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 --------------------/에스더

에 4장 10-17절(축복의 통로로 사용되는가) - 조영식

by Preacher 2023. 12. 31.
728x90
반응형

에4장 10 - 17

축복의 통로로 사용되는가

조영식 목사 2017.4.23.일

김포한신교회 http://kimpohansin.onmam.co.kr/

 

10.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전하기를/

11.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12.그가 에스더의 말을 모르드개에게 전하매/

13.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14.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15.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17.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가 명령한 대로 다 행하니라/

 

0. 들어가는 글

 

4월 네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나라 19대 대통령 후보로 15명이나 출마했습니다. 역대 최다 후보가 등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통령 선거 벽보가 너무 길어서 붙이는 장소를 찾기도 곤란한 지경입니다. 우리나라에 어떤 대통령이 필요합니까? 오늘 본문의 에스더같은 지도가가 선출되어야 합니다. 에스더처럼 “죽으며 죽으리이다”는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대통령을 세워야 합니다(16절). 오늘 분문은 유다 백성들이 바사(페르시아)의 포로 생활 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아말렉 사람 하만의 지위를 높여주었습니다(에3:1). 대궐문에 있는 왕의 신하들이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유다 출신 모르드개는 꿇지도 않고 절하지도 안했습니다(에3:3). 하만은 모르드개가 무릎을 굻지도 않고 절하지도 안함을 보고 매우 노하여,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 생각하고 유다 민족을 다 멸하고자 했습니다(에3:5,6). 오늘 말씀을 통하여 유다 민족이 죽음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가?

 

에스더는 성경 66권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과 관련된 호칭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스더가 성경에 포함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배후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만을 찾다가 실망하지 말고, 배후에서 보이지 않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에스더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유다 백성들을 구원했습니까? 모르드개는 조카 에스더를 자기의 딸 같이 양육했습니다(에2:15). 그리고 에스더는 삼촌과 함께 포로로 잡혀 왔지만 왕후가 되어서 최고의 출세를 하였습니다(에2:17). 왕후가 된 에스더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입니까? 그녀가 왕후로만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복이 아닙니다. 왕후가 된 에스더가 “어떻게 쓰임 받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복이 되느냐를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모르드개는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고 합니다(14절).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를 통하여 민족을 구하는 일에 사용할 때 하나님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자리, 어떤 재능, 어떤 물질을 소유 하든지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복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복이 되느냐를 결정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가진 것과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연결될 때 축복의 통로라고 합니다. 예전에 한국교회에 축복의 통로라는 말을 제법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교회에서 축복의 통로라는 말이 조용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가진 것이 많아져서 하나님의 복이라고 할 때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진 것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불편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에서 축복의 통로라는 말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우리의 가진 것이 축복의 통로가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이 주셨다는 청지기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청기기의 믿음이 없으면 주님께 쓰임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청지기 믿음이 되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그리스도인으로 커밍아웃(coming-out) 할 수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모르드개를 통하여 에스더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모르드개는 그녀에게 자기 민족을 위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간절히 구하라고 합니다(8절). 그러나 당시의 페르시아는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 있었습니다(11절). 이런 상황에서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잠잠하지 말고 유다인으로 커밍아웃을 하라고 합니다(14절). 모르드개는 그녀에게 왕궁에서 왕후로 있는 것보다도 유다인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13절). 그는 그녀에게 왕후자리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이 더 귀한 줄 알고 유다인으로 커밍아웃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가장 귀한 것을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더 귀한 줄 알고 그리스도인으로 커밍아웃을 할 수 있습니까? 지금 한국 교회가 조롱과 비난을 받으면서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그리스도인임을 숨기는 신앙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숨어있는 보수층을 샤이 보수라고 하는 것처럼 숨어있는 샤이 그리스도인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샤이 그리스도인들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하나는 기회주의 신앙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보다도 자신의 가진 것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하여 숨어있는 샤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우리들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도인임을 더 소중히 여겨서 커밍아웃 하기를 소망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세상의 방식대로 살기 때문에 숨어있는 샤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감으로 빛과 소금이 되어서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인으로 커밍아웃 하기를 소망합니다.

 

3. 우리의 장벽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가?

 

에스더는 세상의 법에 갇혀서 자기 민족을 구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바사의 법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입니다(11절). 에스더는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고 합니다(11절). 그녀가 세상의 법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오직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가로막는 세상의 법을 이겼습니다. 그녀는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합니다(16절). 에스더 기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죽으면 죽으리라”의 기도로 왕후의 자리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포기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린아이 신앙일 때는 채워달라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할수록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기도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의 기도로 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사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자기 민족을 구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백세에 아들을 낳아서가 아니라 백세에 낳은 아들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창22:10).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기도를 했기 때문에 모든 생명을 구원했습니다(눅22:42). 지금 한국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개혁을 외치지만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채우는 것은 열심이지만 자신의 것을 포기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한국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이 죄를 범했어도 자신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팀으로 갈등을 만들어서 세상의 조롱과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얼마만큼 복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만큼 포기했느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포기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이 자신의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포기함으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들이 청지기 믿음으로 주님께 쓰임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감으로 빛과 소금이 되어서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인으로 커밍아웃을 하며, 자신의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포기함으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