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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데살로니가전서

살전 5장 1-11절(서로 격려하며 덕을 세우는 공동체) - 이준원

by Preacher 2023.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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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5장 1-11

서로 격려하며 덕을 세우는 공동체

이준원 2020.1.5.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들어가는 말: 우리는 아주 위험한 세상에 살고 있다]

 

지난 2015년 11월 13일 밤, 프랑스 파리의 극장, 축구장, 식당, 카페 등 여섯 곳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 공격이 벌어져서 130명 이상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그 중에도 파리 11구에 위치한 바타클랑 극장에서 미국 록밴드의 공연이 있었는데, 공연이 열리던 중 테러범들이 나와서 총기 난사를 함으로 피해가 가장 컸습니다. 그때 테러가 일어나 자기가 죽을 줄 알고 그곳에 간 사람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또 2017년 3월 22일 오후에는 영국 런던의 ‘빅벤(Big Ben)’이라고 불리는 의사당 시계탑 근처의 웨스트민스터 브리지(Westminster Bridge)에서 한 남자가 승용차를 인도로 돌진하는 공격을 벌인 뒤 의사당 출입구에서 경찰관에서 흉기를 휘두르다 경찰의 총에 맞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5명이 죽고 4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는데, 그 중에는 마침 한국에서 관광을 갔던 관광객 5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은 런던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곳들 중의 하나입니다. 의사당이 있고, 그 옆에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이 있고, 의사당의 시계탑 별명이 ‘빅벤’이라고 불리는 아주 유명한 곳이고, 또 웨스트민스터 다리를 건너면 런던아이(London Eye)가 있는 아주 유명한 곳이며 관광객들이 꼭 가는 관광지입니다.

 

그 바로 얼마 후인 2017년 6월 3일에는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영국 런던의 런던브리지(London Bridge)에서 용의자 3명이 미니밴을 타고 시속 50마일로 달리며 사람들을 치어서 8명이 죽고 48명이 다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차가 난간을 들이받고 선 다음에는 용의자들이 차에서 내려 바로 근처에 있는 보로우 마켓(Borough Market)에 있던 시민들에게 흉기 공격을 가했고, 몇 분 후 무장 경찰이 출동하여 현장에서 그들을 사살했습니다.

 

그 유명한 타워브리지(Tower Bridge)가 잘 보이는 다리가 바로 이 런던브리지입니다. 그 근처에 유명한 시장 중 하나인 보로우 마켓도 있으며, 또 런던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더샤드(The Shard)’도 있어서, 역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입니다.

 

저로서는 파리 테러도 안타까웠지만, 런던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테러가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테러가 발생하기 바로 2년 전쯤에 저와 가족이 걸어 다녔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테러범들이 2년 정도만 일찍 테러를 벌일 마음을 품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그 자리에 있던 저와 제 가족이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런던을 가보려 했는데 런던을 피해야겠구나.’ 하실지 모르겠지만, 테러 공격으로 인하여 죽은 사람들 중에 그날 그 시간에 그런 끔찍한 사건이 벌어질 줄 알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던 때에 그런 일들이 벌어졌고, 게다가 그런 테러 공격이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명소와 아무나 다닐 수 있는 길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학교에서 총기 난사가 일어나고, 클럽에서 총을 쏘는 일 등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군대 안에서도 총을 쏴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는 세상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한마디로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 ‘나는 안전한 데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를 못합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불안하고 위험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온갖 종류의 보험들을 사 놓습니다. 생명보험을 들고, 자동차 보험은 운전하려면 당연히 들어야 하고, 의료보험, 치과보험, 안경보험, 심지어 일부 연예인들은 몸의 일부에 대한 보험도 듭니다. 집에도 폭풍, 홍수, 화재, 지진 등에 대비한 보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험이라는 것은 피해를 보았을 때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 드는 것이지, 피해 자체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어떤 사건이 벌어져 죽었다면, 아무리 보험금을 받아도 죽은 사람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디서 언제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자신을 준비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내일 하지, 다음에 하지’가 아니라, 지금 빨리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그렇게 미리 준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온갖 보험을 다 들어놓는 겁니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갑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그것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주의 날은 갑자기 올 것이다 (1~3절)

 

오늘 성경 본문이 사실은 대강절이나 말세에 대해서, 종말에 대해서 말씀을 전할 때 많이 사용하는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종말이 예상하지 못하는 때에 갑자기 임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대표적으로 마가복음 13장에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사도행전을 죽 살펴보고 있지만, 2차 전도여행 때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빌립보에 갔다가 그 다음에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지금의 그리스 북부 지역입니다 거기서 복음을 전하다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박해를 하고 하도 난리를 쳐서 그곳을 금방 떠나야 했습니다.

