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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여호수아

수 22장 1-6절(공동체를 위하여) - 안효관

by Preacher 2023.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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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22장 1-6

공동체를 위하여

안효관 목사 2017-04-23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어느 마을에 양을 치는 목동이 있었습니다. 낮에는 산등성이로 양떼를 이끌고 가서 풀을 먹이다가 저녁때가 되면 양을 몰고 산에서 내려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매일 어떤 특정한 장소에 이르면 양들이 가벼운 상처를 입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자 목동은 그곳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작은 가시나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시나무에 붙어 있는 가시들이 양들을 찌른 것입니다. 목동은 그 가시나무를 베어내야 양들이 상처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음날 가시나무를 베어내기 위해서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목동은 그 가시나무를 베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시나무에 걸려 있는 양털을 새들이 입에 물고 날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가시나무에 양들이 긁히면서 가시에 양털이 묻곤 했는데, 그 가시에 걸려있는 양털을 가져다가 새들이 둥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본 목동은 비록 양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는 가시나무이지만 그것을 베어내지 못하고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자신의 작은 것을 희생하고 양보하면 그로 인해서 다른 누군가가 유익을 얻습니다. 내가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포기하면 내가 포기한 것 이상으로 다른 누군가는 더 큰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누군에게가 자기를 희생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에 속해서 내가 속한 그 공동체를 아름다운 공동체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과 배려와 양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고 하나님의 품처럼 따뜻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해야 합니다. 아니 서로가 배려하고 양보하고 희생해야만 그 공동체를 통해서 서로가 하나님의 은혜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약 7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왔다고 해서 가나안 땅이 모두 자기들의 손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은 금방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7년의 긴 전쟁 끝에 그들은 어느 정도 가나안 성읍들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부스 족속의 성읍 등과 같이 아직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곳이 있긴 했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 때에’라는 표현은 여호수아서 전체로 본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7년이 지나면서 각 지파에게 분배된 땅을 다 점령했을 때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시각을 좁혀 본다면 본문 바로 앞인 여호수아 2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레위 지파에게 성읍과 목초지를 분배하는 일을 모두 마친 때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점령한 가나안 땅은 모두 아홉 지파 반에게 분배되었습니다. 나머지 두 지파 반 - 즉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 요단 동편에다 자기들의 정착지를 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지파 반은 가나안 땅을 분배받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렇게 가나안 땅 정복을 다 마친 후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를 요단 동편인 그들의 정착지로 돌려보내는 장면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 두 지파 반은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 요단 동편에서 이미 그들의 기업을 분배받았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이기에 7년 전에 자기들의 기업을 분배받은 것입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닌 요단 동편에 자기들의 기업을 삼겠다고 한 이유를 민수기 32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에게는 가축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요단 동편에 머물러 있을 때 그들이 머물고 있는 그 요단 동편은 목축하기에 아주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먼저 모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이 요단 동편을 우리의 소유로 주어 여기에 정착하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실제로 지금의 요르단인 요단 동편은 아주 비옥한 땅입니다.<지도1> 그곳은 요단강과 그 지류인 야르묵강, 얍복강, 아르논 강 등이 있어서 가축을 기르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이 아주 넉넉한 곳이고, 물이 넉넉하니 나무와 풀들이 울창하게 자라 목초지로는 더없이 좋은 땅입니다. 그래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그곳을 자기들의 기업으로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 때 모세가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먼저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한 그 두 지파 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정복할 때에 그들도 함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이미 땅을 분배받았다고 해서 다른 지파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에 나 몰라라 하면 다른 지파 사람들이 불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안에 가나안 동편에 땅을 분배 받은 지파들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아니 ‘우리가 앞장서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데 힘을 보태고, 그 땅을 다 점령할 때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일을 마쳤습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 전쟁을 했던 그 7년 동안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그들이 약속한대로 앞장서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 힘을 합쳐서 전쟁을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여호수아 21:43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다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다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의 사명은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기업의 땅인 요단 동편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지난 7년 동안 그들이 보여주었던 희생적인 노력을 치하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사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함에 있어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유익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은 이미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얻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는 자기들의 기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잘 압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점령하는데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가나안 땅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가나안 땅에서 우리 몫을 달라고 요청해서는 안 된다.’고 이미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목숨을 걸고 전쟁을 했다 하더라도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처음 약속처럼 열심을 다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자기에게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면 대충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굳이 내가 이렇게 애써서 고생할 필요가 뭐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내 일이라면 열심을 내어 죽고살고 일할 텐데, 내 일이 아니기에 대충해도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건 결코 전체를 위한 바른 생각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자기들의 기업을 먼저 받았습니다. 먼저 기업을 받은 사람으로서 기업을 얻기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나 편하자고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먼저 복을 받은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회사에 별로 능력 없어 보이는 한 사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별로 능력이 없는 그 사람에게 크게 관심 가지지 않았고, 그는 늘 윗사람에게 책망 듣기 일쑤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윗사람에게 책망을 들을 때에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책망을 들어 사무실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에는 “커피 타임입니다.”라고 소리치며 분위기를 전환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면 사무실 분위기는 금새 활기를 되찾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회사에서 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회사를 떠나갈 때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이 없어도 회사생활에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제안한 ‘커피 타임’이 사라진 후 사무실의 휴지통에는 휴지들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책상에는 얼룩들이 계속 늘어났습니다. 커피 타임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회사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퇴사한 그의 책상에 쓰여져 있는 쪽지 하나를 보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책상에는 이런 쪽지가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편할 때 누군가가 그 불편함을 견디고 있으며, 내가 조금 불편할 때 누군가는 편안할 것이다.”

