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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12장 1-2절(예수를 바라보자!) - 최태선

by Preacher 2023.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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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2장 1-2

예수를 바라보자!

최태선 목사 2005.01.26.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몇 해 전에 존 에프 케네디 2세와 그의 아내 케롤린 그리고 그의 누이가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시계가 흐릿한 야간에 바다 위로 자가용 비행기를 몰았습니다. 그런 조건에서는 절대로 사람의 감각에 의지하지 말고 계기에 의한 비행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감각에 의존해 비행기를 몰다 결국 바다로 추락하였던 것입니다.

 

시계가 제로이고 폭풍이 휘몰아칠 때 조종사는 본능적으로 계기판의 인공수평의(artificial horizon)에 집중하게 됩니다. 조종사의 감각이 어떠하건, 앞 유리창에 무엇이 보이든 비행기의 위치와 비행고도를 유지해주는 것은 바로 이 계기입니다. 때때로 조종사는 비행기가 급강하하거나 뒤집힌 상태에서 날고 있는 착각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종사는 계기에서 눈을 떼지 말고 거기에 반응하며 운항해야 합니다. 그런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사람이 어떻게 느끼냐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계기가 어떻게 말하는가가 핵심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감각과 경험에 의존해 결정을 내리면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도 않고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인도자 되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 당신을 따라오라고 요청하시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집중하고, 자신을 보지 않고 그분만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삶의 형태가 된다면 우리는 아무리 어두운 암흑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을 신뢰할 때, 우리는 일시적인 불편함이나 어려움 때문에 방향을 쉽게 바꾸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자기의 경험과 감각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는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에서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제 2차 전도 여행 을 하고 있던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하던 당시, 그는 방금 아덴에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아덴에서 바울은 자연 신학을 이용해 그리스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하여 실의에 빠져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역사를 통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는 대화가 발달한 나라였습니다. 바울이 그곳에서 전도를 하려고 할 때, 그는 한 비문을 통해 이름 모를 신에게 드려지는 기도문을 보았습니다. 아는 것이 많았던 바울은 자신의 세상 지혜를 활용하여 인간적인 대화로 그들에게 접근하였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그들을 설득시켜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복음을 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도덕한 성 윤리가 활개치던 음란한 도시 고린도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바울은 그런 세상적인 접근법을 포기하고 오직 십자가의 어리석음만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통쾌한 역설법으로 고린도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18-25)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고린도에서의 복음전파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리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적으로 복음을 바라보면 그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힘들고, 너무나 따라가기 어려워서 그것을 피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그 당시의 고린도 보다 더욱 더 강한 표현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미쳤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현대인들에게는 완전히 미친 짓거리요....거리끼는 정도가 아니라 '접근 금지', 혹은 '접근 불가'라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복음이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과 실패를 경험하면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두려워지게 됩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 참을 수가 없습니다. 곧 죽을 것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마치 존 에프 케네디 2세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감각을 의지하기로 결정합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길을 피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케네디 2세가 맞았던 바로 그 결과입니다. 추락하는 것입니다. 살려고 했지만 죽고 마는 것입니다. 슬픈 감정이 북받치고, 생각은 어리둥절해지고, 균형감각이 심하게 흔들릴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최종적인 척도이신 예수님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이 아무리 바뀌더라도 주님은 바뀌거나 실망시킬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시선을 예수님께 집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당신의 관심을 예수님께 쏟으라는 뜻입니다.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중단 없이 추적하라.' '주위에서 우리를 심난하게 하는 일이 내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더라도 이 일을 중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실제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지금 필요한 것은 돈입니다. 당장 돈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라니요? 예수님을 바라보면 정말 돈이 떨어집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좀 더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예수 믿으면 돈이 생깁니까? 아니면 쌀이 생깁니까?" 그것에 대해서 저는 '예, 그렇습니다.' 라고 정확하게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당장 돈을 주실 지 안 주실 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 때 당장의 결과에 관계없이 더 완벽한 해결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 예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그리스도인이면 거의 누구나 암송할 수 있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앞절인 14절과 15절을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은 민수기 21장 4절로 9절까지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여 기록된 기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아마 그 길이 좀 험난했나 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 문제로 인해 마음이 상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의 단골 메뉴가 또 등장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민21:5) 급기야 그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 기적의 선물인 만나까지도 싫어한다고 말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들의 원망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 백성을 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그제서야 백성들은 다시 모세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 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그러자 모세는 다시 백성들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았습니다.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리라" 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해독제를 먹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뱀을 쫓아버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뱀에 물리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뱀에 물리면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다만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뱀에게 물립니다. 병에 걸립니다. 경제적 파산을 당합니다. 각종 사고도 당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이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유효하냐 유효하지 않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저는 오늘 믿음에 관한 전반적인 묵상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수적인 사실 하나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믿음의 주님을 만나면 우리는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정체성의 변화입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가 가지게 되는 정체성은 믿음생활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변화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도 나는 과연 주님이신 그분을 만났는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토마스 머튼은 "나는 그리스도께 사랑 받는 자"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받는 자'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참 자아의 기초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나는 사랑 받는 자'라는 인식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영성이란 삶의 한 부분이나 영역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성이란 생활방식입니다. 믿음의 비전으로 살아가는 삶의 과정입니다. 신성함이란 나의 참 자아를 발견하고 그것을 지향하며 그대로 살아나가는 데 있습니다. 믿음이란 나의 참 자아를 발견하고 참 자아에 걸맞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나의 참 자아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머튼은 '그리스도께 사랑 받는 자'라고 답한 것입니다.