 

바울은 그곳을 떠나면서 이제 갓 믿은 초신자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그냥 두고 가는 게 마음에 안쓰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불안해서 그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 데살로니가전서이고 조금 후에 또 쓴 것이 후서입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비슷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1-2절)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리켜 마치 도둑이 언제 훔치러 올지 모르는 것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도둑이 미리 ‘당신 집에 훔치러 가겠습니다.’ 예고하고 오는 것을 보셨습니까? 영화에는 그런 것이 가끔 나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제가 내일 새벽 1시에 댁으로 찾아뵙고 선생님께서 아끼시는 물건들을 저의 집으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현금도 포함됩니다. 협조를 부탁드립니다.”라고 하는 도둑은 본 적이 없습니다. 몰래 들어가 훔칩니다. 한국도 그렇고 이곳도 그렇고, 집에서 나가는 것을 미리 지켜보고 있다고 집이 비었을 때 들어가 훔칩니다. 결코 미리 예고하지 않습니다. 도둑이 언제 올지를 집 주인이 안다면 미리 경찰을 불러서 잡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끝나는 날, 또는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는 그날이 바로 그럴 것이라고 성경에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알려주셨고, 바울도 여기서 말합니다. 그 날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날은 결코 피할 수가 없다는 점이 더욱 심각한 일입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3절)

 

그날,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반드시 옵니다. 종말론 이단들 때문에 재림에 대해 이야기하면 거부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올 때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중에 그날이 오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조금만 있다 오세요. 나는 지금 할 일이 있으니까 조금 하고 올게요.’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라고 비유합니다. 물론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라 지금의 눈으로 이것을 보면 안 됩니다. 지금은 진통제도 있고, 의료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계산법도 그렇고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해산의 날이 올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기를 낳으신 분들도 예상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고통이 와서 빨리 병원에 가 아기를 낳은 분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 보면 길을 가고 있다가 갑자기 낳았다거나, 비행기 안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경우도 가끔 신문에 나옵니다. 알지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임한다는 겁니다. 임신해서 예정일이 거의 다 된 여인은 배가 불러 있는데 ‘나는 평안하다. 안전하다. 나는 상관없다.’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아기를 낳을 때가 거의 되었고 예정일이 거의 다 되었으면 항상 깨어서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조금만 배가 아파와도 이게 그게 아닌가 하고 빨리 눈치를 채야 합니다. 그럴 때 갑자기 진통이 오고 아기가 나오더라도 대비하고 있기 때문에 괜찮은 겁니다. 정확히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대비하고 있으니까 그 일이 일어나도, 즉 진통이 와도 빨리 가면 되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평소에 대비하며 자신을 준비시키고 있으면, 그날이 갑자기 와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2. 그날은 믿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없다 (4~8절)

 

이처럼 우리가 그날을 피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좋은 소식도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밤이나 어둠에 속한 것이 아니라 빛과 낮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4-5절)

 

그날이 언제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러 사인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습니다. 아기를 낳을 때도 어느 정도 사인이 자꾸 오니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둠이 아닌 빛 가운데 살기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날이 언제 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날이 갑자기 오면 나는 큰일인데. 그럼 안 되는데. 예수님이 조금 늦게 오셔야 하는데...’라고 생각하신다면, 뭔가를 오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날은 우리에게 빨리 오면 좋은 날이지, 결코 나쁜 날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축제의 날입니다. 그날은 정말 엄청난 날입니다. 그런데 밤에 자고 취해 있는 사람들은 도둑이 밤에 올 것에 대비하여 자신을 준비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큰일이 날 수가 있습니다. 밤에 자고 취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만약 낮에 취하고 자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비정상이거나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6-7절)

