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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룻기

룻 2장 1-7절(삶의 전환기 그 이후) - 최태선

by Preacher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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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2장 1-7

삶의 전환기 그 이후

최태선 목사 – 2003.12.7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삶의 전환기에 처해서 믿음의 결단을 내린 이후로 우리는 편안한 삶을 기대합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믿음의 결단을 내렸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에게 고난을 주시지 않고 평안을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믿음의 결단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믿음의 결단 이후에도 여전히 현실적으로 힘겨운 삶이 지속됩니다. 이러한 힘겨운 삶이 오래 지속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길어지면 사람들은 지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갈등과 회의가 존재 근본으로부터 일어납니다. "과연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쉬운 세상의 방법을 선택할 것을!" 자연히 신앙은 침체에 빠지고 포기의 상태에 이르기도 합니다. 또한 마음 한구석에서는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최악의 경우는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분명히 부침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긴 장거리 육상경기에 비유한다면, 중요한 것은 경기를 완주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포기한다는 것, 이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시기에 있습니다. 삶의 전환기 이후 믿음의 결단을 하므로 한층 향상된 신앙의 상태에 있을 때 신앙을 포기한다면, 이것은 다시 재기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처음 삶의 전환기에 처해서 가졌던 갈등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러한 사람의 예가 언급되는데,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던 '데마'는 일찍부터 복음을 받아들이고 바울과 동역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처음으로 감옥에 갇힐 때 바울과 함께 할 정도로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골4:14, 몬1:24). 그러나 바울이 두 번째로 투옥될 때 바울을 버리고 자신의 출신지인 '데살로니가'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4:10). 물론 본문을 통하여 그 이후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알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데마가 신앙을 버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사도 바울의 고난에 함께 할 정도로 신앙의 사람이었지만, 결국 고비를 넘지 못하고 세상을 사랑하여 신앙을 버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을 가졌던 자가 한번 신앙을 버리면, 많은 경우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삶의 전환기에 처해서 믿음의 결단을 내린 이후로 갖게된 신앙을 잘 간직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믿음의 결단을 내린 이후로 유다에 이르렀을 때 룻의 삶은 결코 풍족하지 않았습니다. 보리 수확이 한창인 벌판에서 이삭줍기로 겨우 하루의 끼니를 연명하는 삶이었습니다. 고향도 아닌 먼 타향에서의 낯선 들판에서 이삭줍기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에게는 부양해야할 시어머니까지 있었습니다. 처음에 룻은 아마 많은 갈등을 겪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처음의 각오와는 달리 고향 땅을 떠나온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선택한 여호와 하나님은 과연 어디 계시는가 의심했을지 모릅니다. 도저히 출구가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미래만 보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싱겁게도 결론은 '해피엔드'로 끝나고 맙니다.

 