 

청소년 특수단체의 창설자인 마이크 야코넬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낙심에 빠지고 사기가 떨어졌을 때, 그의 아내 칼라와 함께 캐나다 토론토의 라르쉬 공동체에서 5일간 회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는 그곳에 살고 잇는 정신장애인과 신체장애인들로부터 영감을 얻거나 또는 헨리 나우웬의 모습과 설교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마음에 그곳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자신의 참 자아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불과 몇 시간만의 침묵으로 내 영혼의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저 짧은 시간 혼자 있었는데도 내가 혼자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내 삶의 소음 너머로 늘 말씀하고 계셨으나 내가 듣지 못했다. 그러나 정적과 고독 속에 서자 내 영혼에서 그분의 속삭임이 크게 들려왔다. "마이클, 내가 여기 있다. 늘 너를 불렀으나 네가 듣지 않았다. 이제 내 말이 들리니, 마이클? 나는 너를 사랑한다. 언제나 너를 사랑했다. 네가 이 말을 들어주기를 나는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너는 네가 사랑 받는 자임을 자신에게 입증하느라 너무 바빠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잠자던 내 영혼에 탕자의 기쁨이 밀려왔다. 나를 찾고 기다려 오신 사랑의 아버지 앞에 내 영혼은 깨어났다. 드디어 나는 내 깨어진 모습을 받아들였다..... 한 번도 그 부분이 정리된 적이 없었다. 설명하면 이렇다. 나는 내가 깨어진 자임을 알았다. 내가 죄인임을 알았다. 내가 늘 하나님을 실망시킨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나의 그 부분을 한번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 부분은 나를 당황케 했다. 왠지 늘 사죄하고 내 약점에서 달아나야 할 것 같은 기분, 내 현재의 모습을 외면하고 앞으로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에 주력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분명 깨어진 자였다. 그러나 나는 다시는 깨어지지 않으려- 적어도 거의 깨어지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려-늘 발버둥치고 있었다....."

 

자 여기까지 들으신 느낌이 어떠십니까? 여러분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에는 너무 분주합니다. 그분을 위한 시간을 내어드리지 않기 때문에 그분의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기도하는 시간에도 내 할말만을 속사포처럼 내뱉고 '기도 많이 했다. 기도 다 했다.' 하고 대견해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도무지 주님께서 말씀하실 기회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마이클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 공동체에서 멈춤의 시간을 갖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던 자신의 깨어진 모습을 비로소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모두 벗어버리고 그 속에 숨어있는 자신의 참 모습을 본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 동안 쌓아놓은 모든 더러운 것들, 마음의 상처, 덕지덕지 싸놓은 합리화, 방어기재들을 걷어내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은 분명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 받는 주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 모든 것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치유는 바로 여기서부터 일어나는 영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라르쉬에서 나는 내가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음을 아주 분명히 깨달았다. 내 깨어지고 무력하고 연약한 모습 속에서 예수님이 강해지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내게 믿음이 부족함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내게 믿음을 주실 수 있다. 내 깨어진 모습을 끌어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의 깨어진 모습에 동화될 수 있다.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아니라 동화되는 것이 내 역할이다. 사역이란 지배가 아니라 나눔이고 신학이 아니라 이해이며 교정이 아니라 돌봄이다.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그것은 잘못된 물음이다. 나는 누구나 삶의 어느 시점에 인생노선을 조정한다는 것을 알뿐이다. 내게는 그때가 그런 시점 중 하나였다. 내 인생의 지도를 본다면 경미한 방향 조정 외에 다른 변화는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크게 느껴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 삶 속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기대와 감격이 있다 전에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난생처음 날마다 예수님의 이런 속삭임을 들을 수 있게 됐다는 고백뿐이다. "마이클,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다." 왠지 그것으로 족한 것 같다."

