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2장 1-11
믿음의 경주를 잘하려면
서명성 목사 2015.2.7.
팔로마한인교회 http://palomarkc.org/
방금 보신 것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벌어진 마라톤 경기 장면입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을 한적이 있으나 그때는 일장기를 달고 달렸습니다. 한국 선수가 대한민국 국기를 가슴에 달고 마라톤에 우승하기는 황영조선수가 처음입니다. 23년 전의 장면이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황영조 선수가 몬주익 스타디움에 들어서니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그를 향해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하였습니다. 황 선수가 그런 환호를 받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고 희생하고 절제하였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따지고 보면 경주입니다. 그것도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한때 빨리 달렸다고 나중에는 대충 달리거나, 정해진 분량이 있어 몰아서 달린 후에 적당히 쉬어도 되는 경주가 아닙니다. 과거에 어떻게 달렸든 지금은 최선을 다해서 달려야 합니다. ‘경주’로 번역된 agon 이라는 헬라어가 디모데 전서 6장 12절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하면서 ‘싸움’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절에서는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하면서 ‘힘씀’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경주’로 번역된 agon이라는 단어에 y를 붙이면 영어 단어 agony가 되어 고통, 고민, 번뇌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신앙의 경주를 할 때 때로는 고통이 있고 눈물이 있고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동안 달려온 신앙여정을 각자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평생을 달려오신 분들이 있을 것이고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믿음의 여정이 항상 행복하던가요? 달리기 싫을 때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굳이 이 길을 달려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경주를 방해하는 일들이 생기기도 하고, 믿음의 경주 말고 다른 것을 해보자는 유혹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장애나 난관에도 불구하고 목표에 이를 때까지 달려가야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경주입니다.
2015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금년은 어떻게 달리셨습니까? 드디어 성경 통독을 한번 해보셨습니까? 오랫동안 기도하던 것이 이루어졌습니까? 아니면 기도응답을 아직 받지 못했거나 근심거리가 여전히 누르고 있습니까? 금년에는 신앙의 경주를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어찌나 바쁜지 한해가 훌쩍 지나가 버리지 않았습니까? 본문을 통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경주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그 경주를 잘 할 수 있을지 함께 살펴보면서 신년에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경주를 하시며 주님의 칭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1장을 흔히‘믿음’장이라 하는데 각자에게 주어진 코스를 믿음으로 잘 달려 승리한 믿음의 선진들이 언급됩니다. 믿음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1).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고 손에 쥔 것은 없어도 보여주실 것으로 알고, 이루어주실 것으로 알고 여전히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라는 것은 미래의 일인지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요 보지 못하는 것은 공간의 제약을 받아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들을 언급하고 그들의 삶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도 그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그들이 믿음으로 승리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그들이 맛보았던 승리를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부터 10장까지는 누구보다도 탁월하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분은 천사보다, 모세보다, 여호수아보다, 대제사장인 아론보다 탁월하십니다. 12장은 “이러므로”로 시작합니다. 무엇인가 앞에 한 말들이 있고 그것을 정리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알고 선진들의 믿음을 아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경주로 비유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잘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본문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1.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12:1-3)
우리가 달렸고 앞으로도 달려야 하는 이 믿음의 경주는 우리가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구름 같이 둘러싼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미 달렸던 경주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지켜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을 가리켜 ‘관중’이라 부르지 않고 ‘증인’들이라 부릅니다. 달리는 선수들을 바라보고 환호하거나 야유하는 일반 관중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주하는 것을 단순히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본 것을 하나님 앞에 낱낱이 보고한다는 의미에서 증인들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께 낱낱이 보고를 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격려가 되고 자극이 되고 또한 도전이 됩니다.
믿음의 경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 각자 달려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는 부모나 배우자나 자식이나 친구가 대신 달려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각자가 달려야 하고 각자가 주님 앞에 달린 결과에 대한 성적표를 받아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경주를 제대로 못했다고 원망하거나 게을리 한 핑계를 대어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주님이 원하는 코스를 달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멀리 달리고 오래 달리고 빨리 달려도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도를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하시면서 각자가 지어야할 십자가가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달리라고 하신 코스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지 그 코스를 믿음으로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어떤 경주를 했는지 열매에 따라 주님의 상급이 주어집니다.
