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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12장 1-3절(마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라!) - 이삼규

by Preacher 2023.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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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2장 1-3

마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라!

이삼규 목사 20180812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미국의 존 맥스웰 목사가 오하이오에서 목회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냥꾼으로 유명한 교우와 함께 100리쯤 쭉 뻗은 고속도로를 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교우의 특별한 면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기 다람쥐가 있네요.” 그러나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저기를 보십시오. 오리가 두 마리나 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여전히 보지 못했습니다. “목사님, 사슴을 보십시오.” “토끼가 지나갔습니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사냥꾼 교우는 십여 마리의 짐승을 봤습니다. 그러나 같은 길을 같은 차를 타고 가면서도 사냥꾼은 쉽게 보는 것을 맥스웰 목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오직 고속도로뿐이었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 본 것을 열 사람의 정탐꾼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앙인은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졌다는 것은 마음의 눈을 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봅시다!’ 할렐루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중요한 것들을 요약한 것이 바로 교리입니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및 대소요리문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만들어낸 중요한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나온 교리들이 많이 있지만 윗자리를 차지하는 교리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보통 교의는 서론, 신론, 인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내세론(박형룡박사 교의신학)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인이 됩니다. 죄인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아들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 사함 받고 구원받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되고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 된 인간이 구원받는 길은 오직 믿음에 있습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내게 무엇이든지 줄 수 있고, 나를 어디든지 데려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죄 사함, 해방, 구원, 교제, 영적 생활이 전혀 불가능하게 됩니다. 믿음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믿음이 하나님을 찾는데 그토록 필수적인 것이라면 한 가지 중대한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데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이 지극히 중요한 선물, 즉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아멘입니까? 믿음이 무엇인가? 자신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하려면 먼저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뭡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성경이 진실하다고 간주하고 거기에 근거하여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정의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성경이 내리는 믿음의 정의는 믿음장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서 11장 1절에 나타납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런데 이 말씀조차 믿음을 철학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기능적으로 정의합니다. 즉,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고 믿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말합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고, 믿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후 그 믿음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보여줍니다. 우리는 칼빈주의의 원리를 따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가는 데까지만 가는 것입니다. 그 이상 가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또는 어떤 수단을 통해서 오는지를 말해줍니다. “[믿음은]…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여기까지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나는 믿음의 정의를 아는 것보다 차라리 믿음으로 사는 편을 택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다”라는 표현이나 그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면 그것이 바로 신자에 의해 발휘되어 활동 중인 믿음을 가리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이제부터는 믿음의 정의에 대해 더 이상 매달리지 않고, ‘활동 중에 체험되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믿음은 활동(活動)한다!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극적인 이야기는 믿음이 ‘활동하는 믿음’으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땅을 통과하여 전진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길은 왕의 대로(Kings Highway)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을 통과하지 못하게 에돔족속이 막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우회를 하게 됩니다. 길이 없는 험지를 통과해야 하는 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50도가 넘는 아라바 광야 길에서 원망은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아랏 왕을 이기고 반나절만 올라가면 헤브론에 이를 수 있는데 “뒤로 돌아가라”하시므로 남쪽 광야를 돌게 되었으니 볼멘소리가 나올 만 했습니다.

 

민 21: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민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그래도 하나님은 불평과 원망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민 21: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홍해 길에 있는 팀나의 구리광산에 위치한 미디안 사람들의 신전에서 놋뱀이 발견되었는데 12cm 밖에 안 되는 크기는 시사 하는 바가 큽니다. 모세가 그들을 위해서 간구했고, 그분은 불뱀에 물린 자들을 위해 치료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민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불뱀 모양의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놓았습니다. 불뱀의 실물 크기가 몇 센티라고 했습니까? 12센티 정도 됩니다. 그러면 그 놋으로 만들어 장대에 매단 놋뱀이 잘 보이기나 했을까요? 아마도 멀리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사람들은 화려함이 아닌 소박하고 저주스러운 뱀을 바라보며 구원을 얻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을 제시해 주신 권위자가 계시는데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구원 얻는 방법에 대해 청중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믿음이었습니다! 이 점을 아주 분명히 하시고자 그분은 민수기에 나오는 사건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셨습니다.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서 우리 깨달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보는 것”과 “믿는 것”은 동의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놋뱀을 보는 것이 바로 신약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즉 보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육신의 눈으로 보았지만, 믿음은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인간의 마음이 구원의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시 34:5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시 123: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 123: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언제나 하나님을 보셨습니다.

 

마 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실로 예수님은 마음의 눈으로 항상 성부 하나님을 바라보셨기 때문에 그분의 사역이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이 그분의 능력의 비결이었습니다.

