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4장 26-31
베드로의 장담과 부인
허창수 목사 17.11.26
동성교회 [창원시] https://https://cafe.daum.net/huhcs48/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속았을 때 실망합니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거나 믿지 않았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조금도 의심 없이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가슴은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믿었던 도끼에 제 발 찍는다’는 말처럼 마음의 고통은 컬 것입니다. 그보다도 더 큰 실망은 자기 자신에게 속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믿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을 믿었는데 결국은 자신에게 속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이 얼마나 비겁한 존재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신에게 속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음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하고서도 계속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속는 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돈에 속고, 친구에게 속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자신에게 속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아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인가 좀 가진 줄 알았는데 결산해 보니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속았을 때 크게 실망하고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금년 한 해도 열심히 살았는데도 년 말이 다되어가는데도 통장에는 돈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고 원망하지만 사실은 믿지 못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내 마음도 내 뜻대로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맘대로 하겠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을 때 다른 사람도 믿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큰소리치며 장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래의 이름은 ‘시몬’인데 ‘베드로’라는 이름은 예수님께서 지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란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굉장한 이름입니다. 그리고 천국 열쇠를 주겠다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명색이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작은 여종 한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아주 작은 시험 앞에 형편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반석은 고사하고 조약돌만한 믿음도 없는 사람처럼 되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고 기도하기 위해 감람산으로 가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27)고 말씀하셨습니다. 날이 새기 전에 예수님이 잡혀 끌려가실 때 제자들이 도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를 버리리라’는 이 말씀이 난하에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리라’는 의미라고 주를 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제자들은 일시적으로 양 떼처럼 도망치듯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29)라고 말했습니다. 난하 주에 ‘다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1)라고 크게 장담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군인들에게 잡히실 때에 베드로는 칼을 휘두르고 잡으러 온 군인의 귀를 쳐서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 재판을 받을 실 때에 베드로는 마당 한쪽 구석에 불을 쬐고 있다가 작은 여종 하나에게 주의 제자임을 부인할 뿐 아니라 저주까지 하는 비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곧 바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마26:75). ‘심히 통곡했다’란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심히 분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 앞에서 죽을지언정 나는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쳤던 자신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했으니 속았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속았습니까? 자신에게 속았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비참하고 한심스러운 존재인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심히 통곡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큰 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또 다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큰소리치며 장담했습니다. 목숨까지 걸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으니 자신에게 속은 것을 분히 여겨 심히 통곡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이 누구보다도 크고 좋은 줄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가장 믿음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을지언정’이라고 말 한 것은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죽을지언정’은 어떤 여건이나 환경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생명을 내건 이 마당에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합니까? 베드로는 대제사장 앞에서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칼을 빼어 들고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로마 군인 앞에서가 아닙니다. 작은 여종 하나 앞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천국 열쇠까지 보장 받은 사람으로 누구보다 자신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소리쳤던 베드로가 작은 여종 하나 앞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큰소리치는 사람이 본래 시원치 않습니다. 베드로의 큰소리는 말과 생각뿐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속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속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자기가 대단한 존재인줄로 알았습니다. 자신의 무지함을 몰랐습니다.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작은 여종 앞에 감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까지 했으니 돌이켜 보면 베드로의 믿음은 빈 깡통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비장한 각오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절하며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20:21)라고 말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야고보와 요한은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는 말씀이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인줄도 모르고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처럼 죽을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야고보와 요한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쉽게 ‘예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들이 알지 못하고 대답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고 받아들이셨습니다(마20:23). 결과적으로는 야고보가 제일 먼저 목 베임을 당하게 되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예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대로 제일 먼저 야고보가 ‘주의 잔’을 마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죽을지언정’이라고 장담했던 말은 추상적인 ‘죽을지언정’이 아니라 실제로 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비유로 말씀하신 한 알의 밀알은 정말로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죽을지언정’ 이라고 말 한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보다는 아주 작은 여종 하나 앞에 두려워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아주 대단한 믿음의 사람처럼 자신만만하게 장담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한 존재임을 알고 심히 통곡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아는 것보다도 베드로를 더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베드로는 주님께 매달려 ‘주여 어찌하면 좋으리이까?’라고 하였더라면 그렇게 부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그 말씀을 듣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아주 자신이 넘치는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아직도 자신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인가를 한번 보여 주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 우상화에 빠졌던 것입니다. 자기 의지를 믿고 자신만만하게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얼마 못가서 자신이 얼마나 비겁한 존재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크고 좋은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자신의 믿음은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속은 것을 알고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다른 사람들은 넘어져도 나는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질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넘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자기 약함을 알면서도 시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 있다고 자기 의지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베드로처럼 너무나도 쉽게 부인하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과 비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27)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29)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특별시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버리고 도망갈지라도 나는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부인할지라도 나는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부인하지 않았지만 큰소리쳤던 베드로만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자기 우월주의자, 자기 잘 난측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해도 나는 부인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발상입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은 과소평가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과대평과 하는 것은 교만의 극치입니다. 남보다 특별히 잘났다고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 못난 사람입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가 ‘나만은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사실은 베드로 혼자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강하다고 뽐내더니 가장 비참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넘어지면 나도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안 넘어지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를 버리리라’, ‘나를 부인하리라’고 거듭되는 경고의 말씀을 들었다면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헛된 맹세를 할 것이 아니라, ‘주여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라고 도움을 요구하는 신앙의 성숙함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호언장담은 불과 몇 시간도 안가서 허상으로 판명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결심과 의지는 무기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두 번이나 거듭되는 예고를 받았을 때 자신의 연약함을 스스로 깨닫고 주님께 도움을 청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교만에 빠져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곧 실패를 향해 달려가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의 책망과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부인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경고의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했다면 부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설교를 통해 자신의 믿음 약한 것을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경고하시는 말씀을 듣고서도 베드로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믿습니다. 그러나 경고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 말씀을 들은 즉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허물 많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의지하는 자를 붙들어 주시고 주의 뜻에 합당한 일군으로 삼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와 베드로에게 각각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무시하고 자기 의지대로 하다가 끝내 죄악 길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침내 회개하고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허물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아직도 자신을 믿습니까? 더 이상 자신에게 속지 맙시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작은 여종 하나 앞에서도 쉽게 넘어질 수 있는 존재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일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경고하시는 말씀을 들었을 때 곧 바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시험이 와도 주를 부인하는 자가 아니라 당당하게 주는 나의 구주가 되심을 증언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어떤 환난과 핍박이 와도 주를 부인하지 말고 끝까지 주님을 섬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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