2) 함께 달려야 합니다
마라톤 경기에서는 일등을 한 선수에게만 월계관을 씌웁니다. 그러니 다른 선수가 힘들어 하든, 쥐가 나서 그 자리에 주저앉든 상관 않고 혼자서 계속 달려갑니다. 그런데 믿음의 경주는 다릅니다. 본문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Let us do something 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함께 하자’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믿음의 경주는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달리는 경주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팔로마한인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에 소속된 경주자들입니다. 이전에 어디에 있었든, 어떻게 달려왔든 상관없습니다. 지금 함께 달려야 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으로, 상처받은 자의 상처를 싸매 주고, 힘들어하는 자들을 격려하며 함께 달려야 합니다.
믿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1) 벗어버리고 달려야 합니다(let us throw off)
육상 선수는 셔츠와 팬티를 입고 가벼운 운동화를 신는 것 외에 달리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은 벗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경주에 방해가 되거나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은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온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사명을 감당할 때 약대 털로 만든 옷을 입었습니다. 그 옷은 그냥 낙타 가죽을 벗겨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허리에 가죽 끈으로 적당히 둘렀습니다. 요한이 먹던 메뚜기와 야생 꿀은 그 당시 서민들이 그냥 광야에서 얻던 것들이요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 먹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입은 복장, 그가 먹은 음식, 그리고 그의 삶 자체는 살아있는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버릴 것은 버리면서 주신 사명에 충실한 요한의 모습은 저희들에게 도전을 줍니다. 이제는 우리의 남은 생애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하여 가지 칠 것을 쳐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광야의 삶’을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벌려놓은 일이 너무 많아 그것을 수습하느라 하나님의 일을 할 시간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강 건너 불 보듯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데는 시간과 돈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지는 않습니까?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물론‘광야의 삶’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광야의 삶’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이방인들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경주를 제대로 하는 비결을 알려줍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가졌던 사고방식과 삶의 패턴들을 버려야 했습니다. 조금 형편이 좋으면 만족해하다가 조금 힘들면 불평하고 원망하는 모습을 이스라엘이 얼마나 많이 보여주었습니까? 출애굽 제일세대는 광야 여정을 하는 동안 먹을 양식이 없거나 마실 물이 없어서 혹은 대적들과 싸우다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광야 사십 년은 좋지 않은 과거의 끈을 끊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연단의 기간이었는데 그들은 훈련 받기를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강한 훈련을 받은 병사들만이 강한 군대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이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버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끌어내리는 '무거운 짐과 얽어매는 불신앙의 죄'를 벗어버리지 않고는 믿음의 경주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련, 집착, 욕심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죄가 우리 속에 있으면 알게 모르게 우리를 얽어맵니다.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갑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자신감을 잃게 합니다. 주님 앞에 모든 죄악 된 부분을 내어놓고 고백하며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을 때 자유함이 오고 자유함을 얻어야 기쁨이 있고 기쁨이 있어야 믿음의 경주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2) 인내로 달려야 합니다(let us run with perseverance)
아까 화면에서 보신 바와 같이 몬주익 경기장으로 올라가는 길은 오르막길입니다. 그렇다고 선수가 오르막길이라 힘이 든다고, 더워서 땀이 난다고 천천히 걷거나 달리기를 포기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인내함으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듯이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 역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경주를 하노라면 많은 시험과 환란, 모진 핍박과 조롱 등 시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고난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고난이나 아픔조차도 사용하셔서 우리의 인생이 더 가치 있고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1:2-3).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으라고 하면서 고난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것을 권유합니다. 고난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그런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의 사람, 인내의 사람, 성숙한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마귀는 우리가 편안하게 경주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믿음생활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경주를 ‘영적 전투’라고 부릅니다. 엡 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지금도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믿음생활 제대로 해보려고 할 때 뜻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이 섭섭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멀쩡하게 믿음생활 잘하는 사람 같은데 실망스런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더욱 인내심을 키우기 원합니다. 영적으로 더욱 성숙하여지기를 원하십니다. 고난 속에서도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그럴 때 고난을 통하여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믿음으로 인내하는 가운데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3)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달려야 합니다(Let us fix our eyes on Jesus)
