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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에스더

에 6장 1~11절, 8장 15~17절(하나님의 모자이크) - 홍문수

by Preacher 2023.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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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6장 1~11, 8장 15~17

하나님의 모자이크

홍문수 목사 2018.08.05.

신반포교회 http://sbpch.com/

 

먼저 사진 한 장을 보여드리죠. 이게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성화입니다. 그런데 일반 그림과 좀 다릅니다. 모자이크 기법으로 제작한 작품입니다. 모자이크는 여러 가지 빛깔의 돌, 유리, 금속, 타일 등을 조각조각 붙여서 만드는 기법입니다. 유럽의 교회당이나 성당에 가 보면 이런 모자이크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완성된 것을 보니까 어떤 그림인지 확실히 알 수 있지만 완성되기 전에는 도대체 뭐가 뭔지 몰랐을 겁니다. 하지만 작가 자신은 어떤 그림인지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구경하는 사람이 “도대체 이게 뭐요?”라고 물었다면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겁니다. “좀 기다려 봐!”

 

모자이크 작품을 보면서 문득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섭리(攝理, providence)가 마치 모자이크와 같다!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역사하십니다. 어떻게 될지 미리 아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매일 당면하는 문제들 앞에서 “이게 뭐지?”하고 의심하거나 염려하고 방황하기 쉽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섭리의 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 한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성경에 ‘섭리’라는 단어가 나올까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인물이나 사건의 기록은 부지기수입니다. 신학자들이 이런 사례들을 관찰하면서 하나님의 역사(役事)하심을 가리켜 ‘섭리’라는 용어로 규정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섭리’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인간 포함)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간섭하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입니다. 그러니까 섭리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대상으로 선한 목적을 갖고 일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보존, 통치, 그리고 협력입니다. 보존과 통치는 마치 이런 겁니다. 건축주가 빌딩을 하나 건축합니다. 그러고 나서 방치하나요? 아니죠. 건축주가 그것을 유지, 관리, 보수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이런 사실을 증거하는 성경구절 몇 개를 소개해드립니다. 느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시103:19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삼상2:6~7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그리고 인간 같은 이성적 피조물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과 조화를 이루며 역사하십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집니다. 그게 바로 협력입니다. 성도의 기도가 유효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기도에 대해 응답하심으로 협력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섭리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왜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느냐 이겁니다. 렘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섭리의 목적은 만물을, 특히 인간을 평안하고 유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섭리의 목적을 가장 명쾌하게 증거하는 구절이 바로 롬8:28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당장 눈앞의 상황이나 문제가 왜 생겼는지 잘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 놓고 보면 그 모든 게 선한 결과를 이루게 된다는 겁니다.

 

[1] 하나님의 섭리 :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이루심

 

그러므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the best thing), 가장 좋은 때에(at the best time), 가장 좋은 방법으로(in the best way)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간단히 ‘3 가지 베스트’(3 Best’s)라고 표현해 봅니다.

 

오늘 본문 에스더서를 보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에스더서 어디를 살펴봐도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신기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시대 상황 가운데, 그리고 에스더, 모르드개, 유대인 등의 인물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섭리가 생생하게 나타납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실화인데도 마치 영화나 드라마처럼 박진감이 넘치고, 반전, 역전, 전화위복 등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넘치는 스릴, 서스펜스 등 드라마의 재미가 듬뿍 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서프라이즈’가 연속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전체를 죽 읽어보면 재미도 있고 은혜가 넘칩니다.

 

특별히 이 시간에는 에스더보다 그의 사촌 오빠 모르드개에게 초점을 맞추어 살펴봅니다. 때는 바사(Persia)의 아하수에로 왕(B.C. 485~464 재위) 당시였습니다. 남 유다 백성 다수가 바벨론에게 포로로 끌려갔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정권의 차원을 넘어 나라가 바뀌어 바사 제국이 됐습니다.

