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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데살로니가전서

살전 5장 11절(제자공동체 2 - 서로가 함께) - 최태선

by Preacher 2023.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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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5장 11

제자공동체 II.-서로가 함께-

최태선 목사 2006.10.8.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지난 6일이 추석이었습니다. 저희는 제사도 지내지 않고, 친척들도 다 서울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귀성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해 저의 큰 형님이 평택으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해마다 추석이면 큰형의 집에 모이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올해 저희 집은 처음으로 짧지만 귀성행렬이라는 것을 경험해보았습니다. 평택은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평소에는 한 시간 이십분 정도가 소요되는 짧은 거리입니다. 저희는 고속도로의 혼잡을 피해 국도를 택했습니다. 하지만 국도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11시에 출발했는데 그곳에 도착하니 두시 반이 넘었습니다. 기다리던 형님 식구들은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희들은 나은 편이었습니다. 우리 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동생의 가족들은 혼잡해도 고속도로가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 경부고속도로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평택에 도착한 것은 오후 일곱 시가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먼저 점심을 먹고 기다리다 동생네와 함께 저녁을 먹고 나니 시간이 어느새 아홉 시를 훌쩍 넘어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반포에 사는 누님은 자정을 넘긴 시간에야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귀경 전쟁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해 보았습니다.

 

날씨는 참 좋았습니다. 따스한 가을 햇살을 받아 빛나는 황금 들녘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마다에는 넘치는 차량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곳곳에서는 서로 먼저 가려는 무질서와 사고 때문에 더해진 정체 행렬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친척을 찾아 가는 행렬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해마다 이렇게 귀성이라는 전쟁을 치르는 것일까요? 물론 차례와 제사, 그리고 성묘를 치르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의식입니다. 참으로 민족복음화의 길이 만만치 않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종교의식 밑에 흐르고 있는 정신은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의식 밑바닥에 깔린 영적인 갈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공동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실 때부터 이미 우리는 그분의 존재방식을 좇아 우리도 모르게 그것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반역한 인간이 가장 먼저 잃은 것은 바로 공동체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된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동체 안에 존재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새로운 공동체의 대안을 마련하였습니다. 가인은 성을 지었습니다. 그것도 공동체의 일종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화합의 공동체가 아니라 갈등의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 유지되는 공동체의 필연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간들이 어떠한 국가를 세우건 어떠한 공동체를 건설하건 그것은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뿌리 깊은 공동체 의식이 투사된 또 다른 하나의 모습이 바로 귀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 때의 완벽했던 인간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다시 그 가능성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공동체입니다. 교회입니다. 반역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완전한 공동체를 만들거나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마침내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혀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반역한 인간들이 다시 완벽할 수 있는 공동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경쟁과 힘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그것은 존재하기 쉽지 않은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을 덧입은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그것을 실현해 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실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진정한 교제인 코이노니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옛 습성의 지배를 받는 제자들에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방법은 바로 ‘콤무니오’(상통)입니다. 서로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서로’라는 단어, ‘알렐론’입니다.

 

경쟁의 세상 속에서 완전한 성화를 이루지 못하고 옛 습성을 지닌 채 과정의 존재로 살아야 하는 제자들에게, 성령의 힘을 통해 완전한 공동체를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졌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며, 서로의 짐을 져주고, 서로를 참고 견디며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는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그것을 실제로 이루어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세상이 감동하였습니다. 감동한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들도 그 공동체 속의 일원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이 복음을 이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십자가 사건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대교회 제자들의 삶을 보고 매료되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마침내 그들도 제자들이 믿고 있던 복음을 믿는 제자들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는 세상이라는 척박한 땅 속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기간은 오래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그 ‘서로’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교회는 ‘콤무니오’이어야 합니다. 서로가 상통하는 관계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시공동체라 부르는 초대교회 이후 그것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교회 속으로 다시 ‘경쟁’이라는 세상의 방식이 들어오고, 힘으로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상 임금들의 방식이 교회를 유지하는 방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로’라는 방식을 통해 유지되던 하나님 나라의 관계는 힘을 잃고 대신 거대한 힘을 지닌 반역한 인간의 타락한 방식인 종교라는 공동체가 교회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서로’라는 이 조그마한 낱말에 사실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신학이 압축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의 얼마나 많은 곳에서 이 서로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서로’라는 이 단어를 무심코 지나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서로’라는 단어가 얼마나 힘을 가지고 있는 단어인가를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짧은 한 문장을 묵상하는 동안 ‘서로’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를 실감한 적이 있습니다. 혼자서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기적이고 욕망을 지닌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혼자서 사랑하는 일은 할 수 있을 것도 같았습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상대방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루지 않아도 된다면 나 혼자서 상대방에게 사랑을 던져줄 수는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상대방과 함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 서로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겠다는 것을 저는 깊이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라’와 ‘서로 사랑하라’의 차이는 막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먼저 이 ‘서로’라는 단어가 성경에 얼마나 많이 언급되고 있는가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서로 우애하고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며(롬12:10)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합심하며)(롬12:10)

