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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4장 12-16절(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 안효관

by Preacher 2024.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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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4장 12-16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안효관 목사 2017-04-09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사회관계망서비스인 SNS를 통해서 전해지는 ‘실화’라는 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29살 총각인 한 젊은이가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응급실에 실려 간 그는 기적적으로 생명은 건졌지만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앞을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는 너무나도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면서 아홉 살 난 한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아홉 살밖에 안 된 그 꼬마 소녀는 이것저것을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고, 모든 것이 귀찮아하던 그는 냉혹하게 그 아이를 떨쳐버리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아홉 살 소녀는 자신을 ‘오정혜’라고 소개하고는, 이 병원에 자신의 친구가 없다며 스물아홉 살 된 그에게 친구처럼 다가왔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그는 늘 자상하게 이야기하며 다가오는 그 아이에게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고, 그는 그 아이에게 ‘너는 무슨 병 때문에 이 병원에 입원했느냐?’고 물었지만 그 아이는 자신의 병명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단지 ‘한 달 후면 자신은 더 이상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는 의사의 이야기만 이야기해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스물아홉인 자신과 아홉 살인 어린 소녀는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둘이서 병실 밖으로 산책을 나갔고, 그럴 때면 앞을 보지 않는 자신을 대신해서 그 아이가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주변의 풍경 이야기들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정혜야, 너는 꿈이 뭐야?’ 그러자 그 아이는 ‘아저씨랑 결혼하는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아이와 즐겁게 이야기하고 함께 지내던 중 2주 후에 그는 병원에서 퇴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퇴원하는 그에게 아홉 살 정혜는 ‘아저씨, 나 퇴원할 때 되면 꼭 와야 돼. 알았지?’라고 다그쳤고, 그는 ‘꼭 찾아오마.’고 약속을 했습니다. 아저씨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슬퍼서인지 아이는 울기 시작했고, 우는 그 아이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는 새끼손가락을 고리 걸고서 그 아이에게 ‘반드시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2주가 지났습니다. 병원에서 안구를 기증해 줄 사람이 나타났다며 전화가 왔습니다. 누군가가 안구를 기증해 주지 않으면 평생 앞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는데, 자신에게 누군가가 안구를 기증해 주는 사람이 나타났고 이제 자신은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하늘을 나는 것처럼 기뻤습니다. 일주일 후 안구 이식수술을 받고 3일 후에는 꿈에 그리던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에게 안구를 기증해 준 사람을 꼭 만나보고 싶다고 병원에 요청했습니다. 간곡하게 부탁해서 알아낸 안구 기증자는 다름 아닌 아홉 살 정혜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혜에 대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어서 정혜의 모습이나 상태가 어떠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그 아홉 살 정혜는 백혈병 말기 환자였습니다. 나중에 만난 정혜의 어머니는 그를 보더니 ‘아이가 아저씨를 참 많이 좋아했었노라.’고, 그리고 ‘수술하는 날 아이가 아저씨를 많이 찾았었노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정혜는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눈을 꼭 아저씨에게 주고 싶어 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정혜가 남긴 편지를 건네주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저씨! 나 정혜야. 음 이제 저기 수술실에 들어간다. 옛날에 옆 침대 언니도 거기에서 하늘나라로 갔는데, 정혜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저씨, 내가 만일 하늘나라로 가면 나 아저씨 눈 할게. 그래서 영원히 아저씨랑 같이 살게. 아저씨랑 결혼은 못하니까.’ 그는 그 편지를 읽고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이 떠올랐습니다. 비록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지만, 그리고 백혈병 말기 환자임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참으로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천사와 같은 아이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그 수술실에 들어가면 살아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그 아이는 자신과 친구가 되어주었던 아저씨의 눈이 되어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신의 눈을 아저씨에게 주어 그 아저씨가 평생 밝은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밝게 보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신의 눈을 아저씨에게 주겠노라고 다짐했고, 그렇게 실행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이 땅에 보내주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예수님 또한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기꺼이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필요하기에 당신의 생명을 버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함을 아시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당신이 가지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주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날 있었던 일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날은 무교절 첫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풍습에 의하면 그날은 유월절 양을 잡는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절기 가운데 가장 큰 절기는 유월절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탈출하던 사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애굽의 바로 왕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바로왕과 애굽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애굽에서 처음 태어나는 모든 것들을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재앙을 겪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양을 잡아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놓으면 죽음의 천사가 애굽 전역에 첫 번째 태어난 것들을 죽일 때에 그 집은 죽음을 면했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지 않고 뛰어넘어갔다는 뜻에서 그 날을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유월절은 애굽 땅에서 그 열 번째 재앙을 피하던 그 날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매년 정월(니산월) 14일을 유월절로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그 유월절이 되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와서 그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회막 앞에 모여 지켜야 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전 586년 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모여 유월절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전통이 가정에서 유월절 양을 잡아 가족끼리 유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포로기를 거치면서 성전 중심의 유월절이 가정 중심의 유월절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런 전통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길 원하셨습니다. 특별히 이번 유월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키는 마지막 유월절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권력자들에게 잡혀 죽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풍습대로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 되자 제자들의 마음엔 걱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 양을 어디서 잡으며 어디에서 유월절 식사를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활동 거점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가끔 올라오셨고, 예루살렘에 오셨다 하더라도 예루살렘에 결코 오래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의 집도 없었고, 마땅히 머물만한 곳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물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제자들이 걱정하며 그렇게 물어오자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 둘을 보내십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면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하나 만나게 될 텐데 그를 따라가서 선생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잡수실 방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러면 그 사람이 커다란 다락방을 보여줄 것이니, 그곳에서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두 제자는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갔고, 예수님께서 말씀대로 다락방을 내어줄 사람을 만나 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 다락방이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알려진 바로 그 다락방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자신의 다락방을 내어준다는 것이 결코 쉽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나흘 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까지만 해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신다는 것이 큰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4일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마가복음 14:1절의 기록에 의하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일 방도를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들을 의미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오늘로 말하면 국회와 같은 곳이지만, 오늘날 국회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권한을 가진 곳입니다. 그곳에서 사형을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에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사형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진 막강한 권력집단이 산헤드린 공회입니다. 