 가나안을 야곱과 그의 자손에게 주시고, 야곱의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많아지게 되고, 땅의 모든 족속이 야곱과 그의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있어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를 지키며 그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자다가 깨어 베고 있던 돌을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야곱은 감격하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나로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혼자인줄 알고 떨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으로 바꾸었습니다.
야곱이 77세에 집을 떠났으니 지금 147세라고 한다면 70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야곱은 자기 욕심대로 사느라고 스스로 인생을 험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죽을 때가 되어서 다시 그 시절을 생각해 보니 그때가 자기 인생에 가장 복된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복을 복으로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떠지는데 야곱은 한 평생이 걸렸습니다. 야곱의 고백을 지금 요셉이 듣고 요셉의 아들들도 듣습니다. 야곱은 육체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할 때 영적인 눈이 더욱 밝아졌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보는 눈은 육체의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눈뜬장님이 많은 것이 영적 세계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오래 동안 교회를 출석했느냐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직분을 가지고 얼마나 거창한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야곱이 인생의 마지막 가는 길에서 깨달은 영적 진리를 간증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야곱이 전해주는 영적 세계의 비밀을 우리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도 야곱과 같은 깨어짐, 깨달음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이왕이면 야곱처럼 너무 늦게 깨닫지 말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깨달아 우리의 남은 때를 좀 더 의미 있게 살기 원합니다.
야곱의 축복
여기까지 말한 야곱이 요셉에게 묻습니다. “이들이 누구냐?”그러자 요셉이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라고 대답합니다. 요셉은 자신이 노예로 팔려와 고난을 당하던 시절에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셨으며 지켜주셨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자식들을 선물로 주셨다고 대답합니다. 부자간에 믿음으로 대화를 나누며 영적으로 교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겠다고 하자, 요셉은 아버지의 무릎에서 두 아들을 물러서게 하고 바닥에 엎드려 아버지에게 절한 후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편에,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편에 각각 앉힙니다. 야곱이 손을 내밀기만 하면 오른손으로 요셉의 장남을, 왼손으로는 차남을 축복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팔을 어긋맞게 펴서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고 왼손으로는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습니다. 요셉은 그 장면을 보면서 당황했지만 미처 말릴 사이 없이 야곱은 손자들을 축복하기 시작합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창 48:15-16). 야곱은 하나님이란 단어 앞에 세 가지 수식어를 붙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섬기신 하나님, 평생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 주신 여호와의 사자.
‘섬기던’이라는 말은 시편 1편에서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라고 할 때 ‘쫓는다’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걷다는 의미의 walk가 사용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난 이후로 힘들다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실패하여 넘어질 때도 있었습니다. 연약할 때도 있었습니다. 두려워서 거짓말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나아갈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게 섬겼다는 말입니다. “기르신”이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의미가 가축을 ‘돌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야곱이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니 하나님은 목자처럼 자신을 보호하시며 인도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야곱이 자기 욕심대로 살다보니 수많은 위험과 두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험악한 세월을 야곱은 환난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환난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를 건지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건진다’는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구속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대신 값을 지불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셨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환난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은 늘 야곱의 구속자가 되셨다고 고백합니다.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고 말씀해 주셨으며 만나주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라고 한 것은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동행했던 하나님, 야곱의 목자가 되어 돌보시고 구속자가 되어 건지신 하나님께서 이제 요셉의 자식들에게도 복을 주시기를 구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이 자손들을 통해서 나타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식들의 삶을 통해서도 증거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일평생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욕망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얻어 내야 했습니다. 자기를 인하여 다른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임박해서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손자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영 못마땅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오른쪽은 능력을 상징하고 귀한 자들이 차지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히브리 전통에 따라 장남인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쪽에 두었습니다. 장남이 당연히 더 큰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그 손을 잡으며 아버지! 이 아이가 장남입니다. 아버지의 오른손을 장남의 머리에 얹으셔야 합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 실수한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반응은 단호합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차남인 에브라임에게 자기의 오른 손을 얹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에서를 축복하려던 이삭의 생각과 야곱을 축복하려는 하나님의 생각이 달랐듯이 므낫세를 축복하려는 요셉의 생각과 에브라임을 축복하려는 하나님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만 이해가 됩니다. 사실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을 보면 장남이 영적인 장자가 된 경우가 없습니다. 이삭이 그렇고 야곱이 그렇습니다. 유다, 요셉, 에브라임이 그렇습니다. 야곱은 나이 많아 육신의 눈은 어두웠지만 영의 눈은 밝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며 환난을 지나는 동안 믿음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경배
본문은 야곱의 인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을 보여 줍니다. 야곱의 나이 147세입니다.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서 그의 몸을 일으켜 세울 수도 없을 만큼 노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온 힘을 다하여 지팡이를 의지하고 침상 머리에 앉았고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꾀를 믿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계시에 대한 성도들의 응답의 행위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임종이 야곱과 같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평소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자족하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기도하다 가기 원합니다, 찬양하다 가기 원합니다, 말씀을 읽다가 가기 원합니다, 복음의 전하다 가기 원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야곱으로부터 얻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믿음으로 주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지난주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장면에서 그가 어떻게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비슷한 장면이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을 베푸는 대목에서 반복됩니다. 요셉은 자기의 아버지 야곱이 나이 순서대로 므낫세에게 베풀 것을 기대하고 므낫세를 아버지 오른편에 에브라임을 왼편에 앉게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오른손으로 왼편에 있는 에브라임에게 안수하고 축복하였습니다.
