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2장 1-3
영혼의 응시(凝視)
이삼규 목사 20170430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요 근래 우리는 미세먼지와 황사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과거 중국에 갔을 때 중국 여인들이 망사를 둘러쓰고 자전거를 타거나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이제 이해할 것 같습니다. 이런 미세 먼지나 황사 때문에 가시거리가 아주 짧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캐나다 밴쿠버 같은 곳은 가시거리가 48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거의 100리가 보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시거리가 길어도 시력이 나쁘다면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영적 시력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한 목록이 있다면 그 맨 위에 뭐가 있을까요? 성경이 가르친 바를 찾아 나서는 사람은 거기에 ‘믿음’의 교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이 믿음에 대해 부여하는 막대한 중요성은 너무도 명백하기에 그 사람은 절대로 놓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믿음이 영혼의 삶에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흔히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장에 보면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용서 받을 수도 없습니다. 구원받을 수도 없고, 그분과 교통할 수도 없고, 상급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영적인 생활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계속해서 “믿음으로”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믿음이 그토록 절실히 중요한 것이요 하나님을 추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라면, 가장 귀한 이 선물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 조만간 믿음의 본질을 묻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내게 믿음이 있는가?”라는 질문과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서, 우리는 어떻게든 그 대답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믿음이 뭡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성경이 진실하다고 간주하고 거기에 근거하여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정의를 내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1절의 짧은 정의 외에 제가 아는 성경의 정의는 없습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에서는 믿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할 뿐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질 때 나타나는 결과는 보여주지만 믿음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사실은 거기까지만 나가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편이 현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이 어디에서 오며 무엇을 통해 오는지를 알려줍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말처럼 “나는 믿음의 정의를 알아내기보다 믿음을 사용하겠다.”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기에서 말씀드리는 ‘믿음’은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느냐?’라는 측면에서 말씀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믿음의 정의라는 개념을 떠나, 행동하는 영역에서 경험하는 믿음에 대해서 생각할 것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믿음이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을 통과하여 직행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에돔 사람들이 대로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렸습니다. 그래서 길이 아닌 곳으로 에돔을 우회하게 된 것입니다. 없는 길을 만들어 나아가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이 안 좋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내셨습니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민 21: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아주 독이 치명적인 불뱀의 습격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백성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불뱀에 물린 상처를 치료할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민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모세는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불뱀에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아났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이 중요한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권위 있는 해석이 나옵니다. 그때 주님은 구원의 길을 설명하시던 중이었습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점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민수기의 이 사건을 언급하셨습니다.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보다’와 ‘믿다’가 같은 말임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즉 구약에서 ‘뱀을 보는 것’은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보는 것과 믿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본 것은 육신의 눈으로 한 일이지만, 믿는 것은 마음으로 하는 일이라는 점도 이해할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혼의 응시(凝視)’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들을 전제로 다른 성경구절을 생각해봅시다.
시 34:5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시 123: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 123: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은혜를 구하는 시편 기자는 은혜의 하나님을 똑 바로 쳐다보며 그가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까지 절대 눈길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도 항상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마 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진실로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영혼의 눈을 아버지께로 항상 고정시킴으로 그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그의 능력은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데서 나왔습니다.
요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 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요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오늘 본문 히브리서는 인생의 경주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다음과 같이 이 점을 요약해 줍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2절)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통해 믿음이란 단번의 행위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을 마음으로 계속 응시(凝視)하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음은 ‘예수님께 마음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정신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는 것이며”(요1:29) 남은 평생 그렇게 바라보길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힘들 수도 있지만, 중압감을 떨치고 이 놀라우신 분을 조용히 계속 바라보다 보면 점점 수월해집니다.
영혼의 응시(凝視)가 왜 필요합니까?
1)예수님은 믿음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이십니다. 이 한 마디 속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주’라는 말은 ‘ajrchgov"(아르케고스)’라고 합니다. 아르케고스는 아르코(a[rcw, 통치하다)와 헤게오마이(hJgevomai, 지도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통치자 ruler, 인도자 leader.’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치하시는 분이시며, 인도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 분의 통치아래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정말 여러분은 그 분의 통치아래 들어가 있습니까? 그 분이 시키는 대로 살고 있습니까? 힘들고 고단하고 피곤하여도 새벽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아까워도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고 있습니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있습니까? 진실로 예수님을 믿음의 주로 여기고 있습니까?
스펄전 목사님은 교회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예수님에게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부터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집이니까 하나님을 보는 듯이 늘 인사부터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처럼 행동하였다고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신 것으로 알고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 분의 통치를 받는 생활입니다.
2)예수님은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온전하게 하시는 이’란 ‘teleiwthv"(텔레이오테스) ’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완성자, 완전케 하는 자, perfecter.’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완성자이십니다. 온전하게 하시는 이입니다. 어떻게 완성하셨을까요? 십자가에서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가운데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은 ‘televw(5055, 텔레오)’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끝내다 bring to an end, 끝나다 finish, 완성하다 complete, 수행하다 carry out, 성취하다 accomplish.’등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온전하게 하시는 이입니까?