 

에스더는 조실부모한 고아 출신입니다. 다행히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그를 맡아서 길렀습니다. 어느덧 에스더가 장성했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왕후가 됩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터집니다. 모르드개를 비롯한 유다 백성 전체가 학살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그렇게 되면 왕후라도 에스더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연인즉슨 이랬습니다. 그 당시 왕 다음 2인자(총리)로 하만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대궐을 출입할 때면 신하들이 모두 굽실거리며 절을 합니다. 유독 문지기인 모르드개만 고개를 꼿꼿이 들고 절하지 않습니다. 그의 직위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였는지 잘 모르지만 아주 높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설사 높다고 해도 하만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절을 하지 않으니까 하만이 불쾌하게 여기고 몹시 미워합니다. 나중에 그가 유대인인 것을 알고는 아예 유대인 전체를 진멸하려고 합니다. 왕을 속여 유대인 학살 법령을 제정 공포하고 날까지 잡았습니다. 모르드개에게 분이 안 풀린 하만은 아예 자기 집 뜰에 50 규빗(약 23m) 장대를 세워놓고 달아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정말 큰일 났습니다. 모르드개를 비롯해서 많은 유대인들이 길거리로 나와서 금식하고 난리입니다.

 

한편 궁궐에 홀로 있던 에스더는 깜깜하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사람을 보내 급박한 상황을 알리고 왕에게 나아가 간청해 보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바사의 왕실 경호법 상 아무리 왕후라도 왕이 부르기 전에 임의로 나아가면 위험합니다. 만일 왕이 달가워하지 않으면 면직되거나 처형될 수 있습니다. 에스더가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 지 30일이 지난 상황이었는데 혹시 왕의 심기가 불편할 수도 있고 최소한 에스더에게 관심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에스더로서는 당연히 주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르드개가 호통을 치자 에스더가 정신을 차리고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결단하고 왕에게 나아갑니다. 다행히 왕이 에스더를 어여삐 보고 맞아들입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신중한 사람으로 왕에게 당장 간청하지 않고 적당한 시기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에6:1~2 “1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2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을 지키던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cf. 에2:21~22) 왕이 잠이 안 오는 밤에 역대 일기(궁중일기)를 꺼내오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읽힙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모르드개에 관한 기록을 접하게 됩니다. 내시 두 사람이 왕을 암살하려고 했을 때 모르드개가 알아내서 고발한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왜 넘어갔는지 모르지만 가장 좋은 때에 드러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왕은 모르드개에게 포상하지 않았음을 알고 크게 상을 내리려고 합니다. 그때 마침 일찍 입궁한 하만이 밖에 있다가 왕의 부름을 받습니다. 왕이 존귀한 사람에게 어떻게 포상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그는 착각을 합니다. 자기를 가리키는 줄 알고 최고의 포상을 건의합니다. 왕복을 입히고 말에 태워 백성들 앞에 퍼레이드를 하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웬걸 자기가 아니고 모르드개에게 포상하라는 겁니다. 하만은 당황했지만 왕의 명령을 받들어야 합니다. 에6:11 “하만이 왕복과 말을 가져다가 모르드개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되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니라”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당황한 하만! 그 후에는 우여곡절 끝에 그가 왕의 진노를 사서 결국 처형됩니다. 놀랍게도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워놓은 장대에 자기가 매달립니다. 에7:10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그 후에 어떻게 됐나요? 더욱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에8:1~2 “1 그 날 아하수에로 왕이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집을 왕후 에스더에게 주니라 에스더가 모르드개는 자기에게 어떻게 관계됨을 왕께 아뢰었으므로 모르드개가 왕 앞에 나오니 2 왕이 하만에게서 거둔 반지를 빼어 모르드개에게 준지라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하만의 집을 관리하게 하니라” 왕이 하만의 총리 직을 모르드개에게 넘겨주고, 재산은 에스더에게 하사합니다. 반전을 넘어 역전입니다. 드라마틱한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에8:15 이하를 보면 정말 멋진 클라이맥스가 펼쳐집니다. 에8:15~16 “15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 앞에서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16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모르드개가 총리로 임명받은 후 복장을 갖춰 입고 금면류관도 쓰고 수도 수산 성 시내를 돌며 퍼레이드를 벌이는 장면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웠을지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어서 에8:17 보면 전국적으로 유대인의 잔치가 열리게 됩니다. “왕의 어명이 이르는 각 지방, 각 읍에서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명절로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본토 백성들이 깜짝깜짝 놀랍니다.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 아니라면 절대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유대인이 됐습니다. 이 말은 신앙 고백을 하고 할례를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도 혈통이나 민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신앙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고백하고 그 표시로 할례를 받으면 어엿한 유대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을 기념해서 부림일(=부림절)이 제정됩니다(에9:17~32). 유대력으로 아달 월(12월) 14일~15일 양일간입니다. 히브리어로 ‘제비’ 혹은 ‘추첨’이란 뜻의 단어가 ‘부르’인데 인데 그 복수형이 ‘부림’입니다. 하만이 부르(제비)를 통해 날을 잡았지만 오히려 그 날이 유대인에게 승리의 날이 됐음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죽 읽다보면 흥미진진하며 하나님의 섭리가 정말 놀랍습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 그리고 유대인들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그런데 그 결말을 보기 전에는 어떠했겠습니까? 두렵고 힘들었을 겁니다. 마치 모자이크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어떤 그림이 될지 다 알고 있지만 옆에서 보는 이는 잘 몰라서 답답하고 당황스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늘 두렵고 떨리고 염려가 됩니다. 당당 눈앞의 고난에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면 마음이 짓눌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 있다면 그 두려움과 염려를 넉넉히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적극적으로 하나님 섭리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현실은 힘들고 미래가 두려울 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해야 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146: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자의 신앙 자세 : 순결성, 일관성, 충직성