 

요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 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요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오늘 본문은 믿음이 한 번에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속 바라보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마음의 관심을 예수님께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들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을 보는 것이며, 그 시선을 평생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처음에는 어렵지만, 그 아름다운 분을 조용히, 편안히, 꾸준히 바라보면 점점 더 쉬워집니다. 때로는 이런저런 일들이 끼어들어 집중을 방해하겠지만, 일단 마음이 그분께 고정되면 잠시 다른 곳으로 가서 방황하다가도 다시 그분께 돌아와 머물게 될 것입니다. 마치 멀리 가서 떠돌던 새가 다시 돌아와 창가에 앉듯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마음의 눈을 열어 믿음의 주님을 바라보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바라볼 때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이 살아나지 않았습니까? 믿음은 이와 같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을 그분께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이 중요한 의지적 행위는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겠다는 의도를 확고히 굳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시선을 재조정하는 것이다!

 

믿음은 공로로 인정받을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공로는 믿음의 대상이신 ‘그분’(the One)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시선을 재조정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맞춰진 초점을 바꾸어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왜곡된 우리의 마음은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불신앙으로 인해 자아는 본래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를 대신 우리가 차지한 것입니다. 이러한 불신앙은 ‘내가 …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사14:13) 라고 말한 루시퍼(계명성)의 죄에 근접하는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헤롯왕은 가이사랴에서 은빛 찬란한 옷을 입고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열광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고 영광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충이 먹어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을 때 고넬료가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렸습니다. “나도 사람이라 일어서라”

 

바울과 바나바도 전도 여행 중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쳤을 때 그 지방 사람들이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하고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러나 옷을 찢으면서 말렸습니다. 베드로나 바울 바나바는 오직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우리의 시선을 재조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맞추어진 초점을 그리스도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 믿음이라면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시선과 마주치기 위해서 내면의 시선을 들어 올려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보는 것이 믿음이므로 특별한 장치나 번잡한 종교적 절차 없이도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생사를 결정짓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믿음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사고(事故)에 종속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기계는 고장 나거나 분실될 수 있고, 물은 새서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달리는 자동차가불 타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BMW 자동차를 불자동차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목사도 약속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 건물도 불에 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인간의 마음 밖에 있는 것으로서 기계적 고장이나 사고에 취약합니다. 하지만 보는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수천 키로 떨어져 있어도 마음의 눈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며칠 전 모처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님이 우리교회 카페에 자신들의 이름과 사진이 올려져 있어 검색을 당할지 모르니까 이니셜을 이용하든지 삭제해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먼 곳에서도 우리교회 카페를 보는구나. 그렇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은 언제 어디서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는 믿음의 연합

 

우리의 삶 속에서 매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강조한다고 해서 은혜의 일반적 방편들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분명히 가치가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개인 기도를 늘 실천해야 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면 영적 시선이 깨끗해지고 제대로 방향을 잡게 됩니다. 교회에 꾸준히 출석하면 시야가 넓어지고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이 많아집니다. 봉사와 사역과 각종 활동은 모두 선한 것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의미를 가지려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내면적 습관이 그것들의 뿌리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영적 눈이 열리면 육신의 눈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이 세상의 일들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이는 “그런 식으로 나가면 개인적 신앙을 기형적으로 강조하게 되어 신약 성경의 ‘우리’가 이기적인 ‘나’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걱정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100대의 피아노가 모두 하나의 소리굽쇠를 기준으로 조율된다면 그 100대는 서로 음이 동일하게 맞게 됩니다. 100대가 서로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준을 정해 그것에 따르기 때문에 결국 모두 동일하게 소리를 내게 됩니다. 이처럼 100명의 예배 자가 모여 각자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어 서로를 바라볼 때보다 오히려 더 가까워집니다. 개인의 신앙이 순수해지면 공동체의 신앙도 완전해지는 법입니다. 몸의 각 부분이 건강해지면 몸 전체가 더 튼튼해집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더 성숙하고 더 훌륭한 삶을 추구할 때 교회 전체가 성장합니다.

 

내면의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습관이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면, 하나님의 약속과 신약의 분위기에 더욱 부합하는 새로운 영적 생활로 발돋움하게 될 것입니다. 일상적인 일들로 가득한 세속의 길거리를 세상 사람들 속에 섞여 걸어갈 때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인생의 최고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주님이시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십니까? 주님의 보혈로 정결하게 되어 내면이 깨끗하게 되면 베일이 걷힌 눈으로 주님을 항상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주 만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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