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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다니엘

단 6장 10절(하루 세 번의 감사) - 안효관

by Preacher 2023.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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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6장 10

하루 세 번의 감사 [맥추감사주일]

안효관 목사 2015-07-05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여러분, 3월 20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3월 20일은 UN이 정한 ‘세계 행복의 날’(International Day of Happiness)입니다. UN이 세계행복의 날을 지정하여 지키자고 할 정도로 오늘 우리 사회는 행복이 가장 큰 사회 트랜드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UN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한 발전해법 네트워크’(SDSN)란 곳에서 매년 세계인의 행복지수를 조사하여 발표합니다. 지난 4월 23일에 발표한 ‘2015년도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10점 만점에 5.984점을 얻어 세계 158개국 가운데 47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세계 평균이 5.1점이라고 하니까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세계 평균보다 상당히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만큼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행복지수’라는 말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요소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지수가 높으면 행복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행복지수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158개국 가운데 47위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13번째 경제대국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행복지수 치고는 결코 높지 않는 수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일수록 정말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2015년도에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스위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아이슬란드이고, 그 다음이 덴마크, 노르웨이 순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겠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게 사는 나라는 부탄이라고 합니다. 부탄에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행복합니까?’라고 물으면 100명 가운데 97명이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탄이 2015년도 행복지수에서는 76위를 차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별로 없는데, 사람들은 대부분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행복은 삶의 환경이나 조건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지만, 사실 그 조건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오래된 통계이긴 하지만,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전국 20살 이상 된 성인 1,200명을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그 가운데 ‘행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약 70%가 건강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 11%가 경제력(돈)을 꼽았고, 그 다음이 사랑이나 신앙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물론 행복하기 위해서 건강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정말 건강하고 경제적인 여유만 있으면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앞서 말씀드린 부탄이라는 나라를 생각해 보십시다. 부탄이라는 나라는 인구가 70만 명이 조금 넘는 작은 나라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약 2,700불(약 3백만 원)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불 가까이 된다고 하니까, 수치상으로 하면 우리나라보다 10배 정도 못하는 나라입니다. 부탄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66세입니다.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이 80세가 넘는 것에 비교하면 결코 수명이 길지 않습니다. 수명이 길지 않다는 것은 건강한 삶을 오래 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손꼽는 건강과 돈에서 부탄이라는 나라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뒤쳐집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늘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도 못하고 건강도 별로인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해 하며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분명한 것은 행복은 행복지수라고 말하는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조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자(孔子)가 조카 공멸(孔蔑)에게 물었습니다. “벼슬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 공멸이 그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이 많아 공부를 하지 못하고, 두 번째는 녹봉이 적어 친척을 돌볼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공무가 다급하여 친구들과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공자는 같은 벼슬을 하고 있던 복자천(宓子賤)에게도 똑같이 물었습니다. “벼슬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 그 물음에 복자천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잃은 것은 없고 얻은 것만 세 가지나 됩니다. 첫 번째는 예전에 배운 것을 날마다 실천하여 학문이 늘었고, 두 번째는 녹봉은 적지만 이를 아껴 친척을 도왔기에 더욱 친근해졌습니다. 세 번째는 공무가 다급하지만 틈을 내니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같은 벼슬을 하면서도 공멸은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만 세 가지가 된다고 말했고, 복자천은 잃은 것 대신에 얻은 것만 세 가지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둘 중에 누가 더 기쁘게 일했겠습니까? 당연히 잃은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얻은 것을 헤아린 복자천입니다. 잃은 것을 센 공멸은 벼슬하는 것이 고달프고, 얻은 것을 센 복자천은 벼슬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같은 일을 하고 같은 하루의 삶을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불평 속에서 살고, 어떤 사람은 행복함에 기쁘게 삽니다. 여려분, 그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평 속에서 사는 사람은 언제나 잃은 것을 셉니다. 자신에게서 없는 것만 바라보며 그것을 헤아리며 살기 때문에 마음에 불평이 가득하게 됩니다. 잃은 것을 세면 셀수록 우리의 마음에서 감사도 잃게 되고 기쁨도 잃게 됩니다. 잃은 것을 세면 셀수록 만족함도 사라지고 마음에 여유도 잃게 됩니다. 잃은 것을 세는만큼 우리의 삶에서 행복이 사라지고 맙니다. 반대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얻은 것을 셉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을 헤아립니다. 이렇게 얻는 것을 세면 셀수록 우리의 마음에는 감사가 더해지고, 기쁨이 더해집니다. 얻은 것,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세면 셀수록 우리의 삶에는 행복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다니엘의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은 주전 605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입니다. 남 유다는 세 번에 걸쳐 바벨론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그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공격을 받았을 때에는 예루살렘이 무참히 파괴되면서 나라를 잃게 됩니다. 다니엘은 그 세 번에 걸친 바벨론의 침공 가운데 첫 번째 침공을 받았을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 제국은 엄청난 세력으로 수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포로로 잡혀온 사람 중에서 젊고 똑똑한 사람을 교육시켜 관리로 등용시키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어린 나이에 교육을 받고 바벨론의 관리로 등용됩니다. 그렇게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관리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다니엘이 관리 생활을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이야기입니다. 여전히 다니엘은 고위직에서 관리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리오 왕이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를 120개 구역으로 나눈 후에 그 120개 지역마다 관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120명의 관리를 지휘하기 위해서 세 명의 총리를 세웠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다니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그 나라에서 최고의 관리자의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니엘은 6:3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이 민첩하여 다른 총리들이나 고관들보다 뛰어났습니다. 마음이 민첩하다는 말은 탁월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다니엘은 왕의 특별한 신임을 받게 되었고, 다리오 왕은 그런 다니엘을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 싶었습니다.

