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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5장 8절(고난과 순종) - 최태선

by Preacher 2023.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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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5장 8

고난과 순종

최태선 목사 2007.8.26.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건강히 잘 있으니 걱정 마세요. 잘 먹고 편히 있어요. 아프지 마시고 편히 계세요.”

 

아프간에 억류되어 있는 이 지영 자매의 편지입니다. 짧은 글입니다. 하지만 모든 걸 담았습니다. 마지막 순교를 앞두고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보낸 디모데후서의 분위기를 그녀의 이 짧은 글을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부모와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녀의 믿음이 얼마나 담대한지가 느껴집니다. 가슴 시리도록 애절한 그러나 용기 있는 그녀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억류에서 풀려나 귀국한 김 경자, 김 지나 자매를 통해 전해들은 그녀의 믿음과 용기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자신이 아프간에 가장 오래 있었기 때문에 현지 사정에 익숙하고, 아프간 말을 더 잘 할 수 있어 그곳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지옥과도 같은 그곳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다른 동료에게 넘긴 것입니다. 건강이 안 좋기는 그녀가 먼저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자신은 많이 좋아졌으니 건강이 악화된 다른 동료를 먼저 풀어 달라고 탈레반 측에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분명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기껏해야 그들의 눈에는 이 지영 자매의 그런 행동이 호승심 정도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놀랍도록 분명한 믿음의 선택이며 진리의 길을 걷는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놀라운 희생입니다.

 

믿음은 또 다른 믿음을 낳습니다. 그런 믿음을 목격한 석방된 두 자매는 자신들이 풀려난 사실보다 억류되어 있는 동료들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들은 어떤 관계가 될까요? 설사 억류된 사람들이 모두 살해되어 이 지영자매를 다시는 못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그녀의 덕으로 풀려난 자매의 삶은 앞으로 얼마나 달라질까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참 믿음이 가지는 놀라운 힘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2)라고 말씀하신 그 사랑을 우리는 이 시대에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참 제자의 모습을 우리는 이 시대에 다시 보는 것입니다. 아프간의 작은 예수, 우리는 이 지영 자매를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의 길을 택한 그들에게 닥친 것은 그러나 형통이 아니라 고난이었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과정만을 놓고 본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그들이 당한 고난의 의미와 유익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당한 극한 어려움이 이유 없는 헛된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쉽지 않습니다. 이미 순교를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난이 그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고난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성경은 어떤 형태의 고난이든 고난 자체를 미화하지는 않습니다. 고난은 타락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에덴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 고난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난은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의례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인생을 ‘고’라고 말합니다. 불교는 그들의 주장대로 과학입니다. 그들의 인생에 대한 관찰과 이해는 정확합니다. 아무도 인생의 고난을 면제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도 같은 말을 합니다. 로마서 8:15-17은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라고 말합니다. 고난은 타락한 세상에서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의 필수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지적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행14:22)

 

그리스도인은 분명 고난을 겪습니다. 고난에 관한 성경의 말씀들을 잘 읽어보면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난을 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의에 의해서도 고난을 받게 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능력이 그들의 삶에 역사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다른 세 가지 형태의 고난을 겪게 됩니다.

 

첫째, 로마서 8장 18절로 25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소망 때문에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임재 안에서 살아갑니다. 성령은 지난 주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영광스런 미래를 보장하는 계약금과 같습니다.(고후1:22, 엡1:13)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어떤 바람과 기대를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그리스도를 대면하게 될 때 어떤 삶이 펼쳐질지 어렴풋하게 짐작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경건치 못한 세력이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를 보았기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합니다.(벧후3:13)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일상의 성공이나 자랑 따위가 오히려 고통스러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이생의 자랑이 되거나, 소망을 잊고 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로역정에서 말하는 장망성(장차 망할 성)에서의 성공은 오히려 천성을 향해 가는 여정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고상한 차원이 있음을 압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고 그것을 현실보다 더 실상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산모가 해산의 고통을 겪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를 탄식하게 만듭니다. “자녀로 삼아 주실 것과 우리 몸을 속량해 주실 것을 고대하며 속으로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롬 8:23)