 

여기에서의 핵심은, 우리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를 항상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이고 낮의 자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빛의 자녀, 낮의 자녀로서 무얼 해야 합니까? 깨어 있으라는 겁니다. 잠을 자지 말고 깨어서 정신을 차리라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깨어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특히 ‘정신을 차리는 것’이 중요한데, 중요하기 때문에 6절과 8절에서 두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8절)

 

정신을 차리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날을 잘 준비하는 열쇠가 된다고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신을 차리는 것’은 누군가가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할 때 뒤통수를 탁 때리면서 “야, 정신 차려!”라고 하는 식이 아닙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맑은 정신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정신입니다. 즉, 이것은 자기절제(self-control)를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면, 유혹이 올 때 거기 쉽게 넘어가고 삶이 무너지게 됩니다.

 

유혹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세 가지로 유혹했는데, 그 세 가지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편하게 가라’는 것입니다. ‘고생할 게 뭐 있냐? 편하게 가라.’ 우리에게도 똑같습니다. ‘왜 그렇게 고생하느냐? 그냥 실컷 자라. 밤에도 자고 낮에도 자라. 마시고 싶은 대로 실컷 퍼 마셔라. 밤에도 마셔라. 낮에도 마셔라. 얼마나 편안한 삶이냐? 뭐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게 뭐 있느냐? 적당히 해라. 편안하게 해라. 그냥 편하게 가는 게 좋다.’ 이것이 모든 유혹의 핵심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유혹은 다 편안하게 가라는 겁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항상 잠을 자고 취하라는 유혹을 수없이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단지 우리의 육신이 잠을 자고 술에 취하는 것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잠을 자고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깨어 있지 못하는 겁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깨끗한 마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게 되면 쉽게 유혹에 그냥 넘어갑니다. ‘편하게 가라. 고생할 게 뭐 있냐? 적당히 해라.’라는 유혹에 그냥 넘어가버리는 것입니다. 깨어서 정신 차리고 있지 않으면 거기에 그냥 넘어가버립니다.

 

자기절제라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편안함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아니다. 나는 편안한 것이 내 삶의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내 목적이다.’라고 편안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편안하게 하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제대로 섬기면 진정한 평안을 주십니다.

 

수없이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편안하게 하자고 내 마음을 주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중독’이 됩니다. 내가 원해서 한 건데, 내가 편안하자고 한 건데, 놀랍게도 편안함만 추구하게 되면 나중에는 거기에 완전히 빠져서 중독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빠져나오고 싶어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이제는 자기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게 됩니다. 완전히 그것의 노예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편안한 삶을 추구하게 되면 내가 좋아지는 게 아니고 오히려 뭔가의 노예가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편안한 삶을 추구하면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서 편안함을 거부하고 자신을 절제할 때 우리는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8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전쟁 때 군인들이 사용하는 “호심경”(가슴에 붙이는 보호용 철판)을 붙이고 머리에는 “투구”를 쓸 것을 말합니다. <The Lord of The Rings>(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에서 갑옷 입는 것과도 같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의 편지들 중 초기에 쓰였는데, 나중에 로마로 가서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쓴 에베소서를 보면 이것이 조금 더 발전해서 더 자세히 영적 갑옷을 입는 것에 대해 설명합니다. 또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여기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전서를 쓰면서 바울이 갑옷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었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한 개념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더 발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호심경을 가슴에 붙이고 머리에 투구를 쓴다는 것이 뭡니까? 군인들이 쓰는 것입니다. 시민들이 무슨 이런 걸 쓰고 살겠습니까?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시민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군인들이 입고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로 군인이란 말입니다. 군인은 전쟁에서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매일 영적 전쟁을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의 영적 싸움에 필요한 무기로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주어졌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믿음과 사랑, 그리고 구원의 소망이 필수적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자신에게 지금 질문해보십시오. ‘나는 지금 깨어 있는가? 나는 지금 정신을 차리고 살고 있는가?’ 다시 말해 ‘편안함을 거부하고 나 자신을 절제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혹시 편안함을 추구하며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까?