(1)영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담은 죽이는 영이고 예수님은 살리는 영입니다. 불을 붙인 촛대는 빛을 내는 것처럼 예수님에게 닿은 영혼은 산영이 된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은 영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일본 카토릭 작가 엔도 슈사꾸가 쓴 소설 <침묵>은 세계적인 명작입니다. 물론 베스트 셀러입니다. 일본 기독교인들의 순교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소설 속에 이런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기독교인들을 모두 체포하여 세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예수님 얼굴을 동판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얼굴을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그냥 지나가면 사형을 시키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교도 판별법이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포르투갈 신부 로드리고도 후미에도 앞에 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밟혀서 일그러진 예수님의 얼굴은 울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는 차마 예수님 얼굴을 밟을 수가 없어서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 상이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주저하지 말고 나를 밟아라. 본래 나는 밟히기 위하여 이 땅에 온 몸이다.> 로드리고가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언제까지나 결정적인 순간에도 침묵하셨기에 나는 괴로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침묵한 것이 아니다. 너희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드리고가 예수님 상을 밟는 순간에 닭이 울었습니다. 새벽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들려주었던 닭울음소리였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처럼 그는 통곡을 하면서 나중에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영이 온전하여 지는 순간이었습니다.
(2)정신(마음)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모든 면에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시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는 영이 파괴되고 정신(혼)이 파괴되었고 육이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살던 영이 파괴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신 즉 혼이 파괴되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부부로 맺어 졌을 때에는 <내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라고 고백하였던 아담이 하와를 향하여 <저 여자가 선악과를 따주어서 먹었나이다.>라고 여자 핑계를 댔습니다. 하와는 <내 책임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뱀이 따먹으라고 하여서 따먹었다고 뱀 핑계를 댔습니다. 사랑의 관계가 증오의 관계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영이 파괴된 후부터 정신(혼)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만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혼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비정상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온전케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임재하시면 악한 생각이 선한 생각으로 회복됩니다. 부정적인 정신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게 됩니다. 절망이 소망으로, 문제가 해결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은 혼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신을 온전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3)육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영이 파괴된 된 후 혼이 파괴되고 육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려면 병들어 죽어야 했습니다. 그 때부터 육체가 파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혼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자 육도 온전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병에 들었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기계를 제일 잘 고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 기계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 건물을 지은 사람이 그 건물에 하자가 있을 때 가장 잘 고칠 수가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정비공장도 없는 시골길을 달리다가 자동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여 보아도 도저히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난감하였습니다. 그 때 한 신사가 지나가다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그런다고 말했습니다. 신사는 차에서 내리더니 보닛을 열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 같은 신사가 자동차를 고칠 수가 있습니까?> 그는 비웃으면서 보닛을 열었습니다. 그 신사가 몇 가지만지더니 시동을 걸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시동을 걸었더니 걸렸습니다. 그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당신 같은 신사가 이렇게 쉽게 자동차를 고칠 수 있습니까?> 그 신사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이 자동차를 만든 헨리 포드요.> 자동차를 만든 사람이 자동차를 가장 잘 고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몸을 만드신 예수님은 우리 몸을 가장 잘 고칠 수가 있습니다. 채찍에 맞으면서까지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4)모든 일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 육을 온전케 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영혼육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일도 온전하게 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안 되던 일이 됩니다. 막힌 일이 뚫어집니다.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한 일이 풀어집니다. 도저히 전진할 수 없는 일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만사를 다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영혼 육을 다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면서 어떤 일이든지 잘 풀어지게 만들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응시가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과 나의 내면의 눈이 만나는 것이라면, 그보다 더 쉬운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가장 긴요한 일을 쉽게 만드신 것, 가장 약하고 불쌍한 자들도 할 수 있는 일로 만드신 것이야말로 하나님다우신 처사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믿음이란 단순한 것입니다. 믿는 것은 보는 것이므로 특별한 장비나 종교적 설비가 없어도 됩니다. 하나님은 생사를 가르는 이 본질적인 문제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불의의 사고에 좌우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장비는 고장 나거나 분실될 수 있고, 물은 샐 수 있으며, 기록은 소실될 수 있고, 목사는 지각할 수도 있고, 심지어 교회는 불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는 것은 마음의 일이기에, 서 있든 엎드려 있든 교회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임종의 고통 속에 누워있든 상관없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믿는 것은 보는 것이므로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이 일에는 더 나은 시기라는 것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장소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도 그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적으로 하나님을 응시하는 습관이 우리 속에 굳게 자리 잡을 때, 하나님의 약속과 신약성경의 분위기에 일치하는 영적 생활의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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