 

하나님 섭리 신앙이 있으면 더 이상 의심도 염려도 하지 말고 묵묵히 합당한 신앙 자세를 취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순결성을 지키고,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의 일관성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대신 오직 하나님의 눈만 의식하며 충직성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모르드개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① 순결성 :

 

그는 무엇보다 신앙의 순결성(purity )을 지켰습니다. 그가 대궐의 문지기로 있으면서 하만이 출입할 때 다른 신하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절을 할 때 혼자만 절을 하지 않는 게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에3:2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하들이 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고관대작 앞에서 꼿꼿하게 서 있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믿는 유대인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인간이라도 우상화하거나 그 앞에 절하는 일을 금합니다. 그러니까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것은 객기가 아니라 신앙의 순결성을 지키려는 용기 있는 행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② 일관성 :

 

그러자 사태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하만은 사람들이 그는 높이고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는 자였는데 모르드개가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분노했고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합니다. 더 나아가 그가 유대인인 사실을 알고 유대인 전체를 진멸하려고 흉계를 꾸밉니다. 사태가 이쯤 되면 웬만한 사람들은 흔들리기 십상입니다. 결심이 흔들리고 신앙이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끄떡없었었습니다. 신앙의 일관성(integrity)을 유지했습니다.

 

유대인 전체가 학살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수산 성에서도 지방에서도 난리가 납니다. 에4:3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베옷을 입고 재에 눕는 것은 회개와 절박함의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곳곳에서 울고불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모르드개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에5:9 “그 날 하만이 마음이 기뻐 즐거이 나오더니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어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을 보고 매우 노하나”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킵니다. 이게 신앙의 일관성입니다. 마치 상록수와 같은 겁니다. 상록수는 여름에만 푸르른 게 아닙니다. 눈이 오고 추운 겨울철에도 여전히 푸릅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혼인 서약을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결혼식 주례를 할 때면 신랑과 신분에게 살짝 미안합니다. 가장 아름답게 단장하고 행복에 겨운 모습으로 서 있는 그들에게서 서약을 받아내야 합니다. “신랑은(신부는) 옆에 선 신부를(신랑을) 기쁠 때나 슬픈 때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부요하거나 가난하게 되는 모든 경우에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며 도와주고 보호하며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굳게 지키기로 다짐하십니까?” 기쁜 것, 건강한 것, 부요한 것만 말하고 슬픈 것, 병드는 것, 가난한 것은 말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굳이 이렇게 묻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게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별의 별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부부의 언약을 지킬 것인지 확인하는 게 마땅합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결성과 더불어 일관성이 중요합니다.