 

얼마 전 여기서 CBMC 주관으로 세미나도 하셨지만, 요즘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중독이 심각합니다. 이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몇 년 전에는 아이들이 들고 다니는 게임기로 주로 했는데,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합니다.

 

몇 년 전에도 아이들이 아빠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올 때 게임기를 보고 있다가, 보면서 내립니다. 그럴 때 제가 거기 있어서 “안녕하세요!”라고 하니까 그 아빠나 엄마가 “얘, 목사님에게 인사드려야지.” 하면 계속 게임기를 보면서 인사하고, 또 계속 그것을 보면서 저리로 갑니다. 지금은 더 심합니다. 스마트폰 때문에 어디를 있든지 세계를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해졌습니까?

 

또 스포츠에 푹 빠진 사람도 있고, 티비나 유튜브나 동영상 보는 데 푹 빠진 사람도 있고, 자기 일이나 (믿기지 않지만) 공부에 푹 빠진 사람도 있고, 자기 가족에게 푹 빠져서 다른 것은 하나도 안 하는 사람도 있고, 돈에 푹 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요즘 시대에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중독이 심각합니다. 인터넷에 중독될 때 옛날부터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들었습니다. 마이크로웨이브오븐(microwave oven)을 쓸 때 몇 분이나 몇 초를 누르는데 거기에 자기 비밀번호를 넣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또 요즘은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바로 옆방에 있는 아이에게 문자(text)로 “야, 밥 먹어.”라고 보냅니다. 그러면 아이도 “메뉴가 뭔데?”라고 묻습니다. 가까운 친척들과 잘 연락을 안 하는 주된 이유도 그들의 카톡 아이디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깨어 정신을 차릴 때, 즉 편안함을 추구하는 삶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절제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 앞에 가는 날을 잘 준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깨어 있지 못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뭔가에 편안함을 추구하며 푹 빠져 버리면 그것의 노예가 되어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결국 그날을 준비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5)이기 때문에 깨어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써야하겠습니다(8). 빛과 낮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밤에 속한 사람, 어둠에 속한 사람이 뭐 하러 그렇게 하겠습니까? 어둠이나 밤에 속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고 편안함만 추구하면서 늘 잠을 자고 취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갑옷)을 입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써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소속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의 소속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소속이 아닌 분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한다면, 소속이 분명하다면,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깨어서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장하고 나가 싸울 때 우리는 이길 수 있게 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며,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준비할 수가 있게 됩니다.

 

3. 우리는 서로 세워줄 책임이 있다 (9-11절)

 

오늘 성경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2). 사람들은 도둑으로부터 자기 재산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준비를 다 해놓습니다. 아주 비싼 안전장치(security system)도 하고, 금고도 부서지지 않는 최고급으로 갖다 놓습니다.

 

요즘은 시큐리티 카메라들을 집에 설치하기도 합니다. 문 앞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누가 왔는지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다 인터넷을 사용하기 때문에 해커들에게 뚫려서 그들이 나를 24시간 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안전하지가 않습니다. 안전한 게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최고의 security system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9-10절)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제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하고도 완벽한 시큐리티 시스템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렇게 완벽한 안전시스템이 보호해주는 빛의 자녀, 낮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복음을 받은 자들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11절)

 

빛의 자녀, 낮의 자녀, 또 구원을 얻은 사람으로서 우리가 할 일은 바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피차 권면하라’는 것은 ‘서로 격려해주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 즉 우리에게 구체적인 사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서로 격려해주고 서로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것이 영어성경에는 “encourage one another and build each other up”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다른 한 단어로 표현하면 바로 ‘edify’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보면 두 개의 단어로 이뤄져 있는데, ‘집’과 ‘세우다’입니다. 그러니까 덕을 세운다는 것은 ‘집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덕을 세우는 것은 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어떤 집입니까? 그리스도의 집, 즉 교회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가 새해가 되어 집중해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에는 건물도 있고 조직도 있지만, 건물이나 조직이 교회가 아니라 교회는 사람입니다. 바로 믿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우리들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 덕을 세우라는 의미입니다. 서로 힘을 주고 격려해주고 서로를 위해 섬기는 것을 통해서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됩니다.

