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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12장 1-2절(신앙생활의 챔피언이 되는 길) - 이준원

by Preacher 2023.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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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2장 1-2

신앙생활의 챔피언이 되는 길

이준원 목사 2013.9.25.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신앙생활을 흔히 장거리 경주에 비유합니다. 100미터 경주보다는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장거리 경주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경주를 지켜보면서 신앙생활에서 자기도 저렇게 뛰어야겠다는 결심을 자주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에 쓴 디모데후서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7) 바울은 자신의 지나온 생애를 열심히 달음박질한 마라톤 선수에 비유하며 회상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먼 훗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바울처럼 열심히 달음질한 인생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배우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의 챔피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분명한 목표

 

먼저, 신앙생활의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는 물어보나마다 그 목표가 메달에 있습니다. 포상금이라든지 칭찬을 듣는 것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입니다. 이겨서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목표는 선수의 삶을 지배하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오직 금메달을 따겠다는 집념이 온갖 훈련의 어려움과 고통을 견디어내게 만들어줍니다. 그렇게 볼 때, 우승에 대한 열망이 없는 선수는 이미 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난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직후에 바로 죽어서 천국에 가야 맞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보십시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 9:24)

 

이 구절을 가지고 구원을 받기 위해 달음질하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지만, 구원은 우리가 달음질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6)

 

구원은 우리가 달려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 달음질해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신앙생활에서 달음질을 해야 합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달려야 합니다. 바울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달려야 할 뚜렷한 목표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달음질해야 합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달음질하는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입니까?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적극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며 따르겠다고 하는 자세가 바로 달리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헌신하겠다고 하는 자세가 달리는 자의 자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앙생활에는 적당히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요한계시록에서 “덥든지 차든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차가우면 뜨거워질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미지근하면 스스로 알지를 못하고 그냥 만족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달음질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상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상급을 얻기 위해 우리는 달려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어리고 약한 사람일수록 이렇게 말을 합니다.

 

‘구원만 받으면 됐지, 무슨 상을 바라는가? 상을 받고 못 받고는 중요하지 않다. 상이나 바라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건 불순한 게 아닌가? 천국에 들어가서 상을 받지 못한다고 불행해진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식으로 제법 그럴듯한 논리를 펴기도 하고, 그런 말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일리가 있다며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믿음이 아직 어리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믿음이 자라면서 상에 대한 깨달음이 옵니다. 믿음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상을 얻으려는 열망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상이 무엇입니까? 이전에도 상급에 대해 살펴본 적이 있어서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우리가 알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부터가 큰 기쁨이고 영광이지만, 그 천국의 기쁨과 영광은 상을 받는 것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 헌신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실 그 상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친 것입니다.

 

사실 상이라는 것이 자기만 누리겠다고 이기적으로 가지는 그런 게 아닙니다. 진정한 상급은 바로 주님 자신이십니다. 주님이 정말로 기뻐하시는 것,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 그것을 하는 사람이 어떤 기쁨과 영광을 얻게 될 것인지를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상급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사람치고, 굼벵이처럼 천천히 기어가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영광을 보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그 상급과 영광을 마음에 그리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의 영광이 찬란한 것 같아도 마음에 차지가 않습니다. 만족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이 너무나 찬란하고 화려하고 영광스럽기 때문에 세상의 것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상급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꾸 세상의 찬란한 것, 영광, 부귀영화, 성공에 눈길이 가고 마음이 끌립니까? 하나님 나라의 상급의 그 기쁨과 영광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기쁨과 영광을 깨닫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불행한 신앙생활입니다.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만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전부인 줄 아는, 아주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어선 안 되겠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단 12:2-3)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주님께 돌이키는 사람에게 이런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상급입니까. 여러분 자신은 이 상급을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저는 받고 싶습니다.

 

