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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에스라

스 9장 1-8절(남은 자의 사명) - 안효관

by Preacher 2023.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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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9장 1-8

남은자의 사명 [경찰, 교정주일]

안효관 목사 2014-11-11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어느덧 추수의 계절이 되어 황금물결을 이루던 벼들이 농부의 낫에 추수되어 곡간으로 들어갔습니다. 올해는 여러 농작물들이 풍년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참 반갑고 감사한 일입니다. 이렇게 농작물들이 풍년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은 곡식의 씨앗이나 뿌리가 튼튼하고 건강했기 때문입니다. 곡식의 씨앗이나 뿌리가 튼튼하고 건강했기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모판에 있는 모들이 병들었다면, 벌레들이 뿌리를 갉아먹거나 줄기를 갉아먹었다면 풍년은 고사하고 열매조차 기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과실수들도 역시 뿌리가 썩었거나 병들었다면, 벌레가 과수의 줄기나 잎사귀를 갉아먹었다면 열매를 맺지 못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과실수의 뿌리는 튼튼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모판의 모도 역시 절대로 건강해야 합니다.

 

그래서 농부는 농약을 주어 벌레를 없애고 병이 들지 않도록 잘 가꾸어 줍니다. 뿌리가 썩고 병들면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벌레가 뿌리를 갉아먹거나 줄기를 갉아 먹으면 그 벼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농사는 망쳐버리기 때문입니다. 과일나무 역시 뿌리가 썩었거나 병들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종자 씨와 뿌리는 잘 보존되어야 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종자씨와 같은, 뿌리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면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살다가 가진 재산을 다 처분하고 제 2의 고향을 떠나 낯선 조국 가나안 땅을 찾아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종자 씨와 같은, 나무의 뿌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남겨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병들면 이들이 무너지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종자 씨와 같은 뿌리와 같은 그들이 병이 들었습니다. 더 큰 문제인 것은 그들이 심각한 병이 들었음에도, 무너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깨닫거나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에스라는 대제사장의 16대 후손으로서 이방 땅인 바벨론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주전 458년경에 본국인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사람입니다. 남유다가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왕족들을 비롯하여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들과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정착하여 살면서 바벨론의 사회적 경제적 생활에 상당부분 동화 되었습니다. 이름을 바벨론 식의 이름 즉 바벨론의 신들의 이름을 따서 짓기도 하면서 삶에 문화가 바벨론화 되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여러 민족 즉 이란인, 두로인, 아랍인, 인도인 등이 혼합 되어 다민족이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관습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었고 잡혼 또한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길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또는 모두가 그렇게 하는데 우리만 ,나만 유대인과 혼인을 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바벨론식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유대식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에스라는 그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에스라는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자손으로 이방 땅인 바벨론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선택된 언약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조상이 대제사장이라는 것과 그의 후손으로서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그에 걸 맞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바사의 제 6대 왕인 아닥사스다의 배려로 약 9천명의 귀환자들을 인솔하여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포로귀환과, 성전 예배의 회복과, 율법 준행에 필요한 원조를 지원해 주겠다는 조서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배려로 풍성한 헌물을 싣고 감격하여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의 포로귀환은 3차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1차는 주전 537년에 2차는 458년에, 3차는 444년에 이루어졌는데 에스라는 2차 포로귀환자입니다. 에스라가 본국에 돌아왔을 때는 1차에 귀환한 즉 주전 537년에 귀환한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죽은 지 약 8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1차에 고레스왕의 칙령에 의해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약 5만 명이 귀환을 했었습니다. 그 때에 돌아온 사람들은 가장 먼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과 초막절을 준수 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죽자 1차 귀환자들과 그의 후손들이 이방 땅 즉 바벨론에서 살았던 관습과 생활방식을 그대로 적용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그들의 문화와 종교에 젖어 있었던 것을 쉽게 탈피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에스라가 이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1차 포로귀환자들이 생활에 전혀 변화가 없고 이방 땅에서 행했던 그대로 본국에서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이일 후에” 이일 후에라는 말은 에스라가 무사히 본국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하는지라”

 

2차 귀환자들이 본국에 돌아왔으나 또 그의 후손들이 있었으나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삶의 태도와 방식이 자기의 조상들이 행했던 그대로, 또 이방 땅에서 행했던 그대로 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라가 망연자실하여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당시의 문화는 잡혼과 함께 혼합종교가 대세였습니다. 그렇다고 포로귀환 한 그곳마저 그들마저 구별되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본문 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거룩한 자손이었습니다. ‘거룩한 자손은’ 거룩한 씨를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빛을 이방인들에게 비추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즉 방백들과 레위인들 즉 영적인 지도자들이, 거룩한 씨들이 이방인들과 섞이게 하여 죄를 짓는데 앞장을 섰다는 말씀입니다. ’섞이게 한다는‘ 것은 보증하다 혹은 혼합하다 사귀다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유익만을 좆아 사귀지 말아야 될 사악한 대상과 깊은 교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가 죽자 이스라엘백성들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리고 혼합종교에 물들어 이방인들과 혼인을 하며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두가 다 옛 생활로 되 돌아 갔습니다.