 

교회가 겉으로만 뭔가를 막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주님을 닮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낙심한 사람이 있으면 위로해주며 기도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예배 후에 교회당을 떠나서 자신의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가게 될 텐데, 그러면 어떤 일이 이번 주에 벌어지겠습니까?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유혹이 올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은 여러 가지로 도전을 받고 때로는 조롱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상당히 적대적입니다. 점점 더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바로 얼마 전 성탄절을 지냈는데, 대부분의 상점들은 Christmas Sale이 아니라 Holiday sale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Merry Christmas” 대신 오래 전부터 “Happy Holidays”라고 하는 데가 대부분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리스도(Christ)라는 이름을 없애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종교와 분리시키는 의미도 있겠지만, 어떻게든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오래 전부터 미국 공공건물에서는 원래 십계명도 있었고 기독교와 관련된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다는 명목으로 철거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디를 가든지 쉽게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조롱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것입니다. ‘모이기에 더욱 힘쓰자’고 한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처럼(히 10:25), 우리가 ‘마지막 날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단지 교인 숫자 늘이려고? 예배 참석 숫자 늘이려고?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교제하고, 또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세워주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혼자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또 성경에 혼자 하는 신앙생활도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필요하고, 여러분은 제가 필요합니다. 또 앞뒤좌우에 있는 분들을 보십시오. 내가 그분들이 필요하고 또 그분들은 내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의 바른 모습입니다.

 

여기 와서 함께 예배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함께 예배하고 교제할 때 힘을 얻게 되고, 그래서 우리에게 적대적인 이 세상으로 나가더라도 거기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며, 거기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서로 격려하고 덕을 세워야 되겠는데,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 서로 덕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 것,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냉소주의’입니다. 오래 전부터 제가 느낀 건데, 요즘 굉장히 심해졌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의 토크쇼를 보면 굉장히 냉소적으로 비꼬는 것들이 많습니다. 아주 웃긴데 가만히 보면 비꼬는 것들이 많습니다. 개그 프로그램도 그렇고,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들며 웃기는 게 많습니다. 신문기사들도 보면 그렇고, 개인 SNS에 올리는 글들을 보아도 자기와 같은 편에게는 무조건 우호적이고 자기와 다른 편에게는 무조건 냉소적이며 조롱을 합니다.

 

인터넷 댓글이 오래 전부터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여러 유명한 사람들이나 연예인들이 수년 전부터 인터넷 댓글 때문에 큰 상처를 입고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으며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습니다. 이전에도 많이 그랬는데, 최근에도 유명 연예인들이 죽는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특히 정치나 연예계 기사가 하나 뜨면 거기에 벌 떼 같이 달려들어 댓글을 남기는 것을 봅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심한 욕이나 조롱이나 아주 냉소적인 반응입니다. 비웃고 조롱합니다.

 

제가 실제로 오늘 아침에 찾아보았는데, 경제에 대한 기사를 보니까 조금만 전문적이면 댓글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치나 사회나 정책결정이나 연예나 스포츠 기사는 수백 개에서 수천 개의 댓글이 달립니다. 어떨 때는 만 개가 넘어갑니다. 그런데 약간만 전문적인, 아니 그렇게 전문적이지도 않아도 경제 기사가 뜨면 5개 정도나 10개 이하로 달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뭘 알아야 댓글을 달지요. 그런 데에는 무식하니까 댓글을 못 답니다.

 

그런데 정치, 사회, 연예, 스포츠 같은 데는 대부분 냉소적이고 공격적으로 댓글을 답니다. 왜냐하면 자기감정에 근거해서 쓰기 때문입니다. 경제는 감정으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물론 자기가 돈을 잃었다면 감정적으로 할 수도 있지만, 학문적인 것은 감정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치나 연예나 스포츠 같은 것은 자기감정을 마음대로 표출할 수 있으니까 굉장히 조롱하며 비꼽니다.