우리가 왜 가정교회를 하면서 영혼 구원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까? 당장 수많은 영혼들이 믿겠다고 쏟아져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으면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주님께 돌려보겠다고 애를 쓰고 있습니까? 왜 선교사님들이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지역에까지 나가서 그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려고 그토록 애를 쓰고 있고 우리는 그들과 협력하고 있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이 상급 때문입니다. 즉,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신앙생활의 챔피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드리고 싶다면 목표를 뚜렷이 정하시기 바랍니다. 우승을 하겠다는 열망이 없는 선수는 선수생활을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로부터 상을 받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없는 크리스천은 결코 달음질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단축 마라톤 대회가 있었습니다. 저희 학교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어서 코엑스(KOEX) 근처였습니다. 지금은 굉장히 복잡한 곳이지만, 그때만 해도 길이 꽤 한가했습니다. 그때 뛴 것이 10km 정도였으니까 사실 마라톤도 아닙니다. 그래도 저는 3년 내내 열심히 뛰어서 해마다 등수가 올라갔었습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고 뛰었나 하면, 오직 상을 받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사실 상이라고 해봐야 노트와 펜이었는데, 왜 그렇게 받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아니, 사실 제 마음에는 높은 등수를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올라간 등수가 적힌 종이를 받을 때 좋았습니다. 그때 뭔지 모를 희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위 좀 ‘노는’ 친구들은 뛰는 데는 관심이 없고, 이때가 기회다 하고 중간에 슈퍼에 들어가서 음료수 사서 마시고 담배 피우고 그러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전속력으로 뛰어서 저러다 끝까지 뛰겠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중간에 빠지려고 미리 빠르게 뛴 것이었습니다. 그런 느낌을 주는 교인들을 종종 봅니다. 신앙생활에서 정말 열심히 달음질을 해도 될까 말까 한데, 중간에 쉬면서 음료수 사 마시고 담배 피우며 경주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냥 그 시간을 즐기기 위해 사용한 껄렁거리는 그 친구들처럼, 쉬고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데에만 관심을 보이는 겁니다. 사실 그런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취미생활일 뿐입니다. 달음질하는 신앙생활이야말로 참 신앙생활입니다.

 

2. 철저한 절제

 

둘째로, 신앙생활의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히 절제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기 선수에게는 체중이 적입니다. 오래 전 올림픽 100미터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그 후 다른 대회에 나갔습니다. 전문가들은 그 선수가 또 우승을 할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경기를 하고 보니 그 선수가 아니라 다른 선수가 이겼습니다. 기자들이 몰려와서 왜 그러냐고, 컨디션에 문제가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선수는 아주 간단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체중 때문입니다.” 올림픽 우승 당시보다 체중이 약간 늘었는데, 바로 그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하는 데에도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1절)

 

여기 보면 그 두 가지는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상을 얻기 위해서 달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두 가지는 치명적인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영적인 적입니다. 히브리서를 읽던 1세기 성도들은 이 두 가지를 방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큰 피해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얼마 동안은 잘 달린 사람들입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10:32-35)

 

이 말씀을 보면, 그들이 초창기에는 굉장히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비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12:4)

 

이 말씀을 보면, 그들이 중도에 주저앉아버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처음에는 죄와 열심히 싸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간이나 노력이나 돈까지도 희생이 많이 요구될 수 있는 싸움에는 말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지 못하여 결국 어떤 신자들이 되었습니까?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12:12-13)

 

이 말씀을 보면 그들이 어떤 형편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피곤한 손, 연약한 무릎, 저는 다리로 인해 새로 고침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우리의 생활에서 방치하고 용납하게 되면, 아무리 잘 뛰던 사람이라도 얼마 가지 않아 주저앉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전에 신앙생활을 잘했더라도, 아무리 왕년에 대단했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매일 꾸준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손이 나른해지고 무릎에 힘이 빠지고 다리를 절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1) 무거운 것

 

그렇다면 여기서 “무거운 것”이 무엇입니까? “무거운 것”의 원래 뜻은 몸이 붓는다는 것과 체중이 늘어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 몸을 무겁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무거운 것”이 꼭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라’는 말은,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어떤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해 버리라는 뜻입니다.

 

죄는 아니지만 나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느라 바빠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죄라는 것을 즉시 알 만한 것이라면 바로 피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아니기 때문에 안심하고 붙들고 있다가, 결국 그것 때문에 신앙생활에서 주저앉아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모든 무거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성도에게는, 믿기는 믿지만 신앙생활을 달음질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다른 교인들이 무거운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대충 하라고 합니다. 자기보다 조금 앞서서 달음질을 하려고 하면 뒷덜미를 잡고 늘어집니다.

 

“나 삶 공부에 해야 돼.”라고 하면, “믿어도 좀 적당히 믿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건데, 주일에 예배에나 가면 됐지 주중에까지 교회에 나가서 공부는 무슨 공부야?”라고 합니다. “교회 봉사하러 가야 돼.”라고 하면, “헌금 내면 됐지 무슨 몸으로까지 때워?”라고 합니다. “수요예배 가야 돼.” 하면, “오늘 마침 콜럼버스에 온 브로드웨이 뮤지컬 하는 마지막 날인데, 이건 어쩌다 한 번 오는 거야. 교회는 매주 있잖아. 여기나 가자구.” 또 이런 말을 하는 다른 교회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이 너희 교회 목사님보다 훨씬 더 유명한 분이고, 또 우리 교회가 너희 교회보다 훨씬 크잖아. 그런데도 우리 교회는 너희처럼 달달 볶지는 않아.”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면 몸이 무거워서 얼마 안 가 주저앉게 됩니다.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조용히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무거운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취미생활일 수도 있습니다. 사업상의 친구들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게으름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고집하는 어떤 사상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 때문에 제대로 신앙생활을 못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직접적인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나의 발목을 잡고 나를 주저앉힙니다. 이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달릴 수 있습니다.