 

둘째,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세상에서 의를 위해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벧전3:14-17)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그리스도를 닮아 갑니다. 그러면 그들의 모습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당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또한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고 말합니다. 경건하게 살기 때문에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따돌림을 당하고 요즘 아이들처럼 ‘왕따’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15:20)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는 말은 우리 또한 예수님과 마찬가지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의 길을 따라갑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핍박하고 배척하였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종인 우리들 또한 핍박과 배척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주님의 말을 따르는 적은 무리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종이며 제자인 우리들의 말을 들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의에 사로잡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에게 폐를 끼쳐 기피 인물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 중략-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살전4:11-12)라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모든 삶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7-18)고 가르쳤습니다. 기피 대상이 되는 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으뜸가는 목적은 “우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우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마5:16) 것입니다.

 

이 같은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의를 위해 고난 받는 일이 포함됩니다.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은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찾아드는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빛 가운데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수호하려는 대조적인 삶의 방식으로 어둠의 일을 드러내야 합니다.(엡5:8-11, 고전16:13, 갈2:4-5, 빌3:16-4:1, 유3-4, 게2:2)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힘없는 자들과 권리를 빼앗긴 자들을 보호해야 합니다.(신10:19, 24:14, 17, 시68:5, 146:9, 사1:23, 약1:27) 빛과 어두움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입니다. 이 같은 갈등이 일어날 때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거의 모든 경우 불신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그 같이 행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2절로 2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느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롬12:19, 레19:18) 하나님의 백성들이 앙갚음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진리에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악을 바로잡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선을 베풀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악을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자기숭배에 빠져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오늘날의 풍토에서 그런 처신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진리를 행하다 고난을 받게 되더라도 인내해야 합니다. 축복해야 합니다. 원수의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에서 고난을 겪게 됩니다.

 

사람들은 양초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위할 때나 애도를 표할 때 양초를 들고 나옵니다. 양초는 자신을 태워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양초와 같습니다. 스스로를 태워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 헌신하느라 괴롭힘을 당하고, 배척당하고, 심지어 감옥에 갇히거나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아프간 피랍의 경우처럼 억울한 경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일들은 오히려 당연한 일들입니다. 초창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때문에 사회에서 매장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도 모진 고통을 겪었습니다. 순교는 항상 그리스도인들 곁에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 온 ‘교회는 순교자들이 흘린 피로 세워졌다.’는 말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허드슨 연구소의 연구원인 마이클 호로비츠에 의하면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15만 9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순교하며, 2억에서 2억 5천만 명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적 정치적 박해를 받으며, 4억 명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음 놓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그의 말을 이어갑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전 세계적으로 자행되는 마당에 이를 쉬쉬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기독교 공동체가 점차 그 힘이 약해지면서 구타당하고, 약탈당하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노예 상태가 되고, 살해당하고, 심지어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일이 비일비재한 현실에서, 서구의 엘리트 계층은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는 생각이 유대인인 내 뼛속에 사무친다.” 호로비츠는 그의 조부모와 함께 폴란드 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끔찍한 박해를 생각하며 이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박해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강하게 저항해야 하지만 그러한 고난이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거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는 결과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똑같이 순교자의 길을 걸었던 베드로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이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2-16)

 

