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17장 34-40
오늘의 골리앗 앞에 선 교회 [교회창립65주년]
안효관 목사 2020-06-21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서 지금 세계적인 대공황상태인 팬데믹(Pandemic)에 빠져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팬데믹을 선언했다는 것은 단순히 전세계가 코로나19의 감염에 노출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팬데믹을 선언했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인력으로 코로나19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데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공식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글로벌 경제의 침체 등 지구촌 구석구석이 위기상황에 이르렀음을 경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도 많이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코로나19는 우리의 삶에 많은 것들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코로나19 이후를 ‘뉴노멀’(New Normal)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 표준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의당 그럴 줄로 어겼던 것들이 그렇지 않는 것이 되었고, ‘새로운데!’라고 말하는 것들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를 말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탈종교화입니다. 물론 탈종교화 현상은 비단 코로나19 이후에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산업화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미 탈종교화 현상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성공회의 주교인 존 셸비 스퐁(John Shelby Spong) 신부는 미국에서 제일 큰 동창회는 ‘교회 졸업 동창회(church alumni association)’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에서 교회 다니기를 중단한 사람들, 교회를 졸업하고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어쩌면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신의 자리에 인간이 차지하고, 계시의 자리에 이성이 눌러 앉은 것처럼 산업화 시대에 탈종교화는 계속되었는데, 이번 코로나19로 인해서 탈종교화는 거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가속화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코로나19 이후로 비대면(Un-tact)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교회의 모임이 힘을 잃거나 의미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모여서 찬송하고, 모여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교제하는 일들이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코로나19가 종식되지 않아서 그런긴 하지만 코로나19가 어느 정도 진정되면서 교회에 모여 오프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주)지앤컴리서치의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지난 5월 24일을 기준으로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린 성도들의 숫자는 코로나 이전에 베해 61.8%에 불과했습니다. 바꿔 이야기 하면 코로나 이전에 100명이 모인 교회라고 한다면 코로나 이후 62명 정도만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코로나19 이후에 교인수가 19.7% 정도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 100명이 모인 교회였다면 코로나가 종식된다 하더라도 80명 정도만 모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조사도 있습니다. 역시 (주)지앤컴리서치의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 국민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생겼습니다. 전체적으로 하면 우리 국민의 약 70% 가까이가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이 생겼고, 기독교인을 제외한 천주교나 불교, 그리고 무종교인들에게서는 거의 80% 가까이가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39%가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났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문화 속에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강한데,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더 뿌리 깊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갈수록 탈종교화, 특별히 탈기독교화 현상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무거운 질문 앞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 창립 65주년을 맞았습니다. 교회창립 65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 앞에 아주 엄중한 도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탈종교화, 탈기독교화되어 가는 이 세상의 도전에 우리는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본문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서 찾아보고, 거기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사사시대가 끝나고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왕이 세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꿈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로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왕이 사울입니다. 사울이 왕이 되면서 세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나라다운 나라가 만들어졌지만, 아직 나라의 틀이 완전히 잡히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나라는 블레셋이었습니다. 해양민족인 블레셋은 이스라엘 남쪽 해안가에 정착하였고, 발달된 철기문명을 받아들여 철로 만든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아직 철기문명이 받아들이지 못해 철로 된 무기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왕과 왕자만이 철로 된 칼을 가지고 있을 정도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엘라 골짜기에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전투에서 블레셋을 이끄는 장수가 바로 골리앗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골리앗은 키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약 3m에 달하는 거인이었습니다. 그가 입은 갑옷의 무게만도 57kg에 달했고, 베틀 채 같은 창 자루 끝에는 약 7kg에 달하는 창날이 달려 있었습니다. 기골이 장대한 그런 골리앗이 온 몸에 갑옷을 두르고 어마어마한 무기를 손에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눈을 부아리면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러자 그런 모습을 본 이스라엘 군사들은 모두 두려움에 치를 떨며 도망치거나 숨기 바빴습니다. 분명 이스라엘에도 장수가 있었습니다. 잘 훈련받은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이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았습니다.
그 때 다윗이 그 전쟁터인 엘라 골짜기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아직 어려서 전쟁에 참여할 나이가 아니었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고 형들에게 먹을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얼떨결에 전쟁터에 찾아왔다가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독하며 소리지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광경을 본 다윗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그 소리를 듣고 견딜 수가 없어서 자신이 그 골리앗과 싸우러가겠다고 자청합니다. 형들도 말리고, 사울 왕도 말렸습니다. 싸움에 용맹한 장수들도 겁을 내는 판에 어린 다윗이 싸우러 가겠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끝까지 싸우러 가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자신이 쓰고 있던 놋투구를 다윗의 머리에 씌워주고, 자신이 입고 있던 갑옷을 다윗에게 입혀주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을 다윗에게 줍니다. 골리앗과 싸우러 가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몇 걸음 걸어보더니 너무나도 불편하다고 생각하고, 갑옷을 벗어버리고 칼마저도 포기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 입도 다니던 옷을 입고, 자신이 양을 칠 때 가지고 다니던 막대기를 가지고, 맹수를 물리칠 때 사용했던 물매에 돌맹이 다섯 개만 주워가지고 골리앗과 싸우러 갑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잘 압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서 힘차게 돌진하면서 자신의 손에 들린 물매로 돌을 던져 골리앗의 이마에 정확하게 맞혔고, 골리앗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골리앗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창을 한 번도 휘둘러보지도 못했고, 자신을 지켜줄 것만 같았던 갑옷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윗의 물매돌 앞에 거인 골리앗은 그대로 쓰러지고 맙니다.