 

에스라는 남아 있는 자들과 1차 포로귀환자들이 정신을 차릴 줄 알았습니다. 적어도 본국에 돌아와서는 정신을 차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할 줄 알았습니다.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에, 조상들이 우상을 섬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리고 죄악을 저지른 것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방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비참하고 치욕스런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정신을 차릴 줄 알았습니다. 지은 죄로 인해, 회개하지 않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모셨던 거룩한 성전이 이방인들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고 기물들은 탈취당하여 선민으로서의 자존심이 곤두박질 쳤기에, 그래서 낯을 들 수가 없는 일을 당했기에 이제는 정신을 차릴 줄 알았습니다. 그래야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살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가치관에 중독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문화에 중독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해가 되고 악이 되는 전통이나 관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몸에 배어버린,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을 고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편화 되었다고, 다수가 행한다고 기독교인도, 신앙인도 똑 같이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실 앞에서, 시류 앞에서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정상은 비정상이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에는 너무나도 부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면 생존이 불가능할 것 같아서였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구조와 문화가, 종교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도, 심지어 제사장들까지도 그렇게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그렇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사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도덕과 윤리가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아니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혼전 순결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건만 이것도 무너졌습니다. 젊은이들의 사고가 결혼하기 전에 살아보고 결혼을 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또 동성연애가 당연한 것처럼 그들의 인권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동성애자들의 주례를 거부한 목사님에게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생활을 하게 한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성연애 합법화 되는 것을 찬성하고 동양에서 한반도가 제일먼저 법을 제정 하는 것이 좋다고 동성연애의 지지발언을 했고, 프란치스코 교황도 동성연애의 옹호발언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B.C 1900년경에 유황과 불에 멸망당했습니다. 그들의 대표적인 죄악이 동성연애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사탄은 문화를 타고 역사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거부감이 없고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요즘 현실을 거스르는 것은 시대에 뒤 떨어진 사람취급을 받습니다. 시류를 거스르는 것은 무엇인가 모자라는 사람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현시대에 발맞추려고 합니다. 시류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판단할 여유도 없이 휩쓸려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다르진 않은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도 비기독교인도 현 시대에 발맞추기 위해, 시류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현 시대는 할 수만 있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야 하는 세상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마치 그것이 지혜로운 것처럼, 능력인 것처럼, 그래야만 되는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해야만 되는 것처럼 전락해 버린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세대를 보시고 어떤 마음이실까요!!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가슴을 치시며 안타까워하실까요? 기독교인인지 비기독교인 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이 현실을 어떻게 보실 것 같습니까? 예수님은 사도바울을 통해 로마서 12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당부하시기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온전하게 여기시는 삶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즉 이 세대를 거스르며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삶은 어떤 삶이겠습니까? 이 세대를 거스르고 사탄이 만들어 놓은 문화를 거스르는 삶은 어떤 삶이겠습니까?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담대히 맞서서 이겨내는 삶입니다. 어떤 환경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어떤 역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한 순간에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사상누각과 같습니다. 기독교인이 본질을 잃어버리면, 원칙과 기본을 잃어버리면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말씀을 따라 가지 않고 사람의 형편과 생각대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자기들의 사상과 이념에 매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신앙을 병들게 했고 그들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분명한 신조가 있어 무엇을 믿고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신앙이 없으면 즉 말씀이 없으면 사상누각과 같습니다. 시대의 도도한 흐름을 거슬릴 수 없습니다.