너희도 서로 받으라.(서로 받아들이십시오)(롬15:7)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서로 충고하십시오)(롬15:14)

너희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롬16:16)

서로 기다리라.(고전11:33)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하십시오.)(고전12:25)

서로 종노릇 하라(서로 사랑으로 섬기십시오)(갈5:13)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갈6:2)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서로 위로 하십시오. 서로 건설하십시오.(build each other up.)(살전5:11)

너희끼리 화목하라.(서로 화목하게 지내십시오)(살전5:13)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서로 선을 행하십시오.)(살전 5:15)

서로 용납하고(서로 사랑으로 참아주십시오)(엡4: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서로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엡4:32)

피차 복종하라(서로 순종하십시오)(엡5:21)

피차 용서하라(서로 용서하라)(골3:13)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서로 죄를 고백하십시오)(약5:16)

서로 기도하라(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약5:16)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서로 진심으로 다정하게 지내십시오.)(벧전1:22)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고(서로 대접하십시오)(벧전4:9)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서로 겸손하게 대하십시오)(벧전 5:5)

서로 사귐이 있고(서로 친교를 나누십시오)(요일1:7)

 

위에 열거한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열거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신약 성경의 훈계에는 이 상호 협동의 언어구조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교회론에 있어 상호 협동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피차 덕을 세우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방향이 좀 빗나간 번역입니다. 초대교회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성을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build each other up.이라고 번역된 이 부분을 개인의 경건의 개념인 덕으로 변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말 그대로 ‘서로 건설하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건설한다는 말은 곧 당시의 지역 공동체였던 교회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말입니다.(사도 바울은 거의 언제나 그랬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교회를 건설한다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건설이라는 이 개념과 관련하여 사도 바울의 교회론의 일부가 전개됩니다. 기독교 건설론의 뿌리는 구약 성경입니다. 그중에 특히 예레미야서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는 “세우다”와 “무너뜨리다”라는 한 쌍의 개념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민족들을 건설할 수도 있으시고 괴멸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귀양살이가 끝나고 나면 새로운 공동체로 건설하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여 멸하며 곤난케 하던 것같이 경성하며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27-28)

 

