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18장 1-5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안효관 목사 2016-08-28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북 아일랜드의 종교분쟁은 18세기부터 시작되어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분쟁을 빗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성공회 신부님과 천주교 신부님이 차를 타고 가다가 사거리에서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가 나자 두 신부님이 차에 내리는데, 가만 보니까 서로 다른 편 신부님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러자 먼저 천주교 신부님이 다가와서 악수를 청하며 말했습니다. “지금 시내에는 성공회와 우리 천주교가 싸우고 있으나 사실 우리는 한 형제 아닙니까?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지내야 합니다.” 그러자 성공회 신부님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맞습니다. 먼저 우리 신부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두 신부님은 서로 부둥켜안기까지 했습니다.
잠시 후 천주교 신부님이 차에서 술과 술잔을 가지고 나와서 성공회 신부님에게 “우리 함께 화해의 잔을 나눕시다.” 그러면서 술을 권했습니다. 순진한 성공회 신부님은 기쁘게 받아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마신 술잔을 천주교 신부님에게 건네주면서 “신부님도 마시십시오. 우리 함께 건배합시다.” 그러자 천주교 신부님이 슬며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는 경찰이 온 후에 마시겠습니다.” 천주교 신부님이 성공회 신부님께 화해하자며 권한 술잔은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자는 의미에서 권한 술잔이 아니고, 교통사고가 상대방의 음주운전 때문이라고 뒤집어씌우기 위한 계략이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사는 시대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해 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아무나 쉽게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시대입니다. 때로는 사랑한다고 나에게 다가오지만, 사실은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 접근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찰떡같이 믿게 만들어놓고는 뒤에서 배신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자기의 이득이 달린 문제라면 오래된 우정도 쉽게 버립니다. 서로를 향한 신뢰도 무참히 깨뜨려버립니다. 심지어 신앙까지도 버릴 수 있는 무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불신으로 가득 차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쉽게 등을 돌려버리는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다윗과 요나단의 각별한 우정을 보여주는 -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가장 존경받는 왕은 다윗 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작은 시골마을인 베들레헴 출신의 평범한 목동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에 찾아가서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들 가운데서 차기 왕을 세우시길 원하시니 아들들을 다 불러오라.’고 하자 이새는 막내인 다윗을 그 자리에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이새가 판단할 때, ‘하나님께서 내 아들들 중에서 이 나라의 왕을 간택하신다면 최소한 다윗은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른 아들들에 비해서 다윗은 왕이 될 자질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다고 아버지 이새가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위대한 왕, 가장 존경받는 왕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보았을 때에도 왕이 될 자질이 없어보였던 그 다윗이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 든든한 후원자가 2명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던 사무엘이라는 선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사울왕의 아들인 왕자 요나단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다윗의 울타리와도 같은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25:1절에 보면, 사무엘이 죽자 다윗은 바란 광야로 몸을 피합니다. 지금까지 사울 왕이 수많은 군사를 풀어 자기를 죽이려 할 때에 다윗이 생명의 위험을 느끼면서도 유다 땅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울타리였던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무엘이 죽자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해줄 울타리가 없다고 생각하고는 바란 광야로 도망친 것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울타리와 같은 사람이었다면, 요나단은 그 울타리 안에서 꿈과 희망을 키워가며 함께 놀아주었던 소꿉친구와도 같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사무엘상 17장에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 소년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 거인 골리앗을 무찌른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사울 왕을 비롯해서 모든 군대가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의 장수인 골리앗 앞에서 모두 벌벌 떨고만 있을 뿐, 감히 골리앗과 싸우겠다는 생각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군대에 간 형들에게 떡과 음식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전쟁터에 나간 다윗이 살아 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골리앗을 보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양을 칠 때 사용하던 물매를 가지고 가서는 골리앗을 죽이고 맙니다. 골리앗이 죽자 온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가 충천해졌고, 결국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서 블레셋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다윗의 공적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큰 전과를 세운 다윗을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은 바로 그 장면을 배경으로 한 말씀입니다. 사울 왕 앞에 선 다윗의 모습을 보니까 요나단의 마음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자기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너무나도 늠름하고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있는 다윗을 보자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1절에 ‘하나가 되었다’는 말은 둘의 마음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하나로 묶여졌다는 뜻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보면서 젊은 남녀가 서로 한눈에 반해버린 것처럼 그렇게 하나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모든 세대를 뛰어넘은 위대한 우정으로 각인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잘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우정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정이라는 것은 서로 마음이 맞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요나단의 마음에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요나단이 먼저 다윗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요나단은 왕자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양을 치던 평범한 목동에 불과합니다. 