 

③ 충직성 :

 

그리고 충직성(loyalty)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럴 때 묵묵히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그랬습니다. 그는 대궐의 문지기로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사람에게 아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파악하고 고발합니다. 에스더를 통해 상부에 보고함으로 왕이 화를 모면하게 됩니다. 에2:21~22 “21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22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리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아뢴지라”

 

사도 바울은 이런 충직성에 대해 이렇게 교훈합니다. 골3:23~24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최선을 다해 충성하되 사람 눈치를 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라는 말입니다. 인생을 주관하시고 책임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신앙의 순결성과 일관성을 지키며, 충직성을 실천하며 살던 모르드개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가장 좋은 것을 이루어주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서프라이즈를 경험하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이런 신앙을 지키면서 끝까지 분투해야 합니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렇습니다. 아무리 현실이 답답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섭리주이십니다. 아름다운 인생의 모자이크를 만들고 계십니다. 없는 길도 만들어가며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주십니다. 사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많은 분들이 애창하는 찬양이 있습니다.「나의 가는 길」(원제 : God will make a way)이란 곡입니다. “나의 가는 길 주님 인도 하시네 / 그는 보이지 않아도 날 위해 일하시네 / 주 나의 인도자 항상 함께 하시네 / 사랑과 힘 베푸시며 인도 하시네 / 인도 하시네 / 광야에 길을 만드시고 / 날 인도해 / 사막에 강 만드신 것 보라 / 하늘과 땅 변해도 주의 말씀 영원히 / 내 삶 속에 새 일을 행하리 … (God will make a way, Where there seems to be no way. He works in ways that we cannot see, He will make a way for me. // He will be my guide, Hold me closely to His side. With love and strength for each new day, He will make a way for me, He will make a way for me. // By the roadway in the wilderness, He will lead me. Rivers in the desert will I see. Heaven and earth will fade, But His word will still remain, He will do something new today. … )”

 

스코틀랜드의 세계적인 타악기 연주자 에블린 글레니(Evelyn Ann Glennie, 1965~ )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8세 때부터 청각 장애를 겪다가 12세에 청각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얼마나 암담했을까! 그런데 음악의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음악을 하다니! 상식적으로 망이 안 됩니다. 하지만 그는 당당히 해냈습니다. 수십 종의 타악기를 연주하게 되었고, 그래미 상 2회 수상, 2015년 음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폴라 음악상 수상 등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2016년 내한 공연 장면을 담은 영상을 보니까 정말 놀랍습니다. 타악기 연주자는 대개 뒤에 서 있다가 잠시 연주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가운데 맨 앞에 서서 연주회를 주도합니다. 타악기 연주를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는 맨발로 타악기가 만들어내는 소리의 진동을 발끝과 온 몸으로 느끼며 연주합니다. 넘치는 에너지로 감동을 연출합니다. 정말 멋집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장애 앞에서 처음에, 아니 고비마다 얼마나 막막하고 힘들었을까! 이게 길인가? 이 길로 가면 정말 뭐가 나올까? 방황할 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역경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남들이 가보지 못한 새 길,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길이 열렸습니다. 멋진 인생의 모자이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현실 앞에 서 있습니까? 혹시 답답하고 힘든 상황입니까?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면서 두려운 가운데 서 있습니까? 그래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섭리주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킬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미리 아시고 내 인생의 모자이크를 만드실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부디 그런 확신과 소망을 품고 당당히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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