룻은 보리 수확이 한창인 벌판에서 이삭줍기로 겨우 하루의 끼니를 연명하는 삶을 살았지만, 결코 불평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을 통해 보건대 오히려 룻은 성실하고 신실하게 자신의 삶에 대면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결코 가식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2,7절). 이러한 룻의 태도는 금방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주위에 널리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공교롭게도 룻이 이삭을 주웠던 장소는 바로 친족 '보아스'의 땅이었습니다. 이는 어찌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보아스와 대면할 수 있었고, 그들 사이의 특수한 상황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것입니다. 즉 보아스는 룻의 가족에게 있어서 '기업 무를 자'의 관계에 있었는데, 이 '고엘'(되찾다) 제도는 하나님으로부터 할당받은 기업을 영구히 보존하고 혈족을 유지할 목적으로 생긴 제도였습니다. 고엘이 된 자는 가난한 혈족의 땅을 도로 사주어야 했고, 부당한 피해를 당한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이 있었으며, 그 미망인과 결혼할 책임도 있었습니다. 일찍이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이주할 때 그 땅을 팔았으므로, 그 판 땅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매수자에게 그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룻의 가족에게는 기업 무를 자가 두 명이었고, 보아스는 차순위자였습니다. 그런데 우선 순위를 가졌던 친족이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하자, 보아스가 기꺼이 기업 무를 권리를 행사하여 팔았던 땅을 되찾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룻과 결혼하여 나오미로 하여금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엘'이라는 특수상황이 결코 그들이 하나되는데 둘도 없는 절대적인 요인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보아스는 이미 룻을 만나기 이전에 그녀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11,12절). 그렇기 때문에 신중하기는 했지만, 룻을 아내로 받아들이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여정가운데 물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지만, 룻은 그가 직면한 삶의 현장에서 성실함과 신실함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했기에 생각지도 못했던 축복된 결과를 얻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룻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귀한 교훈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의 결단 이후로 어떠한 태도로 삶에 임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주어진 삶에 성실하고 신실하게 임하는 것,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주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실하신 분이고,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룻이 새로운 가정을 꾸민 축복의 결과만 바라보고 그 과정을 간과한다면, 이는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우리들의 삶의 태도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인도하시겠지!"라는 용감한 믿음가운데, 이 세상에서 내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부분들에 소홀합니다.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주어진 상황에 성실함과 신실함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의무인 것입니다. 결과는 그 이후의 것이고, 과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과정가운데 최선을 다한 사람이 결과에 대해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으로 나타난 결과의 차이에 크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천일야화(千一夜話장 the thousand and one nights)로 불리기도 하는 아라비안 나이트(the arabian nights' entertainment)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세계의 사람들에게 즐겨 읽히는 문학작품인데, 아마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내의 부정에 분노하여 매일 신혼을 치르고 신부를 죽이는 일을 반복하는 왕이 하루는 신부로 '세헤라자데'라는 처녀를 맞았는데, 왕은 신부가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에 빠져 1천1일을 보낸다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뼈대입니다. 왕은 1천1일 동안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세헤라자데'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사랑하게 되어 오랜 해후를 누리게 되고, 결국 여자들의 비극도 끝나게 됩니다. 꾸준함의 마술이 변칙적인 폭군을 사랑의 포로로 사로잡았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교훈이라고 할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가 실천한 그 섬김과 사랑은 분명 아무나 할 수 없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늘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실천에 겸양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분명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하루 이틀 잠시 가난한 사람이나 병자들과 지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전 삶을 관련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나 병자들에게 헌신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테레사 수녀는 바로 이 쉽지 않은 일을 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실함과 꾸준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남들이 하찮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성실하고 꾸준하게 그 일에 매진할 때 그 일은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존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이 성실함과 꾸준함으로 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무엇이 진정한 해피엔드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룻에게 있어서 무엇이 진정한 해피엔드입니까? 보아스를 만나 가정을 이룸으로 과부의 처지로부터 벗어난 것이 해피엔드입니까? 이로 말미암아 극단적인 가난의 상태로부터 벗어난 것이 해피엔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룻의 해피엔드는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다는데 있습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 가정을 이룸으로 극단적인 가난의 상태와 과부라는 처지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에만 주목하면,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결단에 주어지는 세상적 성공을 하나의 공식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룻기의 본질은 룻이 고난가운데 믿음의 결단을 내림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따라서 룻이 보아스를 만나 가정을 이룸으로 극단적인 가난의 상태와 과부라는 처지로부터 벗어난 것은 본질을 향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삶의 전환기에 처해서 믿음의 결단을 내릴 때, 그 동기가 지금의 세상적 고난을 벗어나 세상적으로 성공하는데 주어진다면, 그것은 동기가 올바르지 못한 것이고 첫 단추를 잘못 맞춘 것입니다. 룻에게 주어진 세상적 성공은 믿음의 결단 이후로 룻이라는 개인에게 주어진 지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룻이 믿음의 결단을 내렸기 때문에 그러한 세상적 성공이 주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룻이라는 개인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졌던 상황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같은 믿음의 결단을 내렸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룻과 같은 세상의 성공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들을 성경이나 역사를 통해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룻에게 주어진 세상적 성공이 분명 의미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에게 가지각색의 모양으로 결과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주어진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해서는 안됩니다. 반면에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의 삶의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위치에서는 동일합니다.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냐고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도 좋으니 세상에서 성공했으면 좋겠다구요?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왕자와 거지'라는 문학작품을 보면 그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문학작품이 근본적으로 의도하는 바를 이야기하자면 단순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단순한 상황만을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존재가 확인되는 순간 모든 것은 순식간에 바뀝니다. 거지가 된 왕자가 지금은 비록 거지로서의 삶을 살지만, 그에게는 언젠가 다시 왕자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기품 있는 삶, 고난을 넉넉히 이겨내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왕자가 된 거지는 당장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언제 사실이 발각될지 모르는 불안한 삶을 영위합니다. 그리고 결국 진실이 밝혀질 때 여지없이 왕자의 삶으로부터 쫓겨나고 맙니다.