비록 블레셋 장수를 죽이는 전과를 세우기는 했지만, 요나단의 입장에서 보면 무시해버릴 수 있는 천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신분이나 환경을 초월한 사랑이 바로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왕자 요나단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왕자 요나단이 양치기 목동 다윗을 먼저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먼저 누군가에게 다가서고 먼저 마음을 열어 품어주는 것을 주저합니다. 특히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생기거나 자신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관계가 아니라면 먼저 접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뭔가 이익이 생기는 일에는 줄을 대려고 안달을 하면서도 자기가 손해될 관계 같아 보이면 한 발짝 뒤로 물러서게 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왕자입니다. 굳이 앞뒤를 따지자면 다윗이 요나단과 사귀고 싶어 해야 합니다. 왕자와 친분을 맺으면 자신에게 뭔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에서는 그런 이기적인 어떤 생각이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왕자의 신분인 요나단이 아무런 권력도 없고, 가까이 해 봐야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목동 다윗을 먼저 사랑했습니다.
여러분, 왕자 요나단이 목동 다윗과 사귀어서 자신에게 유익이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런 유익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단이 다윗을 먼저 사랑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면에서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은 진실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언가 유익이 되기 때문에 접근하려고 하고, 뭔가 자신에게 유리한 것 같으면 사랑하려고 하는 것은 진실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어떤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었고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로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임을 당하도록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 찡한 감동을 받고,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징표인 십자가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아낌없이 주고 싶어 합니다.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지면 뭐든지 주고 싶어 합니다. 어제 선물을 주었는데도 오늘 또 주고 싶고, ‘내일은 무얼 선물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사랑을 베푸시길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32) ‘독생자까지 주신 사랑이라면 다른 무엇인들 주시지 않겠는가?’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그런 사랑의 마음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이 다윗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본문 4절에 보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요나단이 입었던 겉옷은 곧 군복을 말합니다. 그 군복은 요나단이 왕자이기 때문에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옷으로 신분을 나타냈습니다. 자기가 입고 싶다고 아무 옷이나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입는 옷을 신하가 입으면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됩니다. 신분에 따라서 입는 옷이 달랐습니다. 전쟁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에서도 왕이 입는 군복이 있고, 장수들이 입는 군복이 따로 있고, 일반 병사들이 입는 옷이 따로 있습니다.
요나단이 입고 있던 바로 그 옷도 왕자가 입는 옷입니다. 아무나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그 옷을 다윗에게 입혀 줍니다. 그것은 요나단이 다윗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을 이제 자신과 같은 왕자로 취급해 주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왕자가 입고 있던 옷만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이후로 전개된 이야기를 읽어보면 나중에는 자기가 올라가야 할 왕의 자리까지도 다윗에게 주고 맙니다. 정말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을 받아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 받고 싶어 하는 욕망을 절제하고 오히려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사랑,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사랑을 받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사랑 받기만을 원한다면 이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멸종되고 말 것입니다. 받기만을 바란다면, 그래서 나눠줄 사람이 없다면 사랑은 곧 씨가 마르고 말 것입니다. 사랑이 가득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 받아야 할 사람이 먼저 사랑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받으려 하기보다 먼저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가득한 사회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아직까지 부족한 사랑의 여백이 있다면, 그건 사랑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베풀어야 할 사랑을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가슴을 적시고도 남을 만큼 풍부한 것입니다. 그 사랑은 결코 부족하거나 모자람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이고, 내 안에 감추어두기 때문에 모자라게 보일 뿐입니다. ‘사랑을 베푸는 자리,’ 그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 가슴에 있는 것보다 더욱 큰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자 수많은 여인들이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대를 맞이하면서 이렇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왕인 사울 때문이 아니라, 한갓 양치기 목동에 불과하던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의 일등공신은 왕인 사울이 아니라 무명의 목동인 다윗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노랫소리를 들은 사울 왕은 기분이 상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다 줄 때까지만 해도 다윗이 사랑스러웠습니다.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왕자의 의복을 다윗에게 입혀 주어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2절에 보면 사울 왕은 다윗에게 ‘집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다윗을 자기 곁에 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다윗이 그렇게 대견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에 사울 왕의 귀에 들린 소리는 다윗의 영웅적인 행동을 칭송하는 노래들뿐이었습니다. 