예수를 좇는 삶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령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고난 속으로 인도하시거나 고난의 상황을 통해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지은 죄와 타락한 세상 때문에 죄 값을 치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여”(히12:10)할 수 있도록 그분이 주시는 고난에도 참예하게 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 때문입니다.(히12:6, 잠3:11-12, 수8:5, 계3:19) 이 같은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롬8:29)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신”(눅2:52)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신”(히5:8)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또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순종을 말합니다. 하지만 순종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너무도 많은 거짓 선생들이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왜곡된 진리를 외치기 때문에 순진한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이기심과 욕망에 빠져 곁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분 외에는 궁극적인 인생의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배운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순종은 의지와 결단만으로는 배울 수 없습니다. 반드시 고난이라는 깨어짐을 통해 우리는 비천한 자리에서 순종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꼼짝도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변화되어 순종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시라도”라는 말씀은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보다 더 귀한 사람이 없으므로 누구라도 예외 없이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온갖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앞으로 닥칠 일로도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를 간절히 바라셨지만 인간이 반역하고 죄짓는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눅19:41) 그분은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아셨지만 그의 무덤에서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의 유혹에서부터 겟세마네 동산의 유혹과 죽음 그 자체를 껴안기까지, 타락한 세상의 영향을 받으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의를 위해 무수히 고난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실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옳은 일을 하다 부당하게 박해를 받은 것이지만 묵묵히 인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기름부음을 받으셨기 때문에 평생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뜻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만물을 지으신 유일하신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고난 같은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기독교를 배워왔습니다. 예수 믿고 좋은 대학 가고, 예수 믿고 출세하고, 예수 믿고 골 많이 넣고, 예수 믿고 병고치고, 예수 믿고 상처를 치유 받고(춤까지 춰가며) 뭐 그런 이야기만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간증하고, 그런 사람들이 감사하는 모습을 보고 주눅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신화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대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차지하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다시 전적으로 하나도 남김없이 돌려받으시기 위함입니다. 누구든지 이에 반발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욕구를 버리지 않는 사람은 창조의 질서에 대항해 하나님께 절도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께 드려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기를 원하고 사랑하기를 원하면서도 자신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자신들의 뜻대로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스스로가 주인임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만족시키실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인도하실지 그 방법을 자신들이 직접 결정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은 분명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려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아무리 외형상 열심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혼들을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분이 우리 영혼을 고난의 길로 떨어뜨리는 목적은 우리를 정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정화를 위한 하나님의 수술 작업이 혹독한 이유는 우리에게 있는 질병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면에서 온전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서 죽어져야 할 것들과 나쁜 종양들만을 제거하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되도록이면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얼마나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부분을 살리시지만 또한 그만큼 혹독하게 고난을 당하도록 하십니다. 우리를 치유할 목적으로만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은사를 거둬 가시더라도 나중에 그것을 백배로 돌려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혹독한 시련을 주실지라도 우리는 행복한 자들입니다. 이때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주저함이나 반항심을 보게 된다면 우리의 선함은 결국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이 한량없이 우리의 마음속에 물밀 듯이 파고 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에서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저하거나 스스로 걱정하며 두려워하는 대신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사랑에 충만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당신의 손을 잡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어지니교회의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볼 때, 참 많은 아쉬움들이 남습니다. 목회자로서 떠나간 분들에게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고난이었습니다. 그 고난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고난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고난의 강도를 조절해주셨습니다. 우리가 견딜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르면 주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견딜 수 있는 인내가 생기면 강도를 높여 우리를 힘들게 하셨습니다. 순종을 배운 것입니다. 만일 고난이 아니라 성공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우리는 지금 행복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또한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처럼 세상의 방식을 따르는 소망 없는 거짓의 길을 걷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고난으로 순종을 배운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참 그립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만나 성령공동체를 이루는 우리 어지니교회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이 지영 자매 같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날 것을 기다리지 말고 부족하지만 제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그런 목사가 되면 어지니교회 성도들 또한 그런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어지니교회는 우리가 목표하는 대로 성령공동체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아들이시면서도 받은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인생에 고난을 만나셨습니까? 온전히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손길에 여러분을 온전히 내어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완벽한 외과의사입니다. 비통한 감정들이 솟구쳐 나올 때도 잠잠히 주를 바라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스스로 심기 원하는 것들을 제거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분의 생명나무가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심기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약한 의지가 그분의 전능하신 의지에 접목되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수행될 때 우리는 온전히 만족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형용할 수 없는 평화와 위안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전 생애가 항상 감격에 넘치는 아멘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한 복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평강으로 세상을 밝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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