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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11장 20절(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믿음) - 서명성

by Preacher 2023.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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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장 20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믿음

서명성 목사 2016.2.14.

팔로마한인교회 http://palomarkc.org/

 

이스라엘의 족장들인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 야곱은 147세를 살았습니다. 이삭이 그들 중에 가장 오래 살았지만 창세기 기자는 이삭에게 가장 작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나 야곱에 비교할 때 굴곡이 별로 없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이삭이 믿음으로 행동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리려고 이삭을 묶을 때 이삭은 저항 없이 아브라함이 하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번제 사건 때문에 이삭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26장을 보면 이삭은 우물파기 명수입니다. 그런데 우물을 파서 물을 얻을 때마다 그랄 사람들이 와서 시비를 걸며 우물을 빼앗습니다. 그 우물을 내주고 다른 곳에 가서 또 우물을 파면 또 와서 시비를 겁니다. 이러기를 여러 차례 하다가 마침내 르호봇에 와서 우물을 팔 때는 그랄 사람들이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시비가 붙을 때마다 이삭은 양보합니다.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우물 사건 때문에 이삭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삭의 믿음을 칭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믿음으로 야곱과 에서를 축복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을 축복한 사건을 이삭의 대표적인 믿음의 행위로 보았는지 함께 살펴보면서 저희들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려고 합니다.

 

창세기에 언급된 이삭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 34:7) 하면서 모세의 건강, 특히 눈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창세기 27장에 언급된 이삭을 보면 그는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육신의 눈만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영의 눈도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삭이 저지른 실수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창 27:2) 이삭은 자기가 얼마 살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죽기 전에 맏아들 에서를 축복하려고 합니다. 에서에게 장자권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은 보통 언제 합니까? 죽기 직전에 자기의 생을 정리하면서 합니다. 모세는 나이 120세가 되어 죽을 때가 가까웠을 때에 여호수아를 불러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 31:6) 격려하면서 그에게 안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에서에게 축복하려던 때 이삭의 나이가 130세에서 140세쯤 되었을 때입니다. 이삭이 180세에 죽었으니 앞으로 40년 이상 살 날이 남았습니다. 그런데도 곧 죽을 것 같이 조바심을 내다가 실수합니다. 약해져가는 자기의 육신에 연민을 가지게 되어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2)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이삭은 40세에 아버지가 정해준 메소포타미아 밧단 아람에서 고른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60세가 되기까지 20년간 자식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이복형인 이스마엘은 열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에 이삭이 하나님께 간구하니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리브가의 태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쌍둥이를 잉태하였는데 그 아이들이 태중에서 서로 싸우니 당황한 이삭이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하십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야곱이 동생이지만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 이삭의 뒤를 이어 야곱이 영적인 장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아들들에게 장자권에 대하여 어려서부터 분명히 알려주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기로 한 사람은 야곱이니, 에서는 야곱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야곱은 형 에서를 항상 사랑하고 포용해야 한다고 말해주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후 리브가는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습니다. 먼저 나온 아들은 피부가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붉음”이라는 의미의 “에서”라 이름을 지었고, 나중에 나온 아들은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의 “야곱”이라 지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조용한 야곱보다는 활동적인 에서를 더 좋아했고 당연히 그가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이삭의 고집이 되어 노년에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방법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사냥을 하여 잡은 고기로 자기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오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 음식을 실컷 먹고 에서를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합니다. 창세기 27장에서 반복되는 단어 중의 하나가 ‘별미’입니다. 나의 즐기는 별미(4절), 네 부친이 즐기시는 별미(9절), 그 아비의 즐기는 별미(14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자기 입을 더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이삭은 시력은 약해졌지만 식욕은 여전히 왕성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먹는 데만 관심이 있으면 이삭과 같이 되어가는 사인입니다. 장자를 축복하는 의식은 축복을 받는 사람 뿐 아니라 그 집안 식구 모두의 경사입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자식에게 전하는 이 거룩한 의식을 행하기에 앞서 금식을 한다든지, 특별 기도를 드린다든지, 거룩한 예배를 드린다든지, 집안 식구들을 모아 놓고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은 언약이 자기를 통하여 자식에게 내려감을 가르친다든지 하는 경건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리어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실컷 먹고 아내인 리브가와 야곱이 없는 틈을 타서 자기가 좋아하는 아들 에서에게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합니다. 이삭은 경건한 의식을 세상 것과 섞어서 혼잡하게 하며 믿음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떱니다

 

