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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에스더

에 5장 1-8절(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냐) - 조영식

by Preacher 2023.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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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5장 1-8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냐

조영식 목사 2014.5.18.일

김포한신교회 http://kimpohansin.onmam.co.kr/

 

1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4 에스더가 이르되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 하니/

5 왕이 이르되 에스더가 말한 대로 하도록 하만을 급히 부르라 하고 이에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가니라/

6 잔치의 술을 마실 때에 왕이 에스더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하니/

7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소청, 나의 요구가 이러하니이다/

8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고 왕이 내 소청을 허락하시며 내 요구를 시행하시기를 좋게 여기시면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오소서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하니라/

 

0. 들어가는 글

 

5월 셋째 주일입니다. 오월의 푸르름이 우리들이 겪고 있는 모든 아픔을 덮을 듯이 더 푸르러만 가는 계절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가장 갈등 관계를 겪었던 민족은 블레셋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보다 더 질긴 악연을 가진 민족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멜렉 족속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한 후에 광야에서 제일 처음 아멜렉 족속과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질긴 악연은 나라가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온 후에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페르시아가 통치하던 시절에 아멜렉 족속의 하만이 페르시아에 있는 유대인들을 진멸하고자 합니다(에3:8,9).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자신의 조카 에스더 왕비에게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고 합니다(에4:8). 삼촌의 부탁을 받은 에스더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에스더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깨닫고 우리들도 동일한 은혜가 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기도 후의 인도하심이 있는가?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뜰에서 왕 앞으로 나아갔습니다(1절). 페르시아 법은 누구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규를 내밀어야 살 수 있습니다(에4:11). 다행히도 왕은 그녀가 뜰에 선 것을 보고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규를 내밀었습니다(2절). 왕이 에스더에게 금규를 내민 것이 우연입니까?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왕이 금규를 내민 것은 기도한 후에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녀는 왕 앞에 나오기 전에 모르드개에게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기도 부탁을 하였습니다(에4:16).

 

우리는 에스더가 삼일 동안 금식 기도하며 고백했던 ‘죽으면 죽으리이다’를 많이 묵상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기도한 후에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는지 놓쳐버릴 수 있습니다. 축구에는 전반전과 후반전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먼저 기도해야 된다는 것은 전반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한 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후반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축구는 전반전과 후반전이 모아져 승부가 결정 납니다. 어찌 보면 우리들은 기도의 전반전만 있고 삶에서 인도를 받는 후반전을 뛰지 않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이 삶의 인도를 받는 후반전을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들은 모든 일에 답을 얻기 원하며 그렇지 않으면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인생의 문제에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은 답도 주시지만 오히려 길을 안내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감으로 각자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뇨?

 

아하수에로 왕은 금규를 잡은 에스더에게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라고 합니다(3절). 이게 웬 떡입니까!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답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답이 아니라 길을 택했습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하만과 함께 잔치에 초대합니다(4절). 잔치에 초대 받은 왕은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라고 합니다(6절). 이처럼 왕이 두 번씩이나 허락하면 응답이 확실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에스더는 소원을 말하지 않고 다음날에 왕과 하만을 잔치에 다시 초대하고 있습니다(8절). 그녀는 위기의 순간에 급할수록 돌아가고 있습니다.

 

에스더가 소원을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누구의 개입이냐?’ 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개입과 하나님의 개입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녀는 왕에게 자신의 소원을 말함으로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테바’의 원리입니다. 노아가 건조한 방주는 ‘테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테바’의 특성은 진행 방향, 진행 속도, 정지 장소들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동력입니다. 모든 진행 사항을 철저하게 하나님께 위임한 것이 ‘테바’입니다. 에스더는 ‘테바’의 믿음으로 자신이 개입하지 않고 모든 진행을 하나님의 개입에 맡겼습니다.

 

둘째는 ‘누구의 확신이냐?’ 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확신과 하나님의 확신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에스더는 동족으로부터 삼일 동안 금식 기도 후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삼일 동안 금식 기도를 했으니 얼마나 충만하겠습니까? 또한 왕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였으니 얼마나 확실합니까? 그러나 에스더는 자기 확신이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기도를 했던 자신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기도하고 헌신했느냐를 바라볼수록 자기 확신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했던 것보다 기도를 듣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의지할수록 하나님의 확신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셋째는 ‘누구의 때이냐?’ 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때와 하나님의 때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때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자신이 주도합니다. 아멜렉의 하만은 유대인을 진멸을 주도하기 위해 자신의 권세와 재물을 사용하였습니다(에3:9). 그는 지금의 때가 자신이 주도권을 잡은 때라고 착각에 빠져있었습니다(11절). 그러나 하나님의 때를 따르는 사람은 자신의 주도권을 내려놓습니다. 에스더는 왕후라는 권세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였습니다. 그녀는 물이 차야만 넘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3. 그날 밤에?

 

에스더가 소원을 말하지 않고 다음날로 미루었을 때 놀랍게도 ‘그 날 밤’에 하나님의 개입이 이루어집니다(에6:1).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역대 일기를 읽다가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 음모에 관한 고발 사건을 알게 됩니다(에6:2). 이 일이 우연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여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왕이 에스더를 향한 사랑만으로는 하만의 음모를 뒤집기에는 2% 부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모르드개의 충성한 사건이 더해짐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확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에스더 혼자가 아니라 모르드개를 함께 사용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만의 음모를 역전 시킨 후에 모르드개를 지도자로 세워 하나님의 때를 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한 수만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두 수, 열 수까지 보시면서 자신의 때를 이루어 가시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한없이 수가 높으신 하나님에 대하여 이사야는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합니다(사55:8,9).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길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따라가는 ‘테바’가 되어야 합니다.

 

몇 달 전에 느헤미야서는 하나님의 기적이 없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간다는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에스더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조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자신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개입과 확신과 때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개입과 확신과 때를 따르는 테바의 은혜가 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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