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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6장 1-2절(초보에서 벗어나 성숙으로 가는 길) - 이삼규

by Preacher 2023.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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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6장 1-2

초보에서 벗어나 성숙으로 가는 길

이삼규 목사 20140119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히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히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여러분 가운데 자신의 말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이해시키려고 애써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한참 열변을 토했는데 그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그러했습니다.

 

히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할 말이 많은데 너희가 우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참으로 답답하다.”라는 식으로 푸념하듯이 말합니다.

 

히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여기에서 “너희가···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그들은 ‘젖을 떼고 단단한 식물을 먹을 자’의 수준이 되었었는데 안타깝게도 다시 젖을 먹는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어느 정도 성장했다가 뒷걸음쳐서 다시 어린아이 같은 상태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 5: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 5: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계속해서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살펴봅시다. 오늘 읽어드린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히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도(道)의 초보

 

여기에서 ‘도의 초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도’라는 것은 ‘로고스’ 즉 말씀을 의미합니다. ‘초보’는 ‘아르케’라고 하는데 ‘시작, 출발, 태초, 원인’등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도의 초보’는 기독교의 기본진리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버린다’는 말은 쓸모없는 물건을 내버린다는 말이 아니라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말입니다. 즉, 도의 초보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기독교의 기본 진리들을 가지고 더 이상 왈가왈부(曰可曰否)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항상 기초가 중요합니다. 건물을 세울 때에도 기초가 튼튼해야 그 집이 오래 유지될 수 있습니다. 기초가 부실한데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을 세운다 해도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건물의 기초를 놓은 건축자가 그 위에 계속 집을 짓듯이 기독교의 기본 진리들 위에 계속 신앙의 집을 지으라는 말입니다. 건축자가 기초를 놓았다가 부수기를 자꾸 반복하면 어떻게 집을 완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라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 전체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반부에 나오는 “도의 초보를 버리고”라는 표현과 2절 하반부에 나오는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라는 말씀과 연결시켜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풀어서 말씀드리면, “기독교의 기본진리들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즉 그것들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고, 그 기초 위에서 완전함을 향해 전진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할 ‘도(道)의 초보’는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 이런 것들이 그가 말하는 ‘도의 초보’입니다. 건축자가 기초를 부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 채 그 위에 건물을 올리듯이 우리는 ‘도의 초보’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그 위에 우리의 신앙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터를 다시 닦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터를 닦는 일을 자꾸 반복하다보면 언제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도의 초보’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기초가 잘못되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본교리를 다시 배워 확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를 받는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기초를 닦았는데 더 이상 성장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운전을 처음 배우면 ‘초보운전’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왕초보’라고 써서 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초보딱지를 언제까지 붙이고 다녀야 합니까? 아마 한두 달은 그렇게 할 겁니다. 그 정도 되면 초보딱지를 떼는 것이 정상입니다. 여러분도 운전해 보아서 아시겠지만 초보딱지를 붙인 차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차들이 멀찍이 우회해서 지나가기도 합니다. 또한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초보라는 것을 언제까지나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 운전을 했다 싶으면 초보를 떼고 과감하게 운전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고도 덜 발생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그 상태에 있기 때문에 평생 어린아이의 신앙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어린 아이로 머물기

 

우선 ‘어린아이’의 비유부터 살펴봅시다. 어린아이의 상태로 머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성장이 멈춘 어린아이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야 귀엽습니다. 그리고 사랑스럽습니다. 애어른이라는 말이 있지요. 애가 어른스럽다는 말입니다. 애는 애다워야 귀엽습니다. 그런데 애가 어른 흉내를 내는 것은 귀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이가 스물 살 정도 된 청년이 애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어린아이는 한 가지 일에 오랫동안 집중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는 어떤 일이든지 금방 싫증을 냅니다. 어떤 장난감을 보면 사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칩니다. 그래서 막상 사주면 얼마 안 있어 내팽개치고 맙니다. 어린아이는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이의 아버지나 어머니, 심지어 일곱 살짜리 누나가 그 아이처럼 행동하도록 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성인이 어린아이처럼 행동한다면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딱한 일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어떤 직분까지도 맡깁니다. 그런데 그 신앙이 성장을 멈추고 일 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심지어 20년이 지나도 항상 그 상태인 분들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함께 한 시간이 2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20년 이상 신앙도 자라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때보다 오히려 더 뒷걸음질 치는 분도 없지 않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호통재’라 한탄할 일입니다.