이삭이 큰아들 에서에게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오면 그것을 먹고 축복하겠다는 대화를 공교롭게도 리브가가 엿듣게 됩니다. 에서가 활과 화살을 가지고 사냥하러 나간 동안에 리브가는 계략을 꾸입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전하고 남편 이삭을 속이려는 계획을 말해줍니다. 리브가는 집에 있는 짐승으로 별미를 만들어 야곱의 손에 들려 이삭에게 보냅니다. 야곱에게는 에서의 옷을 입힙니다. 염소새끼 가죽으로 매끈매끈한 야곱의 팔에다 감습니다.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기에 손과 목을 위장합니다. 이름도 불러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만져도 보지만 축복하는 순간까지 이삭은 그가 에서인줄 알았습니다. 우리의 경험, 느낌, 감각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축복하기를 마치자 야곱이 나가고 에서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자기를 축복해 달라고 합니다. 그때 이삭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7:33절에 보면“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이삭이 왜 심히 크게 떨었을까요? 자기는 분명히 에서를 축복했다고 하였는데 사실은 야곱을 축복한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이삭은 하나님께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겠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형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이 얄미워서 분한 마음에 떤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지를 꺾으시고 야곱으로 하여금 축복을 받게 하셨다고 생각하신 그 하나님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심히 떨었던 때가 사실은 이삭이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든 이삭이 진정한 의미의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하나님의 복도 빼앗겼으니 에서 편에서 볼 때 얼마나 억울하였겠습니까? 에서는 자기에게도 축복해달라고 울며 매달립니다. 빼앗긴 복은 운다고 화를 낸다고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서는 이삭에게 남은 복이라도 달라고 통사정을 합니다. 에서는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야곱을 더욱 미워하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날 야곱을 죽이리라 결심합니다.

 

히브리서에 언급된 이삭

 

창세기에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장면이 27장과 28장에 걸쳐 길게 나와 있는데 히브리서에는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단 한 줄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인 사건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절정은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할 때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삭의 신앙의 절정은 그가 두 아들을 축복할 때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장차 있을 일”이 무엇입니까? 야곱이 영적 장자가 되고 야곱의 후손을 통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생기고 그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일을 말합니다. 보통 자녀의 이름을 열거할 때 장자부터 먼저 쓰는데 본문을 보면 ‘야곱과 에서’로 나옵니다. 영적으로는 야곱이 형님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28장을 보면 이삭은 비로서 자신의 의지를 꺾고 야곱을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사는 것이 믿음이 있는 삶입니다. 자기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칭찬받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일단 믿음의 길로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우리가 어떤 모습을 가졌든지 상관없이 우리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십니다.

 

창세기 27:28-29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축복이라기보다 야곱을 에서로 잘못 알고 축복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그런데 창세기 28장에는 형을 낯을 피해 도망가는 야곱에게 그가 진짜 영적인 장자인 줄 알고 제대로 축복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8:3-4)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족속을 이루라는 축복은 창세기 26:3에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약속이며 아브라함에게 여러 차례 하셨던 약속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자손과 땅에 대한 축복을 합니다. 이삭은 깨어짐의 경험을 통해서 다시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으나 야곱을 축복하게 되었을 때 이삭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역사에 대해서 완전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삭의 모습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믿고 죽었고 이삭도 이제 그 믿음으로 야곱을 축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즉 죽은 자를 능히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삭도 장차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야곱을 축복하였습니다. 이삭도 믿음으로 장차 임할 부활을 바라보고 자녀들을 축복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이제 믿음으로 사는 우리도 그들이 보았던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주님 품에 안긴 형제나 자매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다시 만나볼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손들과 언제까지 함께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 이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을 갖고 있기에 설령 우리가 이 땅에서 헤어진다 해도 다시 볼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조상들과 같이 우리도 자녀들을 축복하고 즐거워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자녀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많이 해 주세요. 부모의 기도는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자녀들이 단지 건강하고,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얻고, 결혼 잘해서 성공하고 번영하게 해달라는 기도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녀들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 말입니다. 이삭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해주셨던 것처럼 여러분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이삭을 통하여 얻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이삭이 속은 사실을 깨달았을 때 “심히 크게 떨었다”는 것은 단지 속은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자가 받는 충격을 보여줍니다. 자기는 분명히 에서를 축복한다고 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야곱을 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이삭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이삭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결국 이삭이 보여주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자기 고집, 자기 계획,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삭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따랐다면 모든 것들이 순조롭게 풀려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이삭대로 고집을 피우고 리브가는 야곱과 함께 잔꾀를 부리다가 가정이 불화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피해 삼촌 집으로 도망쳐야 했고 형은 동생을 죽이고 싶을 만큼 분을 냈으며 이삭과 리브가는 사랑하는 작은 아들을 멀리 보내야만 했습니다.

 

헌금 생활 잘 하고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복은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하였기에 그 대가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복 주시기 원하시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옵니다. 내 뜻을 이루겠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삭은 그의 인생 말년에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을 높이 평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육적으로 먼저 난 것이 영적으로 우선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예수 오래 믿었다고 모태신앙이라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 믿기 시작했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오랫동안 쉬었다가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고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았든지 일단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자기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십자가의 잔이 옮겨지기를 원했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모습을 살피면서 우리 고집을 내려놓으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살므로 하나님의 계획들을 이루어가시기를 바랍니다.