마라톤 선수가 결승라인을 향하여 달려가듯이 믿음의 경주에도 결승라인이 있습니다. 그 경주의 목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저희보다 먼저 믿음의 경주를 하셨습니다. 그것도 대충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경주의 본이 되십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서 기도하시는 동안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은 폭풍우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뱃사람 출신인 제자들조차 겁에 질리게 하는 거센 풍랑이었습니다. 파도를 헤치고 노를 젓느라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벽녘에 누군가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유령이라고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때 주님이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14:27) 말씀하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자기도 주님처럼 걷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배에서 내려 물위를 걸어가던 베드로가 예수님께로 향하던 눈을 돌려 갑자기 풍랑 이는 바다를 보니 겁이 났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니 그의 몸이 물속으로 빠져갑니다. 소리를 지르는 베드로를 주님은 건져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붙잡으시면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나” 책망하셨습니다. 큰 물결이 우리에게 몰아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갈 때 물에 빠지지 않고 도리어 물위에 걸을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풍랑이 얼마나 심한 가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시선을 그분께 고정시키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계신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가지신 능력이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붙들면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더 큰 일도 행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할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1)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
여기서 ‘주’로 번역된 단어는 왕을 뜻하는 Lord가 아닙니다.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케고스’는 pioneer 즉‘창시자’ ‘앞서 인도하는 자’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근원이 되셔서 우리의 믿음을 이끄실 뿐 아니라 믿음을 완성하시는 분입니다.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인생들을 당신의 피로 속량하셔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고 영생을 얻는 자로 변화시키는 영적 치유자이십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오직 예수만을 쳐다보며 그분을 향해 달려가자는 말입니다. 때로 경주를 하다보면 힘이 빠지고 낙심할 때도 있지만 여전히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할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셔서 끝까지 달려가게 하십니다.
2)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신 분
우리는 연약하여 작은 것 하나에도 쉽게 낙심합니다. 심한 고난을 당할 때는 나만이 그 같은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상은 예수님이 우리 앞서 가시면서 모든 고난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어떤 믿음의 선진들보다 더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멸시를 당하고 배척을 당하고 슬픔을 당하고 고난을 겪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창에 찔리시고 상하셨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와 같은 육신의 고난과 죽음을 인한 아버지와의 단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이 끝나고 나면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실 것을 소망 중에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우리의 모든 고난을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고난의 실제적인 참여자로서 우리의 위로자가 되어 주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소망 중에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3) 승리와 영광의 주가 되신 분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를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믿음의 경주에 나선 성도가 예수를 바라보아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그분이 죽음을 이기신 영광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승리와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분을 생각하고 바라볼 때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역경 때문에 우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감당할 수 없는 영광과 즐거움이 분명히 있음을 알게 되고 고난의 경주를 기쁘게 감당하게 됩니다.
2. 징계를 기뻐해야 합니다(12:4-11)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흔히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라면 왜 우리가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을 언제까지 버려두시겠습니까?’분명한 것은 믿는 자들에게도 고난은 있습니다. 다만 고난을 당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가가 중요합니다. 4-11절에 핵심단어가 ‘징계’입니다. 그런데 ‘징계’는 벌의 의미가 많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고난’이나 ‘연단’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아버지가 자식을 징계하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징계는 자식이 잘못할 때 아비가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성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따라서 그 징계는 성도가 꼭 죄를 범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이 실수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욥에게 적용했습니다. 욥의 고난은 그가 지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욥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로 성도를 훈련시켜 보다 성숙한 믿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징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징계는 또한 우리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합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 71)
징계는 우리로 하여금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운동선수가 경기 후 휴식의 열매를 취하듯이 징계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은 자에게는 ‘의의 상급’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당하는 고난이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처럼 극심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과장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선한 뜻이 있고 약속된 열매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징계를 통한 연단으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으로 두고 살아가도록 의와 평강의 열매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올 때 회개할 것이 있는지 돌아보고,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하고 그가 베푸시는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모든 고난은 우리를 위한 유익한 훈련 과정이기에 그 과정 이후에 주실 상급을 기대하고 믿음의 경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2015년 한 해 동안 열심히 그리고 함께 달려온 교우들을 축복합니다. 팔로마 공동체에 새롭게 참여하여 함께 달리기 시작한 교우들을 축복합니다. 달리면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믿음의 경주에 탁월한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고통은 있었으나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고난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깊어지고 영적으로 더 성숙하여집니다. 지금도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의 믿음의 경주의 모습을 하나님께 증거하고 있습니다. 죄와 맞서 싸우며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믿음을 가진 경주자, 인내하는 경주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경주자들이 되어 이 경주를 다 마치고 주님 앞에 섰을 때 영광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을 받으며 하늘 보좌에 서는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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