이 대목에서 말하는 대로 “건설”이란 일으켜 세우고 살아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예레미야서 24장 5-7절 말씀에서 더욱 뚜렷해집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 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와 같이 보아 좋게 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고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로마서 서문과(롬1:-7)과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서 나타나듯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명을 예레미야의 소명에 비추어 이해합니다. 그는 예레미야 1장 4-10절에서 건설과 파괴에 관한 양식을 이어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러하셨듯이 자신도 주님에게서 공동체를 “세우고 무너뜨리지 아니할” 권세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 자기가 사도로서 받은 직분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최종적으로 달성될 하나님 백성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세운다.’ ‘건설한다.’는 것의 대상은 영적으로 성숙해야 할 개인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즉 덕이 아니라) 교회와 관련된 것이며 구체적인 지역 공동체들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창설과 보존, 교회의 발전과 실현, 그것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세운다.’(오이코도메인)이라는 말로 나타낸 것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혼자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공동체를 세울 권한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건설에는 공동체 안에서 모두가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호 책임은 사도 바울의 여러 편지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서신서들의 끝부분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인 동료들을 소개하고 안부를 전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많은 부분들에 서로의 신학이 들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가 그러합니다. 당시의 예배는 공동체가 참여할 수 있는 예배였습니다. 또 갖가지 은사들이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여기서도 오늘의 본문과 마찬가지로 덕을 세우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그래서 이것을 for strengthening of the church.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강하게 하기 위해 이렇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방언은 한 문제점입니다. 방언이란 황홀경 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나님의 위업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배 중에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방언하는 사람 자신에게는 매우 유익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얻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언을 하는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여 “건설하고 격려하며 위로합니다.” 사도 바울은 공동체를 위하여 건설적으로 질서 지어진 그런 예배를 요망합니다. 그래서 그런 유익한 예언조차도 한 사람씩 차례로 하며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점으로 분명해지는 것은 예배에 모인 모든 공동체의 건설은 집례자에게만 주어진 소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그런 집례자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공동체의 건설은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의 소임입니다. 모든 사람이 예배에 참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예배였습니다. 예배참여자들이 서로 기다려 주고, 서로 반기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충고하고, 서로 가르치며, 서로 걱정해주는 그런 예배를 사도 바울은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배를 보러 간다.’고 말합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자가 있고 그저 보기만 하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서 드러나 있는 것처럼 오늘날의 예배는 ‘서로’의 신학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공동체성이 사라진 것입니다. 공동체성이 사라진 것은 결국 교회가 교회됨을 상실한 것입니다. 고린도전후서를 통해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가 공동체임을 알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가 노력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서로를 통해 이루어지는 진정한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총망라하는 것입니다. 삶뿐만 아니라 예배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잘못과 실수가 위험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성경에 바탕을 둔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 그 본질을 우리가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의 신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교훈인 것입니다.

 

서로가 해야 할 일은 충고에서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권징’이나 ‘치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목사나 장로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충고하고 경고함으로 다스리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6장 1절 말씀을 잘 살펴보면 이 권징이나 치리 또한 모든 사람이 공동체 건설을 위해 목사와 장로만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여러분은 영적 인간들인만큼)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매우 조심스럽게 구분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각자가 스스로 할 일입니다.(단수) 그러나 형제나 자매를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모두가 할 일입니다.(복수) 모두가 영적 인간들임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죄인이 된 사람을 회개하도록 이끄는 것은, 개인적으로 지도자인 목사나 장로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온 공동체가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해있는 공동체인 교회공동체를 위해 충고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며, 공동체의 누군가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목사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장로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성도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목사도 장로도 잘못이 있다면 충고를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서로 함께 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2절 말씀 또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저는 이 말씀도 교회의 공동체성을 잘 드러내는 말씀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예화로 들었던 책 <상실은 있어도 상처는 없다>라는 책을 읽으며 깊게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갑자기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333일간의 이야기를 아내는 투병축제라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마지막 에필로그를 통해 저자는 남편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감사의 찬양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강력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정말 대단한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녀가 그런 슬픔과 암담한 상황 속에서 감사의 찬양을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 책을 읽어보면 남편의 모든 치료비와 부모를 부양할 돈과 아이들의 대학까지의 학비를 회사가 책임져 주었습니다. 교회의 집사님들은 남편 간호에 손이 모자라는 그녀를 도와 그녀의 세 딸들을 기꺼이 맡아주었습니다. 그녀의 짐을 서로 진 것입니다. 회사와 교회가 그녀의 짐을 나누어 져줌으로써 그녀는 그러한 엄청난 상실 속에서도 감사의 찬양을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 것입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며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치료비와 부모와 아이들을 위한 모든 비용을 회사가 감당해주지 않았다면,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그녀의 아이들을 돌봐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녀가 감사의 찬양을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면서 절망하고 낙담하였을 것입니다. 서로 짐을 지라.’ 그것이 바로 진정한 공동체임과 교회의 소임임을 본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러 번에 걸쳐 교회란 공동체이며 성령의 체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우리는 오늘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배우고 들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가 함께’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성령공동체가 되어 진정한 ‘코이노니아’(교제)를 이룰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는 성화의 과정 속에 있는 연약한 인간들입니다. 서로가 함께 하는 그런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인 교회를 건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무참하게 부서짐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교회란 성령께서 이루시는 사역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제 기나긴 기다림 속에서 교회란 서로가 함께 이루는 공동체라는 배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녀가 고아들을 위한 건물을 짓기로 하였다고 발표하였습니다. 돈은 준비되었느냐고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녀에게 있는 돈은 달랑 세 잎의 동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동전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동전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사용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녀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나타날 것을 믿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손에 붙들리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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