 

다니엘이 그렇게 왕의 신임을 받고 최고 관리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주변에 다니엘을 모함하는 세력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다니엘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작은 나라에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 사람이 아닌 포로 출신이 온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의 관리 책임자가 된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관리로 등용된 사람들은 누구나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왕의 신임을 받아 더 높은 자리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포로로 끌려온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자기들이 올라갈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리 포로에 대해서 관대한 정책을 편다 하더라도 포로를 왕 다음으로 그 나라 최고의 통치자 자리에 앉힌다는 것은 정서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니엘 주변에 있는 고관들은 다니엘이 미울 수밖에 없습니다.

 

고위 관리들이 다니엘을 미워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이미 고위직을 지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벨론 시대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메대와 바사가 바벨론을 무너뜨린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니엘 5:30-3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벨론은 벨사살 왕이 죽임을 당함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이 바벨론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리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새로운 제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권이 바뀌면 이전 정권에서 충성을 다했던 신하들은 모두 제거하는 것이 역사적인 상식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난 정권에서 충성을 다하며 지난 왕에게 신임을 받았던 사람은 지난 정권을 무너뜨린 새로운 정권에 대해서 반감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을 다시 기용해서 쓴다는 것은 큰 모험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정권에 충성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숙청을 하거나 제거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단순히 정권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나라가 바뀌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페르시아 제국으로 나라가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벨론 제국의 충신을 페르시아 제국에서 중용해서 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달랐습니다. 바벨론 제국에서 고위 관리로 있던 다니엘을 페르시아 제국에서 다시 최고 관리자로 중용해 쓰려는 것입니다. 다리오 왕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까 신하들 입장에서는 왕에게 저항할 수 없어 뭐라고 말은 하지 않았겠지만,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페르시아 제국이 바벨론을 멸망시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입니다. 강대국 바벨론을 멸망시킬 때, 그리고 새로운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할 때 목숨 걸고 싸웠고 충성을 다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뒤로 하고 바벨론 제국에서 고위 관리로 있던 사람을 최고의 총리 자리에 앉히려 하니 페르시아 제국의 신하들은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다니엘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페르시아 제국이 바벨론을 멸망시킨 이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메대와 바사(페르시아) 연합군이 바벨론을 멸망시킨 것은 주전 538년경입니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온 지 무려 70여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였습니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가서 바벨론 제국에서 관리로 교육을 받을 때가 몇 살이었는지 정확하게 알긴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15살 내외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니엘이 15살 때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이라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니엘의 나이는 약 85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100세 시대에도 85세에 고위 관리가 된다는 것은 고령(高齡)에 속합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85세의 나이에 페르시아 제국의 최고 관리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이가 많아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