왕인 자신보다 다윗이 더 인기를 얻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게 되자 사울 왕이 - 요즘 아이들 표현으로 한다면 - 머리끝까지 열이 바친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 왕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는다면 다윗이 그 인기를 힘입어 내 왕위를 노릴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자 다윗을 가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 자기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 다윗을 살려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는데 열을 올립니다.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이 때 이후로 사울 왕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주변 나라들과 싸웠다는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기록이 다윗을 죽이려 한 것뿐입니다. 심지어 군대를 풀어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고, 다윗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들으면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요나단의 입장에 그 상황을 바라보십시다. 다윗은 아버지의 적입니다. 아버지의 적일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생각대로 다윗이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된다면 그것은 자기의 자리를 잃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이어서 왕이 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나중에 요나단이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삼으실 것이란 사실을 요나단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하면 다윗은 요나단의 정적(政敵)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는 피를 나눈 자기 형제도 기꺼이 죽이는 것이 역사적 현실입니다. 자신이 왕이 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으면 자기의 형이나 동생들을 멀리 귀향 보내버리기도 합니다. 그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왕이라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형제의 우애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인물인 요나단과 다윗은 피를 나눈 형제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요나단은 자신이 당연히 올라가야 할 왕의 자리를 다윗에게 기꺼이 양보합니다.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하면 ‘다윗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다윗과 같은 충신을 죽이려고 하느냐’고 오히려 아버지에게 대들다가 아버지의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화가 난 사울은 다윗을 두둔하는 아들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미움을 받아도 요나단은 다윗을 끝까지 사랑합니다. 끝까지 다윗의 생명을 지켜줍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그런 사랑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요나단과 사울의 일가족이 모두 죽고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에, 다윗은 요나단의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에 포고를 내려서 ‘사울 왕과 왕자 요나단의 핏줄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는가 찾아보라’고 합니다. 죽이기 위해서 찾아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요나단에게 받은 사랑을 갚아주고 싶어서 찾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절뚝발인 므비보셋이 살아 있음을 알고는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마치 자기 아들인 것처럼 다른 왕자와 똑같이 대우해 주었습니다. 사울 왕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재산을 므비보셋에게 주었습니다. 폐왕의 혈통을 그렇게 대우해 주는 경우는 세계 역사에서 거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이 요나단에게 받은 사랑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명까지 내어놓은 사랑을 요나단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 내가 베푼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속상해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나는 그토록 사랑을 베풀어주었는데도, 왜 상대방은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지? 나는 그토록 사랑을 주었는데도, 왜 나에게는 돌아오는 것이 없는지? 아니 나에게 오히려 오해와 상처만이 되돌아오는지?’ 그런 것 때문에 마음 아픈 적 있지 않으십니까? 어쩌면 되돌려 받기 위해 베푼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되돌려 받기 위해 베푸신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복과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되돌려 받으려고 사랑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다윗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귀와 권세와 인기를 마음껏 누렸던 다윗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요나단이 없었다면 다윗이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바나바와 같은 좋은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상대방을 세워주고 자신은 그 뒤로 사라질 줄 아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에게도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주었던 요나단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과 같은 성군이 탄생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다윗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보다도 다윗을 다윗 되게 만들어준 요나단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룩한 마음을 가지십니다. 내가 누군가를 내 생명같이 사랑해 준다면 나의 사랑을 받은 그 누군가가 다윗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기꺼이 나 자신을 희생한다면 나의 섬김을 받은 그 사람이 위대한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왕자이면서도 왕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줄 줄 알았던 요나단, 다른 사람을 역사의 무대 위에 세워주고 자신은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질 줄 알았던 바나바, 어쩌면 오늘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존심 상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로에게 요나단이 되어 주십시다. 나보다 앞장 서려 하는 사람을 끄집어내려 짓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오늘 우리 시대에 누군가에게 나를 짓밟고 올라서도록 디딤돌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십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하여 누군가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 받은 자답게 누군가를 생명같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사십시다. 우리를 통해 다윗이 만들어지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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