그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잡아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예수님은 결국 잡혀 죽고 말 것입니다. 더군다나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흉계로’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흉계로’라는 말은 누명을 씌워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그렇게 하겠다고 작정했다면 분명 그대로 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편에 서서 예수님께 편의를 봐준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산헤드린 공회에 괘씸죄에 걸려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도 4일이 지난 후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현상수배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본문 바로 앞인 10-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체포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혀 권력자들의 손에 넘겨지고 죽음을 맞이할 일은 이제 눈 앞으로 다가와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 자신의 방을 내어주어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도록 배려한다는 것은 산헤드린 공회에 미움을 받아서 어떤 어려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는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커다란 다락방을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놓았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진짜 신앙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많은 경우에 신앙생활이 나에게 유익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그것이 내게 유익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오직 하나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붙들고 있으면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에게 신앙생활의 진정한 유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오해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셔서 내가 가는 길이 형통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셔서 우리 가정과 사업장이 복을 받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열심히 봉사했더니 어려웠던 사업이 잘 되어 커다란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간증합니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거기에다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하면 병도 고치고 심지어 암도 다 치료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병고침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해서 모두 병고침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히면 가정에 어려움이 있고 사업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을 향하여 ‘당신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라고 정죄합니다. 병고침 받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예배드리고 헌신했는데 병고침을 받지 못하면 ‘당신 안에 아직 회개하지 않는 죄가 있어서 그런 거야!’라고 판단해버립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신앙생활 잘 한다고 해서 다 병고침을 받는 것 아닙니다. 신앙생활 잘 하면 사업이 번창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내려놓고 주님이 내 삶에 주인으로 좌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삶이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바꿔지고, 내 생각이 주님의 생각으로 바뀌어져가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 자신의 다락방을 내놓은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을 위해서 다락방을 내놓은 일은 그에게 결코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다락방을 내어드림으로 인해 자신에게도 어려움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기꺼이 다락방을 내어드렸다는 것은 자신의 유익이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지금 주님께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주님을 위해서 드릴 수 있다는 마음이 다락방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보다 4일 앞선 날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려 하실 때 제자 둘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보게 될텐데, 그것을 끌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그 나귀의 주인은 ‘주님이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만 듣고도 기꺼이 자기의 나귀와 나귀새끼를 주님을 위해 내어드렸습니다. 그것을 타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당시에 나귀를 내어드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예전엔 집에서 가장 귀한 재산이 소였습니다. 그 소가 농사를 짓는데 꼭 필요한 존재였고, 아들이 대학에 입학해서 등록금이 필요하다든지 아니면 목돈이 필요할 때면 그 소를 팔아서 큰돈을 만들어 지불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처럼 자기 집안에 가보처럼 여기던 나귀와 나귀새끼를 한꺼번에 주님을 위해서 내어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내어놓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들을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락방을 내어놓은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도 유월절 만찬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필요하시다고 하니까 큰 다락방을 기꺼이 내어놓아 주님이 쓰시도록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잡수실 그 곳을 가리켜 ‘나의 객실’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분명 그 다락방은 예수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것을 나의 객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나의 객실이기 때문에 당연히 나를 위해서 내놓아야 한다는 듯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사람이 마가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6:18) 누가복음에서는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 22:11) 그런데 유독 마가복음에서만 예수님께서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마가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잡수신 다락방이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잡수실 그 때 마가는 아직도 어린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집은 그의 것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 것입니다. 사도행전 12:12절에서는 그 집을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객실’이라고 말씀하신 그 다락방은 결코 예수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마가는 자신의 어머니 소유인 그 다락방을 예수님의 소유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왜 그 다락방을 ‘예수님의 객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마가의 다락방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을 비롯해서 120여 명의 성도들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했던 장소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장소가 바로 그 다락방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그 다락방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가가 그 다락방을 ‘예수님의 객실’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잡수신 후에 그 다락방은 더 이상 자기 개인 소유가 아닙니다. 물론 소유권은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있겠지만, 그 다락방은 이미 초대교회 교인들의 모임장소가 되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교회처럼 사용된 장소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그 다락방을 예수님의 것으로 인정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그렇게 물으신 것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집이라면 아들인 자신의 집이긴 한데, 그 집에 있는 다락방은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쓰시겠다면 언제든지 쓰실 수 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 다락방에서 오순절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다락방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기도할 때 날만 새면 헤롯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해야 할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실 때 그 다락방을 기꺼이 주님의 것으로 내어드린 어머님의 헌신이 초대교회 복음의 역사에 큰 역할을 담당하는 장소가 되었음을 마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객실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라고 마가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예수님의 것’으로 내어드린 그 다락방이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거룩한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내 것을 내 것으로만 움켜쥐고 있을 때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 가운데 ‘이것만은 주님께서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나만의 영역이 있지 않습니까? 다른 것은 다 양보한다 하더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주님의 것으로 내어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간섭하시고, 주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주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내 가정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내 내면의 부끄러운 어떤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주님의 것으로 내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주님의 손에서 귀한 역사를 만들어가는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아홉 살 정혜는 자신의 눈을 사랑하는 아저씨에게 기쁨으로 드렸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주었습니다. 마가와 마가의 어머니는 자신의 다락방을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드렸습니다. 주님의 것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도록 주님으로 것으로 내어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기꺼이 내어드릴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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