요셉이 놀라 야곱의 손을 옮기고자 했습니다. 웬만하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소원을 들어 줄 수도 있겠으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알았기에 거부했습니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의 말에서 배우기보다 부모의 행동에서 배웁니다. 야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완전한 인격의 소유자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여기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무릎 꿇기보다는 자기의 이익과 성공에 집착해 있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내고 업적을 쌓는 일에 관심이 더 가집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볼 때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어도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살았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자녀를 축복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때가 되어 자식들에게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내가 남겨 놓은 재산이 어디에 얼마가 있고 그것을 관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하면서 세상에서 사는 비결을 알려주시겠습니까?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보다 귀한 모습을 야곱은 자식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야곱이 요셉과 그의 아들들에게 물려준 것은 돈이나 물질이 아닙니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입니다.
로이스의 믿음이 유니게에게, 유니게의 믿음이 디모데에게 내려갔다고 바울을 디모데후서 1:5절에서 말합니다. 자식에게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는 것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조상이 섬겼던 하나님,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알려줄 뿐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들게 하면서 자식들에게 믿음을 전수합니다. 물론 임종 전에만 자식을 축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축복해야 합니다. 요즘같이 험난한 세상에서 자식들은 더욱 부모나 조부모의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어른들의 기도를 받고 자란 아이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잠시 치우칠지라도 다시 돌아옵니다.
13년 전에 제 아내의 외할머니가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와 말씀으로 보내는 경건한 분이셨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평소에는 기력이 부족하여 연약하게 보이는데 기도만 하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가슴을 울리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87세가 되어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셨습니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곡기를 끊었습니다. 저희 부부가 할머니가 계신 양로병원을 방문하였습니다. 침대에 누워있던 할머니가 우리를 보자 이내 알아보시고 말씀 하신 첫 마디가‘오직 예수’그 말씀을 하시고 누워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셨습니다.
조금 있다가 또 말씀을 하시려는데 힘이 없으셔서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입모양으로 보니 ‘오직 예수’였습니다. 이번에도 고개를 약간 움직이셨습니다. 세 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오직 예수’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이틀 후에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붙들며 손녀와 손녀사위에게 ‘오직 예수’를 말하는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지금이 뭉클해집니다. 나는 과연 이 땅의 생을 마감하는 때에 나의 손자 손녀들을 향하여 ‘오직 예수’를 말하며 축복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마지막 힘을 내어 ‘오직 예수’를 말하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3)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창세기 47장에 보면 야곱은 요셉에게 궁극적으로 그의 후손은 가나안에서 살아야 하며 그 땅을 기업의 땅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요셉이 그렇게 되도록 하겠다고 맹세하자 그는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을 경배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이룰 것을 확인하면서 그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믿음을 지키며 사는 일이 중요하지만 믿음으로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믿고 있다면 그를 높이고 찬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야곱의 믿음은 예배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살아서 예배했고, 죽어가면서도 예배했습니다. 예배를 보는 자가 되지 말고,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히 13:15에 의하면“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합니다. 구 언약의 제사에서는 동물의 피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제사입니다. 말세를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것을 나누고 선을 행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가 드리는 거룩한 제사로 여기시고 기쁘게 받으십니다.
마치면서
야곱은 한 마디로 잡초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야곱은 욕심이 너무 많고 조급하기까지 했습니다. 교활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부족했으나 하나님은 한 번도 야곱의 곁을 떠난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볼품없는 야곱을 붙드셨습니다. 그 끈질긴 사랑으로 야곱을 깎으시고 빚으셔서 마침내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주목하는 이유는 생애 말년에 야곱이 털어놓은 진솔한 신앙고백 때문입니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그와 동행하시고 목자로 돌보시고 구속자로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finish well한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이 147년의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동안 속이는 사람 야곱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받아들이고 그 뜻에만 순종하는 삶을 살았고, 죽는 순간까지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평생을 살아도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야곱은 어떠합니까? 야곱은 믿음으로 축복했고 믿음으로 경배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요약되기 원하십니까? 믿음으로 살았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우리도 야곱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야곱과 같이 아름다운 마무리를 지어야 합니다.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를 택하시고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인 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가다가 아름다운 마무리를 짓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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