저는 이 모습에서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아니 창립65주년을 맞은 우리 교회를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위기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사울의 투구와 갑옷 그리고 사울의 칼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영적 전쟁터에 나가는 한국교회에 투구가 없고 갑옷이 없다는 것 때문에, 사울이 가졌던 칼이 없다는 것 때문에 한국교회가 위기에 빠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간다고 했을 때에 사울 왕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한다면 한국교회가 외형에 너무 많이 신경을 써왔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숫자가 늘면 좋은 교회이고, 큰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는 유능한 목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름다운 건물을 가지고 좋은 환경 속에서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면 좋은 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혹 우리 교회를 자랑해 보셨습니까? 무엇을 자랑하셨습니까? 65년이라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교회라고 자랑하셨습니까? 우리 교회가 교회당을 예쁘게 잘 지었다는 것을 자랑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교회는 몇 명이 모이는 교회라고 자랑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교인 수가 우리보다 적은 교회에 다니는 분들을 보면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진 않으셨습니까? 강단이 화려해야 하고, 건물이 커야 하고,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야 하고, 재정적으로 안정되어야 하고, 교회 안에 유명한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으셨습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자랑거리로 생각한 것, 우리 교회를 생각하면서 기도했던 것들이 혹 그런 것들이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도 잘못된 기도를 해 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을 보십시다. 다윗은 투구와 갑옷과 칼이 없어도 골리앗과 싸우러 가는데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투구, 왕의 값옷, 왕의 칼을 가진 사울이나, 어떤 군사훈련을 잘 받았던 장수들조차도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왕의 투구가 없어도, 왕이 입던 갑옷을 입지 않았어도, 사울이 허리에 찬 칼을 손에 들지 않았어도 골리앗과 싸우러 가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사울이 씌워준 투구, 사울이 입혀준 갑옷을 벗어버렸고, 사울이 쥐어준 칼을 포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골리앗을 무찌를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다윗이 입는 옷이 있습니다. 그저 평범한 옷입니다. 양치기 옷입니다. 다윗은 다윗이 가진 무기를 가졌습니다. 지팡이와 물매입니다. 그 지팡이와 물매가 어떤 것입니까? 사자도 물리치고 곰도 물리쳤던 무기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별 볼 일 없는 무기처럼 보입니다. 골리앗은 그것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무기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무기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왕의 갑옷을 입고 왕의 칼을 차고는 시험 삼아 걸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익숙하지 않아 입고 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가 거기에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는 것을 입고는 너무나도 익숙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에 너무 익숙해져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충분히 세상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세상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몸집을 키워왔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힘을 기르는데 안간힘을 썼습니다. 세상을 향해 ‘우리가 너희보다 더 힘이 세다.’고 소리치고 싶어 했습니다. 다윗이 벗어버렸던 것을 교회가 입고 싶어 했고, 다윗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포기했던 것을 움켜쥐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힘을 가졌습니다. 세력이 커졌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힘은 커졌고 세력은 커졌는데,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렸습니다. 믿음의 능력을 잊어버렸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힘은 오직 하나, 믿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믿음입니다. 사울의 투구, 사울의 갑옷, 사울의 칼이 아니라 다윗의 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두렵지 않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믿음, 바로 그 믿음 말입니다.
여러분, 한국교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살펴보십시다. 우리는 과연 다윗과 같은 그런 믿음으로 살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우리도 사울의 화려한 투구를 갈망하진 않았습니까? 사울 왕이 입던 튼튼한 갑옷이 있어야 내 삶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살진 않으셨습니까? 내 손에 사울의 칼이 들려져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 칼을 손에 쥐기 위해서 안달하며 살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화려한 세상의 투구가 내 머리에 씌워졌을 때 만족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신 증표라고 착각하며 말입니다. 세상의 권력이라는 갑옷, 안정된 직장이라는 갑옷, 성공이라는 갑옷을 입고선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셨다는 거짓된 믿음에 안주하며 살았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비난의 칼날을 휘두르기 위해서, 누군가를 내 앞에 무릎 꿇게 하기 위해서 힘의 칼날을 휘두르며 그것에 도취되어 세상에 군림하려는 욕망으로 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마치 세상을 이기는 방법인양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고 한국교회는 투구를 벗어야 합니다. 갑옷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손에 쥔 칼날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진실된 믿음으로 서야 합니다. 교회의 능력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붙잡고,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그것만이 이 탈종교화 시대에 교회가 살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된 믿음을 회복하는 길만이 탈기독교화 시대에 교회가 살아남는 방법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믿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을 때 교회는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위기 앞에서 두렵지 않게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다윗은 거대한 장수 골리앗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아무리 힘든 시대이지만, 아무리 많은 변해버린 시대이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가는 사람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시대가 변할 때 사람들은 세상의 힘을 가지려도 안간힘을 쓸 것입니다.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아야 하고, 문제가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욱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아무리 세상이 빨리 변해도, 아무리 많은 것들이 변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투구, 사울의 갑옷, 사울의 칼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오늘의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교회가 믿음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믿음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변화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남는 방법입니다.
'구약 -------------------- > 사무엘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상 18장 1-5절(언약의 신비와 세례) - 신만교 (1) | 2024.04.12 |
---|---|
삼상 18장 1-5절(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 안효관 (0) | 2023.12.24 |
삼상 20장 12-17절(다윗과 요나단) - 문기태 (0) | 2023.08.20 |
삼상 21장 10-15절(역경에 대처하는 방법 하나) - 안효관 (0) | 2023.07.30 |
삼상 21장 10-15절(역경에 대처하는 방법 또 하나) - 안효관 (0) | 2023.07.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