 

2)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추해집니다

 

다윗이 실족한 것은 그가 사울에게 쫓기거나 블레셋과 더불어 싸울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전쟁할 때마다 승리하고 유다 왕국은 점점 강성해졌습니다. 선줄로 안즉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도 바울이 말씀했는데 다윗은 부하들을 전쟁터에 보내 놓고 남들은 일하는 시간에 자기는 실컷 낮잠을 자고 남들이 쉬려고 하는 저녁에 일어나 성벽을 거닐다가 그만 밧세바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이삭이 가나안에 살다보니 가나안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오랫동안 평안한 삶을 살다보니 영적으로 나태해졌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의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우리가 이삭의 모습을 통하여 깨닫는 것은 이삭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요, 이삭의 실수가 우리의 실수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삭과 같이 형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은 좋지만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이삭이 걸어간 안타까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생활이 안정되었습니다. 자식들도 어느 정도 자랐습니다. 그렇게 매달려서 아쉽게 기도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좀 더 인생을 enjoy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교회생활도 익숙해져서 적당히 왔다 갔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교인으로 인정해줍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주님의 말씀은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말씀으로 생각하며 희생 없이 편하게 지내려고 합니다. 교회 일정에 따라 자기의 삶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자기에게 맞추어달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렇게 타성에 젖어 살면서도 지금의 영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며 살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시험 문제가 주어지면 믿음은 이미 바닥이 나버렸으니 인간적인 방법으로밖에 풀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는 사자와 같이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 마귀의 공격 대상이 됩니다. 믿는 자이면서 남들을 실망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에서는 영적으로 무지하였기에 하나님의 복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에서의 경우를 보면 아무리 좋은 복도 소홀히 하면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십니다. 반면에 야곱은 영적인 복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주신 건강, 재물, 환경, 여건을 귀하게 여기고 주님을 위하여 쓰면 더욱 풍성해집니다.

 

3) 목적도 선해야 하지만 과정도 선해야 합니다

 

눈앞의 상황만을 피하려고 진실을 숨기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이 진실한지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목적도 선해야하지만 그것을 이루는 과정도 선해야 합니다. 야곱은 에서의 배고파하는 약점을 이용하여 장자권을 그에게서 삽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받습니다. 야곱이 영적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잘못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여 장자권을 얻음으로 야곱이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까? 복수심에 불타는 에서를 피하여 그는 빈손으로 집을 도망쳤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복을 얻으려다가 안 해도 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형의 분노를 인하여 쫓겨나다시피 집을 떠나서 고독하고 외로운 나그네 세월을 많이 했습니다. 야곱의 경우 영적인 열망과 사모함은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거짓말은 합리화될 수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사기를 치면 사기를 당합니다. 그 똑똑한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열 번 사기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바로 앞에서 서서 자기는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합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만남은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결혼 초기의 아름다운 사랑이 변질되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서로 속고 속이는 지경에 이르게 된 이삭과 리브가의 추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이지만 세상의 가치관이 그에게 알게 모르게 밀려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순종하지 않으면 가정의 질서가 흐트러집니다. 이것은 이삭 부부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우리도 진흙탕 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흙탕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이삭의 식구들이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셨습니다. 마침내 이삭의 믿음이 인정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자녀들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이삭의 식구들을 향한 그 크신 사랑이 우리에게도 임할 것을 생각하니 큰 위로가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야곱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장자가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장자의 복이 얼마나 귀한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방법이 잘못되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영적인 장자는 다른 형제나 자매들과 구별이 됩니다. 영적인 장자는 그가 속한 그룹이나 공동체에서 하나님이 가장 사용하기 원하시고 가장 복을 주시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한 집안의 육신적인 장자는 한 사람이지만 영적인 장자는 하나가 될 수도 있고 둘이 될 수도 있고 전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희생은 있으나 보상이 엄청나고 나의 생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역할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하나님의 복의 줄기가 내려가는 영적인 장자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장자라고 문제가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끈질긴 사랑으로 붙드시고 연단하셨기에 그들은 마침내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27장에 나타난 이삭을 보면 그가 과연 믿음의 족장인 아브라함의 아들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 얼마나 낯 뜨거운 것, 부족한 것이 많겠습니까? 불평한 것, 미워한 것, 거짓말한 것, 비방한 것, 게으른 것, 인색한 것, 시험 든 것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던져버리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붙드십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영적인 장자의 직분을 감당하지 않겠습니까? 영적인 장자에 대한 비전을 소망하세요. 남편이, 아내가 자녀들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귀하게 사용되는 영적인 장자가 되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인 이삭을 본받아 하나님이 기뻐하는 영적인 장자들이 되어 그가 베푸시는 형통의 삶을 사시며 믿음으로 자녀를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놀라운 약속을 붙들고 복된 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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