 

우리는 주를 믿음으로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았습니다. 그 사실은 법적으로 보장을 받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언제 그 사실이 확증됩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사람들이 최종적인 확증의 절차를 밟게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세상의 자녀로 살아가는가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 차이에 따라 이 세상 이후의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전환기 그 이후에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사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데마'처럼 믿음의 결단을 내린 이후로 과거로 회귀한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만을 더욱 상하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결단을 내린 이후의 삶은 더욱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의 근본적인 생명과 관련된 문제로서, 결코 그 어떠한 것과도 타협할 수 없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도 주춤거려서는 안 되는 시급한 사항입니다.

 

이제 믿음의 결단을 내렸기에 더 이상 세상의 삶에 연연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결단을 내렸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의 삶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자신의 뜻과 의지를 내어놓는 삶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성공이 주어질 수도 있고, 반대로 더욱 심한 고난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에 교만해서는 안되며, 반대로 고난에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결단을 내린 그 이후의 삶은, 나의 삶이 아닌 하나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결단을 내린 그 이후의 삶은, 세상에서의 모습에 연연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천국을 소망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이후의 삶 가운데 성공이 주어진다면, 그 성공은 나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요,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되어야할 성질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이후의 삶 가운데 고난이 주어질지라도 절대 삶을 포기해서는 안되며, 고난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동일하게 믿음의 삶을 경주해야 합니다. 비록 세상에서의 삶의 모습은 다르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유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소망가운데 기쁨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본질을 발견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걱정하거나 근심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론 인간이기에 걱정거리나 근심거리들이 끊임없이 몰려올 것입니다. 끊임없이 걱정거리나 근심거리들이 우리들의 머리를 출입합니다. 유한한 인간이기에 이러한 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러한 생각조차 안 든다면 아마 인간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경계해야 할 것은 이러한 걱정거리나 근심거리들이 우리의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입니다. 새가 잠시 우리의 머리 위에 앉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새가 우리의 머리 위에 둥지를 틀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분명 우리의 책임입니다. 마찬가지로 걱정거리나 근심거리들이 순간 순간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의 머리에 둥지를 틀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본향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현실을 사는 것도 벅찬데 죽음 이후의 삶을 거론하는 것이 너무 소극적인 삶의 태도가 아닌가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음은 결코 우리에게 멀지 않은 일이고, 또한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경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가.리하거나 두려워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하나의 과정인 것입니다. 1995. 중국으로 10 여러분도 한번 유언장을 작성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다시 보이고,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얼마 전에 모 대학의 학생이 과제로 주어졌던 유언장을 쓰고서는 실제로 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물론 여러분은 그렇지 않겠죠?

 

여러분은 지금 어떠한 인생의 과정을 지나고 계십니까? 삶의 전환기를 지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믿음의 결단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삶의 전환기 가운데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그 이후의 삶 가운데 있다면, 앞으로의 삶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룻이 임했던 것처럼 성실하고 신실하게 삶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룻에게 선물하셨던 귀한 선물이 여러분에게도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러한 선물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가장 크고 궁극적인 선물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이 선물은 룻이 세상에서 받았던 선물과 비교할 수 없는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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