 

그의 이야기는 꾸밈이 없습니다. 가식 없는 인간의 향기가 뿜어져나옵니다. 경건한 척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은그슬쩍 겸손한 척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 뭔가가 달라졌습니다. 토론토의 한 겨울 밤에 흙으로 만들어진 질그릇 하나가 자기가 사랑 받는 자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변함없이 생활하고 활동하지만 그의 영혼은 영광에 덮여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애정이 마이클이 그 동안 쌓아온 벽을 허문 것입니다. 그에게 앞으로도 이따금씩 거짓 자아가 다시 찾아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자신의 참 자아는 그가 믿음의 주이신 예수를 바라보며 살아갈 때 그를 흔들리지 않도록 해주는 무게추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마이클 야코넬리가 들었던 그 음성을 여러분도 듣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입양되기를 원하는 고아가 생각났습니다. 어떻게 하든 양부모가 될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무언가를 해서 그들을 감동시키고,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가련한 고아가 생각났습니다. 진짜 자녀는 절대로 그런 노력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 받고 있다는 편안함 속에서 꾸밈없는 삶으로 부모에게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려는 자연스런 삶이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진짜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받는 자임을 마이클이 느꼈던 것처럼 깊게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생각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사랑 받는 자임을 확신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변화됩니다. 끊임없이 인정받고, 끊임없이 이겨야 하는 경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숙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성숙이란,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기꺼이 이끌려 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먼저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섬김의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섬김의 지도자는 자신이 모르고 또 바라지도 않는 고통스러운 곳으로 이끌려 가는 지도자라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지도자의 길은 이 세상이 그토록 강조하는 성공하고, 출세하고, 끝없이 경쟁하며 올라가는, 상향적인 길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끝나는 하향적인 길입니다. 어쩌면 이 말이 좀 병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학대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존재를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하향적인 길이 곧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인 것입니다. 그 평화와 기쁨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그 길을 걸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온전함이란 힘과 지배력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무력해지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환경의 수동적인 희생물이 되는 그런 나약한 모습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 받는 자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자가 되어, 사랑 때문에 힘의 사용을 계속적으로 포기하는 그런 온전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영적인 온전함입니다. 영적인 삶에서 힘이 없다는 것과 겸손하다는 것은 줏대 없이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서 모든 결정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용서받고 사랑 받는 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예수님을 깊이 사랑해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분을 따를 준비가 되었으며,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써 생명을 찾고 또 풍성히 찾을 것이라고 언제나 믿는 그런 사람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양식이나 주머니나 돈이나 여벌옷도 가지지 말고 지팡이 하나만을 가지고 여행하는 철저히 가난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왜 가난해져야 합니까? 가난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가난은 우리로 하여금 인도 받는 자가 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 도구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원하시는 곳으로 바르게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풍요와 부는 예수님의 길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6:9)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절대로 비관주의자나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하는 그런 목사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기 원하고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순종하며 살기 원하는 사람일뿐입니다. 내가 나를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그분이 나를 온전케 하시는 분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전에 우리 교회에 다니던 한 집사님의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연세가 많이 드셨고 한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믿음 생활도 노년에 들어서 시작한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성경말씀을 암송하셨습니다. 시편 1편과 시편 23편이었습니다.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훌륭한 목회자를 그분이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편 일편은 복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입니다. 시편 23편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를 향해 나를 똑바로 바라보시며 서 계시기 때문이라는 믿음의 고백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만약 그분이 자신이 암송하는 말씀대로 그렇게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고 세상의 어떤 어려움에 처할지라도 자신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고백할 수 있다면 그 믿음은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인가요?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떤 마을에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동네 앞 산 위에는 사람의 얼굴이 새겨진 것같은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마을에서 그 바위의 얼굴을 가진 위대한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위대한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돌아올 때마다 기대감을 가지고 큰바위 얼굴과 그 사람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큰 바위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바위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다름 아닌 어니스트였습니다. 그는 날마다 그 바위를 쳐다보며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산 평범한 그 마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래 같이 사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며 어쩌면 얼굴이 저렇게 똑같으냐고 감탄하는 적이 있습니다. 날마다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모르게 닮게 된 것입니다.

 

이제 새해를 맞아 첫 번째 달을 지나며 저는 여러분들이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어려울 때도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기쁠 때에도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은 변화될 것입니다. 그분을 닮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여러분,

 

현실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지성을 의지하고, 세상의 지혜를 신뢰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감각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사는 길을 택한다면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날마다 그분을 바라보며 우리의 삶의 방향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 받는 자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그분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 영원을 살아가는 영광스런 존재로 거듭날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이 히브리서 기자의 외침이 올 한해, 여러분의 날마다의 삶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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