 

그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고자 커피타임을 외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커피타임을 외칠 때 사무실의 분위기가 달라진 이유는 커피를 마시는 여유를 가졌기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속상한 마음을 털어내기 위해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는 다른 사람보다 빨리 커피를 마시고서 휴지통의 휴지를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의 책상에 묻어 있는 얼룩을 지웠습니다. 사무실의 분위기를 환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는 힘들여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 때서야 사무실 사람들은 능력이 없어 보이는 그가 얼마나 자기들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였는지, 얼마나 자기들에게 힘을 주는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내가 편하고자 하면 내가 편안함을 누리고 있을 그 때 다른 누군가는 불편을 감내해야 합니다. 내가 조금 불편할지라도 내 작은 시간을 누군가를 위해 사용한다면 그런 나의 작은 정성과 희생과 노력으로 인해 누군가는 편안함과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단 동편에 자기들의 기업을 받았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7년 동안이나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동족이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을 얻어야 하기에, 자기들은 이미 기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족을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없었다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그 전쟁은 더 오래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가나안 땅을 정복한 그 일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힘들지라도 그것이 자기들의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희생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힘든 전쟁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그 일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기간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무려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은 앞장서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들을 칭찬하면서 ‘날이 오래도록’이라는 말로 그들의 수고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수고와 희생에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전쟁에 참여한 7년 여 동안 그들은 집을 떠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받은 그들은 아내와 자식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남자들만 와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물론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의 모든 남자들이 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쟁에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 4:12-13절의 기록에 의하면 그 지파에서 4만 명 가량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나머지 남자들은 요단 동편에 자리를 잡고 있는 가족을 지키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남은 가족들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도 힘들겠지만, 7년 동안이나 가족들을 보지 못한 채 전쟁에만 참여해야 하는 사람들은 더 없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멀리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다른 부족의 침략을 받아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요단 동편 원주민들이 자기 가족들을 괴롭히지 않을까?’ 왜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그 7년 동안 단 한 번도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그래서 전쟁을 잠시 멈추고 가족들을 보고 와야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걱정된다고 집으로 빨리 돌아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빨리 점령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쟁에 임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일에 책임을 다했다.’고 칭찬해 줍니다.

 

그들이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가족들을 떠나 전쟁에만 전념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모세에게 약속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우리가 함께 힘을 합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광야생활을 시작할 때 가데스 바네아에서 그들의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요단을 건너와서 형제들을 돕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에서 가져온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를 보여주면서 ‘그 땅은 정말 살기 좋은 땅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 거인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땅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같이 갔던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는 충분히 그들을 이길 수 있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말해도,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 대신에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의 말에 속아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인데도 그들은 들어갈 수 없다고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7년 동안 가족들을 떠나 동족을 위해서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기에 그 땅을 반드시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이 정탐을 다녀왔을 때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나 상황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전히 그 땅에는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 거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점령해야 할 가나안 땅의 성읍들은 크고 견고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땅이기에 그들은 그 믿음으로 희망을 갖고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것입니다.

 

만일 그 땅을 점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낙 자손 거인들에게 죽을 것이 뻔한 데 들어올 용기를 낼 수 있겠습니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곧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기들이 살 땅을 얻기 위해 전쟁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들에게는 희망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요단 동편 좋은 땅에 기업을 받은 것처럼, 나머지 지파의 사람들도-내 동포 내 형제들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기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입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도전하는 힘을 줍니다. 그 희망이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싶을 만큼 우리의 상황이 절망적이라 하더라도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막을 여행하던 아버지와 아들이 사고를 만나 사막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불같이 뜨거운 사막은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목이 마르고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었으나 기댈 나무나 언덕조차 없었습니다. 아들은 절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죽음뿐인 것 같아요. 이제는 걸을 필요도 없이 그냥 이 자리에서 편하게 죽는 편이 낫겠어요.”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틀림없이 시원한 물과 우리가 쉴 수 있는 마을이 나타날 거야. 조금만 힘을 내자.” 아버지의 말에 아들은 겨우 힘을 내어 걸었습니다. 그러나 곧 또다시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들 앞에 커다란 무덤이 보였던 것입니다. 아들은 더욱 절망에 젖어 울부짖었습니다. “아버지, 무덤 속의 이 사람도 우리처럼 사막을 헤매다 죽은 것이 분명해요. 이젠 정말 절망뿐이에요.” 그러자 아버지가 힘을 주어 말했습니다. “아들아, 무덤은 희망의 징조란다. 무덤은 이 근처에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희망의 표시야.” 아버지의 말대로 그들은 곧 마을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무덤을 보고 절망한 아들의 말을 듣고 아버지 역시 한탄했다면 이들은 사막에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무덤을 희망의 징조로 본 아버지의 말을 따랐기에 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희망은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나옵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동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그 자리에 기꺼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그 어떤 아름다운 열매도 맺혀질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배려와 수고 없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건 교회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같은 교회를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서로를 위해서 희생하고 배려하고 수고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의 유익만 추구하거나,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를 만들 수 없을뿐더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희망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일 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그랬던 것처럼, 공동체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을 기쁨으로 감당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하고 배려하는 아름다운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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