 

2)어린아이는 간단한 것, 초보적인 것에 강한 흥미를 보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냉전(冷戰)이니 실존주의니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경제가 어떻게 정치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림없는 일입니다. 장난감 몇 개를 주면 아이들은 만족합니다. 배가 부르고 몸이 따뜻하면 그만입니다. 소리를 지를 때 엄마가 달려오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 밖의 다른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교회를 다녔지만, 영적 성장에는 관심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초보적인 것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학교로 비유하자면 대부분의 교회들은 한 개의 학년만 있는 학교와 같습니다. 그 한 학년도 1학년입니다. 교인들은 2학년으로 진급을 해야 하는데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들이 2학년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숙제를 내주면 목회자를 싫어합니다. 심지어 배척하기까지 합니다. 어떤 사람은 2학년으로 진급했다가 다시 1학년으로 원위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히브리서 수신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대화가 유행했을 것입니다.

“여보게, 자네는 1학년에 몇 년 동안 있었나?”

“응, 나는 12년 동안 있었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몇 학년이십니까? 아직도 언제나 일학년을 고수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빌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3)어린아이는 ‘놀이’를 아주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재미있게 해 주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재미를 추구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벤트를 좋아합니다.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벤트가 있을 때는 열심을 내고 이벤트가 없으면 신앙이 시들해집니다. 어린아이들은 장난감, 신기한 물건들 그리고 놀이 친구가 없으면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도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들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많은 연예인을 동원하고 간증집회 같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오락화’는 새로운 이단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어린아이는 높은 수준의 글을 즐길 줄 모릅니다.

 

어린아이는 단지 읽는 것 자체로 만족합니다. 아마도 나영이도 글씨를 좀 읽을 겁니다. 그래서 집에 가면 여기 저기 글씨를 써서 붙여 놓았습니다. 글씨를 읽는다고 그 내용의 뜻까지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좀 들면 그 내용의 뜻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게 됩니다.

 

여러분!

 

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히브리서를 주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에서 성령님은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도의 초보’에만 머물러 있으려느냐?”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언제까지 유치원이나 1학년 수준에 머물러 있겠느냐는 책망인 것입니다. 이제 성령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히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히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방법

 

그렇다면 완전한 데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완전함’이란 ‘텔레이오테스’라고 하는데 “완전 perfection, 성숙 maturity”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성장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다니고 있다면 이제 성격도 원만해지고 신체도 균형이 잡힐 것입니다. 그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그는 단지 성장했을 뿐입니다. 그가 완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그가 성숙은 했지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걔네들이 사용하는 방에 들어가 보면 압니다. 방에 들어가 보면 욕이 절로 나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이게 사람 사는 방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을 해서 자기 생활을 해보면 달라집니다. 옛날의 아이들이 아닙니다. 집도 깨끗하게 정리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성숙해진 것입니다. 감사한 일이 아닙니까?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점과 흠이 없는 밀랍(蜜蠟) 같은 성자(聖者)가 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 안에서 성숙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성령님은 “항상 도의 초보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 어린아이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라.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라, 응답을 받는 기도를 드리고,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성령 안에서 무거운 짐을 지는 법을 배워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숙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결심을 해야 합니다.

 

물론 결심으로써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연초에 결심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작심삼일이라고 합니다. 그 결심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작심삼일도 계속하다보면 1년이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겠다고 결심할 수 있고, 구원받은 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결심하지 전까지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설사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결심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남자 청년들은 누구나 다 군대를 갔다 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을 먼저 정리해야 합니다. 아는 사람들과 작별을 하고 여자 친구와도 마지막 데이트를 합니다. “앞으로 2년 동안 군 복무를 해야 한다.”라는 말과 함께 작별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 안에서 성장하고, 그분의 깊고 고상하고 은밀한 일들을 배우겠다고 굳게 결심해야 합니다. “나는 유치원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빈둥거렸다. 유치원 수준의 그리스도인 노릇도 이제 신물 난다.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성장하겠다. 나는 계속 성장하여 성령님의 깊고 은밀한 일들을 깨닫겠다.”

 

2)그리스도인답지 않은 것들을 버리고 말씀에 푹 빠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행동과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욕구들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생각과 계획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씀에 푹 잠기시기 바랍니다. 가끔 한 장씩 읽지 말고 마음이 뜨거워질 때까지 계속 읽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 읽어야 합니다.

 

욥 23: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3)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조금이라도 고난을 당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악한 세력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안락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락 대신 승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세상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만 정작 우리는 초대교회의 방법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다. 초대교회가 사용한 방법은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그것은 나가서 증거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고, 십자가를 지고, 자기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방법에 충실 했을 때 어떤 결과가 생겼습니까?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놀라운 결과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4)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여 주소서.

주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사랑의 빛입니다.

저는 주님의 사랑이 아닌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꿈도 꾸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지 않고 계속 완전함을 향해 전진하는 것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히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성숙한 자는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는 저절로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는 열매로 안다고 했습니다. 도의 초보에 머물지 않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는 성령님의 권고는 별종(別種)의 성도를 만들어내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권고에 따르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입니다. 대학교에서도 필수과목은 꼭 이수를 해야 졸업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초보에서 벗어나 성숙에 이르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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