 

2) 얽매이기 쉬운 죄

 

또 달음질을 방해하는 것은 죄입니다. 이 구절을 원문대로 읽으면 ‘얽매이기 쉬운 그 죄’라고 되어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죄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히브리서 독자들이 유대주의자들의 현혹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고 보고, 다른 사람들은 이것이 그들의 불신앙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죄가 그들이 앞으로 힘차게 달리려고 할 때마다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올무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왜 이것을 가리켜 “얽매이기 쉬운 죄”라는 표현을 쓸까요? 죄는 덫과 같은 옭아매는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발이 빠른 사슴이라도 한 번 덫에 걸리면 주저앉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덫에 걸렸다고 당장 죽지는 않지만 서서히 죽어 갑니다. 그러다 사냥꾼이 와서 생명을 앗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죄에 한 번 발목이 잡히면 아무리 달음질을 잘하던 사람도 금방 주저앉게 됩니다. 죄를 지었다고 당장 죽는 것은 아니지만, 서서히 영적으로 죽어 갑니다. 그러다 사탄이 와서 확 치는 겁니다. 그렇게 잘 달리던 형제자매가 갑자기 믿음에서 주저앉는다면 그의 발이 죄의 덫에 걸렸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히브리서를 받아서 읽은 독자들에게는 그들만이 알고 있는 구체적인 죄가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웠던 신앙생활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자기만이 아는 어떤 죄를 숨겨놓고 있으면 똑같은 비극을 겪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천국의 시상대까지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 자신의 마음을 성령께서 환하게 비추어주셔서 어떤 죄가 나의 발목을 잡고 주저앉히고 있는지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3. 어떻게 할 것인가?

 

‘무거운 것’과 ‘죄’, 이 두 가지를 벗어버리지 않고는 달음질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선수들이 체중을 조절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합니까. 뜨거운 사우나탕에 들어가 오랫동안 땀을 흘리며 체중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먹고 싶은 것도 체중 때문에 못 먹습니다. 0.1초라도, 아니 0.01초라도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인간적인 정마저 냉정하게 끊어버리고 홀로 훈련장에 들어가 혹독한 훈련을 합니다. 이 세상 운동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도 그렇게 열심히 노력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가 <새번역>에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시작하시고 마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에 있어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 즉 모든 것이 되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분을 바라보며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가야 합니다.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9:25-27)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그는 달음질하는 데에 방해물을 만나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켰다고 합니다. 몸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방해거리로 작용하는 무거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몸을 친다’는 말은 권투선수가 눈언저리나 급소를 향해 명중타를 날리는 것을 말합니다. ‘복종시킨다’는 말은 극도로 자제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로 보면, 바울은 자신의 몸을 사정없이 때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기 몸이 요구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몸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훈련하며,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피해야 할 것은 피하면서 철저히 자기관리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25절에서 바울은 ‘절제’라는 말로 그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달음질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이것을 본받으면 됩니다. 절제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절제하는 사람인가? 절제하지 않는 선수가 챔피언이 된 역사가 없습니다. 절제가 신앙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이 콜럼버스에 처음 왔을 때도 말했었는데, 콜럼버스 출신 중에 아주 유명한 사람이 버스터 더글러스(Buster Douglas)라는 사람입니다. 왜 유명한가 하면, 당시 무적이라고 하던 권투 챔피언 마이크 타이슨(Mike Tyson)을 KO시켰기 때문입니다. 타이슨이 그 당시 연습을 별로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천하무적이라도 완전 무명 선수에게 엄청나게 얻어맞고 KO 당한 것입니다. 버스터 더글러스도 챔피언이 될 때는 좋았는데, 그 후 별로 연습을 안 해서 살도 많이 찌고 그러더니 바로 챔피언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절제하지 않는 선수가 챔피언이 될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습니다. 절제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벗어버리다’라는 동사는 단 한 번으로 끝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무거운 것이든, 얽매이기 쉬운 죄이든, 우물쭈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단번에 처리해버리는 결단력과 추진력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달음질을 방해하는 무거운 것과 죄를 단번에 없애버려야 합니다.

 

반면, ‘경주를 하다’라는 동사는 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고백한 것과 같이 뒤의 것을 돌아보지 말고 목표를 향해 힘차게 뛰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힘차게 또 힘차게 뛰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달음질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런 상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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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점검과 기도

 

- 나는 지금 달음질하는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

 

- 나로 하여금 뛰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나를 넘어뜨리는 ‘죄’는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 회개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주시기를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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