 

그래서 다른 관리들이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밉니다. 본문 바로 앞인 4절에 말씀한 것처럼, 다른 총리들과 고관들이 다니엘에 대해서 고발한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다니엘에게서 허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안해 낸 방법이 다니엘의 신앙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 볼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니엘을 고발하기 위해서 다니엘의 허물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다니엘은 어렸을 때부터 나라를 위해서 관리로 일해 온 사람입니다. 어쩌면 60년 이상 70년 가까이 공직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니엘에게서 허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니엘이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정직했습니다. 뇌물을 받거나 사사로운 일로 인해서 일을 망치지 않았습니다. 일의 결정을 내릴 때 지혜롭게 처리했습니다. 자신이 힘들다는 것 때문에 일을 대충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바르게 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에게서 그릇됨이나 허물을 찾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다니엘의 모습이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때 그릇됨이 없이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하고, 바르게 판단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허물을 찾으려 할지라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다니엘이 나라를 위해서 한 일에 대해서 허물이나 그릇됨을 찾아내지 못하자, 그들은 다니엘이 가진 신앙으로 그를 올무에 걸리게 하자고 꾀를 냅니다. 그래서 교묘한 말로 왕을 꼬드겨서 ‘앞으로 30일 동안 왕 외에 그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다.’는 금령을 내리게 합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일평생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다니엘은 왕의 명령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평소 기도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여러분, 여러분이 다니엘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여러분은 어떤 기도를 하셨겠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하나님, 저의 허물을 찾는 사람들이 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왕의 규례가 철회되도록 도와주옵소서. 저들의 술책이 엇되게 하시고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한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대적자들의 멸망이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이 상황 속에서 다니엘은 무엇을 감사했겠습니까? 사자 굴에 던져지다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85세가 넘는 노인이라 하더라도 사자 굴에 던져져 사자에게 찢겨 죽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그렇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니엘은 무엇에 대해서 감사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감사했다는 것은 늘 감사했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감사를 마음에 새겼다는 뜻입니다. 감사할 조건은 별로 없어도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감사거리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게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비록 사자 굴에 던져져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였지만, 그는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것보다도 지금까지 자신이 누리고 있었던 것,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것들을 헤아렸습니다. 어쩌면 다니엘은 의도적으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의도적으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한다고 지금의 상황에 바뀌어질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가 마음을 바꾸어줍니다.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보게 하고, 불안이 아닌 평강으로 자신의 삶을 보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 감사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니엘에게 왕의 어인이 찍힌 금령이 철회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여전히 기도했고, 기도한 결과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사자 굴에 던져지면 당연히 다니엘은 사자에게 찢겨 죽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을 확인한 음모꾼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이 다음날 아침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사자 굴에서 나왔습니다.

 

여러분, 하루에 세 번씩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다니엘은 결국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며 사는 사람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사는 사람에게 환경을 이기는 믿음으로 역사해 주십니다. 때로 우리가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우리의 상황이 금세 바꿔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감사는 우리의 마음을 천국으로 만들어줍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천국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천국을 건설하는 재료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감사할 수 있는 어떤 조건이나 환경에 있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천국을 만들면 우리의 삶은 매일 행복한 삶이 됩니다. 우리가 천국과 같은 은혜를 누려야만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가 곧 우리 마음에 천국을 만들어줍니다.

 

여러분, 나에게서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보며 불평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내게 남겨놓으신 것들, 그것을 하나하나 세어보며 감사로 사십시다. 바로 그곳에서 천국이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사는 삶의 자리가 기적이 일어나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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