 

사사기 초기에 이스라엘이 왜 무너졌는지 아십니까? 말씀의 맥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중요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분명한 말씀보다 타협의 말씀이 인기를 얻고 지지를 얻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인은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세속적인 것들과 짝 해서도 안됩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순간, 세속적인 것들과 짝하는 순간 서서히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고 심령이 병들어 결국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이방인과의 통혼을 엄금하셨습니다. 신명기 7장 3-4절입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들이 섬기는 신 즉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가증한 우상을 섬길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하나님과의 언약도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끝은 파멸이며 영원한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려하셔서 즉 하나님을 떠나 멸망하게 될 것을 막기 위해 강력하게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하셨습니다.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이방인과의 결혼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을 때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또 이방여인으로 기생이었던 라합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상천하지에 하나님 같은 신이 없다는 것을 믿고 정탐꾼을 도와주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오르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모압 여인 룻도 히브리인인 보아스와 결혼하여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방여인들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더 좋았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신명기 21장 10-14에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규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또 정결 의식을 통해 정결하게 되면 그 사람도 선민의 대열에 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하신 것은 신앙의 순수성 보존을 위한 것이지, 결코 혈통적이거나 배타주의적 민족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가 인생말년에 쓴 맛을 본 모델이 있습니다. 솔로몬입니다. 솔로 몬은 초기에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순수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왕으로 등극한 후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7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성전을 건축했고 일천번제를 드릴만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책적으로 이방나라의 여인들과 정략결혼을 하면서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결국 나라가 분단되는 암울한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열왕기상 11장 4절상반절과 9절입니다. “솔로몬의 나이가 많은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 솔로몬이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맞을 때 이방여인들이 몸만 온 것이 아니고 그들이 섬기는 신과 함께 왔습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시돈의 여신 아스다롯을, 암몬의 밀곰을, 모압의 그모스를 등을 섬기면서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그러면 안 된다고 이제 그만 돌아서라고 경고하셨음에도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의 결말이 비참하게 끝을 맺었습니다. 나라를 분단시키는 주범이 되었고 역사적으로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경계의 대상, 경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에스라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을 비롯하여 자기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므로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가 비참하고 치욕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 7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이 말씀을 새번역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조상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 너무나도 큽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왕들과 제사장들까지도 여러 나라 왕들의 칼에 맞아 죽거나 사로잡혀 가고 재산도 다 빼앗기고 온갖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상들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너무나도 가슴 아픈데 지금 거룩한 자손으로 거룩한 씨로 남겨진 자들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통탄하며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회개는 정말 죄악의 심각성을 느끼게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에스라가 지도자들과 레위인들이 거룩한 자손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너무나도 기가 막혀 속옷과 겉옷을 찢으며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회개하였습니다. 또 본문 6절에서도 이렇게 회개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조상들이 지은 죄와 자기백성들이 지은 죄가 너무나도 크고 더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 또한 이 나라를 살리려면 우리조상들이 지은 죄와 우리 동족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교회를 시험에 빠뜨린, 사회를 어지럽게 한 죄를 회개하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직자들이 이권다툼에, 명예욕에, 정욕에, 탐욕에 매여 성도들을 넘어뜨리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사회에 지탄을 받게 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누구의 죄라고 손가락질 하기보다,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떠넘기기보다 우리가 엎드리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통탄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에스라가 회개하며 그 백성을 흔들어 깨운 것처럼 우리가 회개하며 잠든 영혼들을 흔들어 깨워야 하고 병든 심령들의 치료와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로 통하여 거룩한 바람이, 은혜의 바람이 불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남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의 1907년은 잊을 수 없는 해입니다. 기독교의 획기적인 성령의 역사,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해이기 때문입니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장대현 교회에서 기도회와 사경회가 열렸습니다. 평안남도 전역에서 올라온 약 1000여명이 모여 집회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에 회개의 운동,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회개를 동반한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때에 회개의 포문을 연 사람은 길선주목사님 이였습니다. 이 분이 1년 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당시 100달러에 해당하는 거금을 착복했는데 성령께서 그의 심령을 비추시자 견딜 수가 없어 회개한 것입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사람입니다. 내가 교회의 부흥을 막고 있었습니다”라며 마룻바닥을 뒹굴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를 구박한 일, 첩을 둔 일, 남을 속여 폭리를 취한 일, 도둑질한 일, 부모를 미워한 일, 거짓말한 일, 달걀 값을 속여 선교사의 돈을 갈취한 일, 뿐만 아니라 강도, 강간, 살인죄까지 모두 고백하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회개의 역사가, 이 회개의 운동이 한국 전역에 활화산처럼 번져나가 한국교회의 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고 한국교회가 새롭게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회개가 살 길입니다. 회개가 회복과 부흥을 일으키는 계기가 됩니다. 이 시대에 거룩한 자손으로 거룩한 씨로 남겨둔 우리가 말씀위에 굳게 서서 주님의 역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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