 

이 냉소주의가 지금 문화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의 습관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그런 댓글을 단 적이 있습니까? 아주 좋지 않은 습관입니다. 그리고 이런 냉소주의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무너뜨립니다. 그런데 가장 크게 무너지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내가 댓글을 달아서 공격한 사람이 아니고, 댓글을 쓴 나입니다. 내가 무너집니다. 남을 깎아 내렸는데 내가 더 깎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를 인도해줄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를 세워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너뜨리게 되고 자기 자신도 무너뜨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이드를 우리가 어디서 찾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겨운데 억지로 읽어야 되는 게 아니라, 여기에 삶의 지혜가 담겨 있고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살아갈 때 우리 자신도 살아나고 다른 사람도 세워주는 일이 일어납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면 나 자신도 세워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붙들지 않게 될 때는 자기감정대로 그냥 표현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남들도 무너뜨리고 그 결과 나도 무너지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서로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일하게 우리 모두를 살리고 세워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서로 덕을 세우는 것에 있어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형제자매들을 세워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세워주기 위해서 있고, 또 여러분은 저를 세워주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앞뒤좌우에 있는 분들을 보십시오. 바로 이분들을 세워주라고 나를 이곳에 두신 것이고, 나를 세워주기 위해 이분들이 내 주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이나 행동으로 우리가 서로를 끌어내리고 무너뜨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것은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알지 못할 때도 너무 많습니다. 사실은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조금만 나에게 뭘 해도 용서하지 못하고 끝까지 기억한다면, 우리의 관계가, 우리의 교회가 세워지겠습니까 아니면 무너지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는 다른 사람을 무너뜨려야 내가 올라간다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과 반대가 될 뿐만 아니라, 상대도 무너뜨리고 나도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남들을 무너뜨리면 자기가 올라갈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렇게 될 것이니까 빨리 남들을 무너뜨리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방식이며 원리입니다.

 

사업이나 직장도 똑같습니다. 직장 동료를 눌러버리면 내가 더 올라갈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슷한 직종의 사업들을 다 무너뜨리고 내 사업체가 돈을 많이 벌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을 세워줄 때 내가 올라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남을 무너뜨리면 나도 무너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이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어떤 행동을 할 때 이런 질문을 해야겠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이 말이 또 이 행동이 이 형제를, 이 자매를 세우게 될 것인가 아니면 무너뜨리게 될 것인가?’ 피차 덕을 세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제와 훈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덕을 세우려 한다면 최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눈을 들어 ‘이분이 뭐가 필요한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야 하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공동체가 되겠습니까?

 

[나가는 말]

 

‘올해 2020년에 과연 나의 삶, 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고 고민하신다면, 고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 분명합니다.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11). 특히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더욱 그래야 합니다. 반드시 나는 내 주변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필요하고, 이 형제자매들은 내가 필요하다는 것,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것을 연습하라고 교회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 사랑을 연습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무서운 사실은,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공동체 안에서 피차 권면하며 덕을 세우는 데에 열심을 내지 않고, 자기 편안함과 유익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집중하게 된다면, 그 결과로 다른 사람들의 삶도 무너지고 나 자신의 삶도 무너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것을 정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 5:14-15)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물어뜯고 또 물어 뜯긴다면, 둘 다 무너지고 멸망합니다. 우리가 믿는 자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무너뜨리게 된다면, 과연 이 세상 어디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세워주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은 먼저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되는 일입니다. 서로를 세워주고 서로에 의해 세워지는 역사가 이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세워주기 위해 애를 쓰다 보면, 나는 열심히 상대방을 세워주려고 노력하는데 저쪽에서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나를 세워주려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실망을 느끼고, 더 나아가 분노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그냥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 끝까지 사랑을 퍼주는 것의 본을 우리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대가가 무엇이었습니까? 배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부활과 같은 영광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삼아 주신 것처럼, 그렇게 나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반드시 영광의 자리로 올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져도,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실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격려하고 덕을 세워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반드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 덕을 세우는 데 집중하게 되면, 상대방의 삶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새롭게 되고 회복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새해 첫 주일인 오늘, 특별히 우리가 직분자들을 세우는 이 예배를 통해, 바로 그렇게 서로를 세워주며 살기로 우리가 다짐하기를 원합니다. 교회의 지도자인 직분자들은 누구보다 솔선수범하며 서로 격려하고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직분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서로 격려하며 덕을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할 때 자신의 삶도 행복해지고, 또 주님의 교회도 든든히 서 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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